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왕조, 국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0:17
• 1368년 농민 출신 주원장이 건국한 한족 최후의 통일 왕조입니다. • 홍무제와 영락제 시기 강력한 황권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 정화의 원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함대를 자랑하며 해상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 이후 암군 환관 세력의 전횡 외침 농민 반란으로 점차 쇠퇴했습니다. • 세계 최대 해전 최대 선박 등 기록적인 업적을 남긴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청나라에 의해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1351
[홍건적의 난 발발]
14세기, 한족 차별과 경제 실정으로 혼란에 빠진 원나라에서 백련교가 주도하는 홍건적의 난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이후 명나라 건국의 발판이 됩니다.
원나라 말기, 한족에 대한 혹독한 차별과 막대한 인플레이션, 황허 범람으로 인한 농지 감소가 겹쳐 사회 혼란이 극심해졌습니다. 이에 1351년 백련교가 주도하는 홍건적의 난이 터져 한족들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1352
[주원장, 홍건적에 합류]
원나라 시절 농민으로 격하되었던 한족 주원장이 홍건적 군대에 합류하며 반란군의 딸과 결혼,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합류는 훗날 명나라 건국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원나라 시절 몽골군의 소작농으로 격하되었던 한족 주원장은 1352년 홍건적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반란군 지도자의 딸과 결혼하며 빠르게 명성을 쌓아나갔고, 이후 한족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356
1356년, 주원장이 이끄는 반군은 난징을 성공적으로 점령했습니다. 이 도시는 후에 명나라의 수도가 되어 그의 세력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363
[파양호 대전 승리]
주원장이 그의 라이벌 진우량을 꺾은 파양호 대전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으로 기록됩니다.
20만 명의 주원장 군대가 65만 명의 진우량 군세를 격파하며, 주원장은 한족 반란군의 압도적인 지도자로 등극했습니다.
1363년, 주원장은 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진우량을 상대로 파양호 대전을 치렀습니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으로, 주원장이 이끄는 20만 명의 군대가 진우량의 6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격파하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반군 세력이 되었으며, 명나라 건국의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364
[대명률 편찬 시작]
홍무제는 유교에 기반한 새로운 법전 '대명률'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1397년에 완성되어 명나라 통치의 기본 틀을 제공하게 됩니다.
홍무제는 즉위 후 국가 기반시설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며, 그 일환으로 1364년부터 유교에 기반한 새로운 법전인 '대명률'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전은 653년에 만들어진 당나라 법전을 참고하여 편찬되었으며, 1397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367
[홍건적 지도자 제거]
홍건적 지도자들이 주원장이 주최한 연회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며, 주원장의 새 왕조 건국에 반대할 세력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그의 황제 등극을 위한 마지막 장벽이 제거된 사건입니다.
1367년, 주원장은 홍건적의 주요 지도자들을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원장은 중국 내에서 자신의 왕조 건국에 반대할 어떤 유력한 경쟁 세력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명나라를 건국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사건입니다.
1368
[명나라 건국]
주원장은 원나라의 수도 대도(베이징)에 군사를 보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도를 '베이핑'으로 개명한 뒤 명나라를 건국, '홍무'를 연호로 삼아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이로써 한족 최후의 통일 황조가 시작되었습니다.
1368년, 세력을 다잡은 주원장은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 베이징)에 군사를 보내 이미 쇠락해가던 원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수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주원장은 대도의 원나라 궁전을 불태운 후, 새 왕조인 명나라의 건국을 선포하고 '홍무'를 자신의 연호로 삼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이로써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속한 중국의 마지막 한족 황조가 시작되었습니다.
