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

극작가, 희극배우,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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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1: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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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
극작가, 희극배우,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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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희극배우이자 극작가 연출가. 본명은 장바티스트 포클랭. 유랑극단 시절을 거쳐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 배우로 활약했다. <타르튀프> <수전노> <상상병 환자> 등 사회 풍자적인 걸작들을 다수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 문예 교육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프랑스어는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세계적이다. 무대 위에서 생을 마감한 전설적인 연극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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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

[몰리에르의 탄생과 세례]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 몰리에르, 본명 장바티스트 포클랭이 파리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생퇴스타슈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그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파스칼 등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1631

[아버지의 관직 매입 및 모친상]

몰리에르의 아버지 장 포클랭이 '왕가 보통 인테리어 업자'라는 관직을 사들였다.

같은 해 몰리에르의 어머니 마리 크레세가 사망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이듬해 재혼했다.

1636

[계모의 사망]

몰리에르의 계모 카트린 플뢰레트가 세 자녀를 낳은 후 사망했다.

1643

[일뤼스트르 테아트르 창단]

21세의 몰리에르(당시 장바티스트 포클랭)는 아버지의 가업을 포기하고, 마들렌 베자르를 비롯한 아홉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뤼스트르 테아트르'라는 이름의 배우 극단을 창단했다.

이는 파리의 세 번째 영구 극단이 되었다.

1644

[예명 '몰리에르' 사용 시작]

장바티스트 포클랭이 배우 활동을 위해 '몰리에르'라는 예명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이름은 평생 그의 상징이 되었다.

1645

[채무 수감 및 파리 이탈]

몰리에르는 극단 운영 중 발생한 부채 문제로 샤틀레에 수감되었으나, 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는 파리를 떠나 13년간 유랑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1653

[콩티 공의 후원 시작]

유랑극단 시절, 몰리에르와 뒤프렌 극단은 프롱드의 난 주요 지도자였던 콩티 공의 초대를 받아 그의 성에서 공연했다.

이 만남은 콩티 공과 몰리에르의 긴밀한 지적 관계의 시작이 되었으며, 그의 후원 아래 극단은 안정적인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

1655

[첫 문학 희극 상연]

몰리에르는 유랑극단 활동 중, 그의 최초 문학적 희극인 <경솔한 자>를 상연하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656

[<사랑의 유한> 발표]

몰리에르는 <경솔한 자>에 이어 <사랑의 유한>을 발표하며 작가 겸 극단장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 시기 그는 루앙을 방문해 코르네유와 교분을 맺기도 했다.

1658

[필리프 도를레앙 후원]

몰리에르와 그의 극단은 루이 14세의 동생인 필리프 도를레앙('무슈')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이는 파리 궁정 진출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루이 14세 앞 첫 공연]

몰리에르 극단은 루브르에서 루이 14세와 마자랭 추기경 등 주요 인물들 앞에서 코르네유의 비극과 몰리에르의 익살극 <사랑에 빠진 박사>를 성공적으로 공연하며, 파리 궁정에서의 인정을 받았다.

[프티부르봉 극장 개관]

몰리에르의 '무슈 극단'은 프티부르봉 극장에서 이탈리아 극단과 교대로 공연을 시작했다.

《덤벙쟁이》와 《사랑의 원한》 등 신작들이 호평받으며 몰리에르의 연기는 절정에 달했다.

1659

[극단장 직위 승계]

뒤프렌의 은퇴로 몰리에르는 극단 전반의 운영을 맡게 되었으며, 조들레, 레피, 뒤 크루아시, 라 그랑주 등 새로운 배우들이 합류하여 극단의 역량을 강화했다.

[첫 희극 '재녀들' 상연]

몰리에르는 풍자 희극 《잘난 체하는 아가씨들》을 상연해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은 모방작이 쏟아질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몰리에르는 이 작품을 출간하며 최초로 작가 지위에 올랐다.

1660

[국왕 시종직 계승]

남동생의 사망으로 몰리에르는 아버지의 가업인 인테리어 업자와 함께 '국왕 침실 시종'이라는 직위를 계승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하며 1년 중 3개월간 왕을 보필했다.

