박록주

국악인, 판소리 명창, 무형문화재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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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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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판소리 명창, 무형문화재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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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는 12세에 소리에 입문하여 평생을 판소리에 바친 동편제 대명창입니다. 남성적이고 꿋꿋한 창법을 계승 발전시켜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판소리 보존과 전승에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춘향가와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한국 국악계의 거목입니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과 국악계 발전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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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명창의 탄생]

대한제국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어난 박명이(朴命伊)는 예명 '녹주'로 활동하며 판소리 대명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탄생은 한국 국악계에 큰 별이 뜨는 순간이었습니다.

호는 춘미(春眉)입니다. 호적상으로는 2월 15일 박재보(朴在普)와 박순이(朴順伊)의 차녀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박중근(朴重根, 개명 후 박재보), 어머니는 권순이(權順伊)의 3녀로 태어났습니다.

1916

[12세, 소리에 눈뜨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판소리에 입문했습니다.

부친의 권유로 당대 명창 박기홍에게 '춘향가'와 '심청가' 일부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때 '녹주'라는 예명을 지어 본격적인 예술 활동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1918

[기생 수업 시작]

김창환, 김봉이 등에게 단가와 토막소리를 배우며 소리의 기본기를 다졌습니다.

이어 대구의 달성권번에 다니며 춤, 시조, 소리 등 다채로운 기생 수업을 받으며 예술적 역량을 키웠습니다.

1919

[권번에서 실력 연마]

달성권번에서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 등에게 '육자배기'와 '화초사거리'를 배우며 더욱 깊이 있는 소리의 세계를 경험하고 실력을 다져나갔습니다.

1921

[원산에서의 삶]

함남 원산부에서 남백우(南百祐)를 만나 살림을 차렸습니다.

이후 친정 가족들까지 원산으로 이주하는 등 삶의 큰 변화를 겪었지만, 그녀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1923

[서울 상경, 판소리 거장 사사]

남백우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명창 송만갑, 정정렬, 김정문, 유성준, 김창환 등에게 '춘향가', '적벽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제비노정기' 등 주요 판소리를 전수받으며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한남권번에 기적을 두고 명창대회 등에 참가하며 경성부(서울)에서 명창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26

[명창의 목소리, 음반에 담기다]

퇴기 선언 직후 송만갑 등과 함께 음반을 취입하며 대중에게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후 콜롬비아, 빅터 등 수많은 음반사를 통해 판소리 음반을 발매하며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경성방송국 출연]

경성방송국 시험방송에 출연하며 방송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대중과의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1945년 해방 직전까지 100여 차례 국악 방송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8

[소설가 김유정과의 인연]

당대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을 만나 특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김유정은 그녀에게 깊이 매료되어 자신의 소설 <두꺼비>와 <생의 반려>에 그녀와 유사한 존재를 그려냈다고 전해집니다.

1930

[조선음률협회 참여]

조선음률협회에 참여하며 국악계의 중요한 단체 활동에 동참하여 판소리의 발전과 보존을 위한 노력을 함께했습니다.

1931

[흥보가 22일 만에 완창]

김정문에게 '흥보가' 한바탕을 단 22일 만에 모두 배우는 놀라운 학습 능력과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출처: 뿌리깊은 나무 1976년 6월호)

[삶의 고비]

첫 병고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며 삶의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시련을 극복하고 그녀는 더욱 강인한 예술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934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참여하여 '춘향전', '흥보전', '심청전' 등 다수의 창극에 출연하며 판소리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녀의 활발한 활동은 창극 부흥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편시춘', '옹고집전', '어촌야화', '장화홍련전' 등 다양한 창극에 출연했습니다.

1937

[아버지 박재보 사망]

아버지 박재보(朴在普, 개명 전 박중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인적인 슬픔 속에서도 그녀는 예술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1948

[여성 국악인의 힘, 동호회 결성]

당시 창극 단체의 여성 차별에 맞서 30여 명의 여성 국악인을 규합하여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는 여성 국악인의 권익 향상과 연대 활동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1950

[한국 전쟁, 월북 강요 위기]

한국 전쟁 발발 후 정남희 등으로부터 월북을 강요받는 등 전쟁의 비극 속에서 생명의 위협과 사상적 갈등이라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1951

[전선에서 국악 공연]

명창 30여 명과 함께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1952년 초까지 군부대를 돌며 '열녀화'(烈女化)를 공연했습니다.

그녀의 소리는 전장의 군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52

[실명, 그리고 새로운 시작]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는 큰 고난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경북 대구에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며 국악 활동을 꿋꿋이 이어갔습니다.

이는 그녀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960

[건강 위기 속 후학 양성]

급성 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했으나 다행히 회복했습니다.

퇴원 후에는 후배 명창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기 시작하며 후학 양성에 본격적으로 매진했습니다.

1962

[학교에서 국악 전승]

국악예술학교(현재의 전통예술고등학교)에 출강을 시작하며 제도권 교육을 통해 판소리 전승에 기여했습니다.

그녀의 가르침은 많은 국악 인재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4

[판소리 대명창, 문화재가 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예술성과 판소리 보존에 대한 공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공로상 수상]

국악 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보부장관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968

[문화재공로상 수상]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 문화재공로상을 수상하며 또다시 국악계에 대한 그녀의 공헌을 인정받았습니다.

명창으로서의 위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1969

[명창의 마지막 무대]

명동 국립극장에서 은퇴 공연을 가지고 공식적인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이후 대구, 대전, 부산에서도 은퇴 공연을 이어가며 명창의 아름다운 예술 세계를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1971

[판소리 보존의 선구자]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판소리의 체계적인 보존과 전승에 앞장섰습니다.

이는 한국 판소리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73

[흥보가 문화재 지정]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재지정되어 '춘향가'에 이어 '흥보가'까지, 그녀의 뛰어난 예술성을 다시 한번 국가로부터 공인받았습니다.

1978

[명창의 마지막 소리]

제자발표회와 함께 마지막 공연을 가지며 공식적으로 은퇴했습니다.

이는 평생을 바친 예술혼을 갈무리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자, 후대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1979

[영원한 명창, 박록주 타계]

향년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한국 판소리 역사에 동편제의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큰 족적을 남긴 영원한 대명창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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