1380
[호유용 숙청, 재상제 폐지]
홍무제는 명나라 건국 공신이자 재상이었던 호유용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처형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폐지하며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두어 황권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이로써 재상 제도가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1380년, 홍무제는 명나라 건국의 공신이자 당시 재상이었던 호유용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처형했습니다. 이후 그는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대폭 축소 및 폐지하였고, 6부의 직속 상관을 황제로 지정하여 모든 권한을 황제의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역사상 오랫동안 존재했던 재상 제도가 폐지되었고, 황제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382
[금의위 창설]
홍무제는 공신과 대신들에 대한 의심을 키워가며, 신하들을 감시하고 숙청하기 위한 비밀경찰 조직인 금의위(錦衣衛)를 창설했습니다.
이로 인해 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홍무제는 황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공신들과 대신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1382년, 그는 신하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의심스러운 자는 누구든지 숙청하기 위해 비밀경찰 조직인 금의위(錦衣衛)를 창설했습니다. 이 조직은 황제의 친위군 중 하나로, 전문적으로 조옥(詔獄, 칙명에 의한 죄수 심문)을 주관했으며, 이로 인해 대략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공포정치가 이어졌습니다.
1397
[대명률 완성]
1364년부터 편찬되던 명나라의 유교 기반 법전 '대명률'이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명나라 통치의 제도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1397년, 홍무제가 1364년부터 편찬을 지시했던 유교 기반 법전 '대명률'이 완성되었습니다. 당나라 법전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이 법전은 명나라의 사회 질서와 통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398
[홍무제 사망, 건문제 즉위]
명나라의 기틀을 다진 홍무제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황태손 건문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강력한 번왕인 주체(영락제)와의 갈등을 예고했습니다.
1398년, 명나라를 건국하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했던 홍무제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의문태자 주표의 아들인 황태손 건문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지만, 이는 홍무제의 가장 강력한 아들이었던 연왕 주체(朱棣)와의 불화를 일으켜 결국 정난의 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401
[조선국왕 책봉]
조선 태종 1년,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를 사대하며 정통성을 인정받은 중요한 외교적 사건입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에 대한 사대 정책을 표방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했고, 1401년(태종 1)에 이르러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했음을 보여줍니다.
1402
[영락제, 황위 찬탈]
연왕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건문제를 죽인 후 스스로 황위에 올라 영락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홍무제의 장자 계승 원칙이 무너진 사건이자, 명나라 '두 번째 건국'이라 불리는 영락제 시대의 시작입니다.
1398년 건문제 즉위 후, 홍무제의 아들 연왕 주체(朱棣)와의 불화가 깊어졌습니다. 결국 주체는 1402년 '정난의 변'을 일으켜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건문제와 그의 가족, 신하들을 모두 죽여버린 뒤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가 바로 명나라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입니다. 이는 홍무제의 장자 계승 원칙이 무너진 상징적인 사건이며, 영락제는 매우 유능한 황제로 평가받으며 '두 번째 건국'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습니다.
1403
[베이징 천도 시작]
영락제는 즉위 직후 자신의 힘이 강했던 베이징으로 수도 천도를 시작했습니다.
1407년부터 1420년까지 수백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자금성을 포함한 새로운 수도가 건설되었습니다.
영락제는 1403년에 수도를 난징에서 자신의 기반이 강했던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수도 건설은 1407년부터 1420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수백만 명의 일꾼이 동원되어 베이징 내성과 자금성이 건설되는 대규모 토목 사업이었습니다. 이 천도로 베이징은 명나라의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405
[정화의 원정 시작]
영락제는 환관 정화에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배들로 구성된 해상 함대를 맡겨 해외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정화의 원정'은 총 7차례에 걸쳐 인도양, 아라비아, 동아프리카까지 이르며 명나라의 권위를 전 세계에 과시한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해상 원정이었습니다.
1405년부터 영락제는 그가 총애하던 환관 정화에게 거대한 해상 함대를 맡겨 해외 원정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를 '정화의 원정'이라고 합니다. 이 원정은 규모와 동원된 선박 수 면에서 이전의 어떤 해상 활동도 초월했습니다. 난징 조선소는 1403년부터 1419년까지 2천 척에 달하는 배들을 건조했으며, 이 중 일부는 길이가 112m에서 134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배였습니다. 정화는 총 7번의 원정을 통해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오며 명나라의 권위를 해외에 과시하는 위업을 남겼습니다.