[루이 14세의 희극 관람]

프랑스 인판테 마리테레즈 도트리슈와의 결혼식 후 돌아온 루이 14세가 몰리에르의 성공작 《잘난 체하는 아가씨들》을 직접 관람했다.

이는 몰리에르에 대한 국왕의 관심과 신뢰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스가나렐> 대성공]

몰리에르의 희극 《스가나렐 또는 상상 속에서 오쟁이진 남자》가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되었고, 해적판이 급히 출간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는 몰리에르 사망 시까지 극단에서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이 되었다.

[팔레루아얄 극장 이전]

루브르 궁전 확장으로 프티부르봉 극장이 철거되면서, 몰리에르 극단은 팔레루아얄 극장으로 이전하여 이탈리아 극단과 함께 극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곳은 이후 몰리에르 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1661

[팔레루아얄 극장 정착]

몰리에르의 극단은 파리의 팔레루아얄 극장에 정착하여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이곳에서 그는 궁정 사교계와 부르고뉴 극단 등 기존 세력과 대립하며 자신만의 연극 영역을 구축했다.

1662

[<아내들의 학교> 논쟁]

희극 <아내들의 학교>를 상연하여 당시 도덕과 교육의 위선을 풍자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격렬한 논쟁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몰리에르는 이에 <아내학교 비판> 등으로 반론하며 예술적 신념을 피력했다.

1664

[<타르튀프> 상연 금지]

가짜 신앙인의 위선을 폭로하는 희극 <타르튀프>를 썼으나, 교회와 독실한 신자들의 강력한 반감으로 인해 상연 금지를 당했다.

이 작품은 여러 차례 개정 후에야 1669년에 비로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665

[국왕의 극단 칭호 및 <돈 주앙>]

몰리에르의 극단이 '국왕의 극단'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궁정의 공식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같은 해 <동 쥐앙>을 발표했으나, 이 작품은 무신론적 요소로 인해 또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폐결핵 발병]

과도한 연극 활동으로 인해 1665년경부터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667년부터 오토유에서 요양하면서도 창작 및 연극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666

[<인간혐오자> 발표]

몰리에르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희극 <인간혐오자>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고결하지만 교만한 인물 알세스트를 중심으로 한 성격 대립을 통해 당시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묘사했다.

1668

[<앙피트리옹>, <수전노> 발표]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앙피트리옹>과 고전적인 구두쇠 캐릭터를 탁월하게 묘사한 <수전노>를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몰리에르가 성격 묘사를 통해 풍속 희극을 심리적으로 심화시킨 걸작들로 평가된다.

1669

[<타르튀프> 상연 해제]

1664년 교회 반감으로 상연이 금지되었던 <타르튀프>가 여러 차례 개정 끝에 마침내 상연 금지령이 해제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1670

[<서민 귀족> 발표]

무용극과 오페라의 인기에 발맞춰 음악가 륄리와 협력하여 무용 희극 <서민 귀족>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무용과 음악이 결합된 형태의 대표작이 되었다.

1671

[<스카팽의 간계> 상연]

몰리에르는 기지와 속임수로 가득 찬 코믹한 플롯이 돋보이는 희극 <스카팽의 간계>를 상연했다.

1672

[개인적 비극과 <여학자들>]

1672년은 몰리에르에게 불운의 해였다.

오랜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마들렌 베자르가 사망하고, 둘째 아들까지 요절했으며, 루이 14세의 총애마저 음악가 륄리에게 빼앗겼다.

같은 해 희극 <유식한 여자들>을 상연했다.

1673

[무대 위 마지막 공연과 죽음]

몰리에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희극 <상상병 환자>를 공연하던 중 무대 위에서 쓰러져 각혈했다.

공연 후 몇 시간 뒤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배우라는 이유로 성직자들의 방문을 거부당해 조병성사 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옷이 초록색이어서 배우들에게 초록색이 불운의 상징이 되었다는 미신을 낳기도 했다.

1680

[코메디 프랑세즈 창설]

몰리에르 사망 후 그의 극단은 다른 극단과 합병하여 국왕의 명령으로 '코메디 프랑세즈'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국립극장은 '몰리에르의 집'으로 불리며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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