1406
[베트남 명나라 편입]
영락제의 군사 원정으로 베트남이 명나라의 통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이 식민 통치는 1427년 레 러이가 레 왕조를 세우며 끝날 때까지 지속됩니다.
영락제는 몽골, 베트남 등지에 군사 원정을 수없이 실시하여 명나라의 국경을 크게 넓혔습니다. 1406년에 시작된 베트남에 대한 식민 통치는 한시적이나마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했으며, 이는 1427년 베트남의 국민 영웅 레 러이가 게릴라 전투를 통해 명나라를 쫓아내고 레 왕조를 세우며 끝나게 됩니다.
1420
[동창 설치]
영락제는 정탐과 체포를 관장하는 특무기구인 동창(東廠)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금의위와 더불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영락 18년(1420년),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신하들을 감시하기 위해 정탐과 체포를 관장하는 특무기구인 동창(東廠)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환관들이 통제하는 기구로, 금의위와 함께 명나라 정치의 공포스러운 면모를 대표했습니다.
1427
[베트남 레 왕조 독립]
베트남의 국민 영웅 레 러이가 게릴라 전투를 통해 명나라를 쫓아내고 레 왕조를 세우며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는 명나라의 해외 통치 확대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406년부터 명나라의 통치하에 있던 베트남은 1427년, 국민 영웅 레 러이가 이끄는 게릴라 전투를 통해 명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로써 레 왕조가 세워지며 베트남은 다시 자국의 주권을 회복했습니다.
1449
[토목의 변 발생]
정통제가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가, 에센 오이라트 군대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대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를 '토목의 변'이라 하며, 명나라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1449년 9월 8일, 몽골 고원의 오이라트족이 명나라를 침공하자, 정통제(영종)는 측근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에센 오이라트 군대에 대패하고, 황제가 산채로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토목의 변'이라 하며, 이 소식에 수도의 섭정 주기옥이 새로운 황제 경태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1457
[정통제 황위 복귀]
포로에서 돌아와 가택 연금되었던 정통제가 '탈문의 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몰아내고 다시 황위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그는 연호를 '천순'으로 바꾸며 천순제로 불리게 됩니다.
1449년 토목의 변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정통제는 수도에서 선황이라는 허울좋은 칭호로 가택 연금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1457년 경태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다시 황위를 되찾았습니다.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도 하며, 이때부터 정통제는 새로운 연호 '천순'을 사용하며 '천순제'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461
[조흠의 변 발생]
1461년 8월 7일, 장군 조흠이 숙청을 염려하여 천순제를 상대로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결했습니다.
이는 황제 주변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461년 8월 7일, 장군 조흠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황제의 숙청 작업에 말려들 것을 염려하여 미리 천순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조흠 장군의 군대는 황성의 서쪽과 동쪽 문에 불을 지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비가 내리며 불이 꺼지고 수도 외곽에서 황제의 친위군이 몰려오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조흠은 자결했습니다.
1550
[몽골, 베이징 포위]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이 베이징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만리장성 너머로 쫓겨났던 몽골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명나라 방어력 약화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6세기 중기부터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명나라 북부 국경을 빈번하게 침입했습니다. 1550년에는 베이징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영락제 이후 암군들의 등장은 명나라의 군사력을 약화시켰고, 만리장성은 더 이상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몽골과 왜구의 침입을 '북로남왜'라고 불렀습니다.
1553
[베이징 외성 증축]
베이징 남쪽에 외성이 추가적으로 건설되어 성내 넓이가 거의 2배 넘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끊임없는 외침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습니다.
영락제 때 건설된 베이징 내성 외에, 1553년에는 베이징 남쪽에 외성이 추가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베이징 성내의 넓이는 거의 2배 이상 확장되었으며, 이는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력 증강의 일환이었습니다.
1567
[해금령 완화]
약 200년간 지속되던 명나라의 쇄국정책(해금령)이 복건 순무 도택민의 건의로 마침내 완화되었습니다.
복건 장주 월항 한 곳만을 교역항으로 개방하며 해외 무역에 제한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융경 원년(1567년)까지 거의 200년간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했습니다. 이 해에 복건 순무 도택민이 해금령 완화를 청했고, 명 조정은 '배를 유인하는'(船引) 제도의 실시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복건 장주 월항 한 곳만을 교역항으로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데 그쳤습니다.
1582
[마테오 리치 방문]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를 방문하여 서양 과학과 문물을 전했습니다.
서광계 같은 학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동서양 문화 교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582년,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 천문학, 지리학 등 다양한 지식을 중국에 소개했으며, 서광계와 같은 명나라 학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동서양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592
[임진왜란 지원, 재정난]
명나라는 조선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에 대규모 지원군을 파견하여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이로 인해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명나라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명나라는 1592년 조선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에 막대한 지원군을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비록 조선을 돕고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의 무능과 정치 방치와 겹쳐 명나라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만력삼대정' 중 하나입니다.
1620
[만력제 사망, 혼란 가중]
역사상 최악의 혼군으로 평가받는 만력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한 달 만에 사망하고 천계제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명나라는 암군과 환관의 전횡으로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듭니다.
1620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국정을 방치하며 '암군'으로 평가받던 만력제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자인 주상락이 광종 태창제로 등극했으나 불과 1개월 만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희종 천계제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명나라는 유능한 황제의 부재와 함께 환관들의 권력 전횡이 심화되며 쇠퇴가 가속화되었습니다.
1624
[환관 위충현 전횡]
천계제 시기 총애받는 환관 위충현이 동림당을 견제하며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천구백세'로 칭하며 권력을 남용했고, 대대적인 숙청과 부정부패로 명나라 행정 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천계제 즉위 초기에는 유교 학자 출신 동림당 인사가 등용되었으나, 당쟁이 격렬해지자 천계제는 정사에 뜻을 잃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총애받는 환관 위충현이 영향력을 확대하여 1624년 엄당(閹黨)을 중심으로 내각을 차지하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위충현은 동림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전국 서원을 철폐하며 수많은 인사를 투옥했습니다. 그는 황제의 무덤 지을 돈을 빼돌려 자신의 사원을 짓는 등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자신을 '구천구백세'로 칭하며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휘둘러 정부의 행정 기능을 약화시켰습니다.
1627
[숭정제 즉위, 위충현 제거]
천계제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주유검이 마지막 황제 숭정제로 즉위했습니다.
숭정제는 곧바로 환관 위충현 세력을 제거하고 폐단 혁파를 시도했으나, 뿌리 깊은 당쟁과 내부 문제로 개혁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1627년, 천계제가 중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동생 주유검이 뒤를 이어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로 즉위했습니다. 숭정제는 즉위 직후 위충현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 내외의 폐단을 혁파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질적인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그의 의도된 개혁은 명나라의 심각한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1629
[홍타이지 침공, 명장 처형]
만주족 지도자 홍타이지가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북경까지 침공했습니다.
이에 숭정제는 방어 실패 책임을 물어 마지막 명장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며, 명나라의 남은 군사력마저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1629년,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의 지도자 홍타이지가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명나라의 수도 북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숭정제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명나라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명장인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는 오판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결국 명나라의 얼마 남지 않은 군사력마저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홍타이지는 6차례에 걸쳐 장성을 돌파하며 직예와 산동 지역을 유린했습니다.
1637
[영국-중국 첫 접촉]
1637년 6월 27일, 영국의 윌리엄 커틴이 보낸 존 원델 대령이 이끄는 4척의 배가 마카오에 당도하여 영국과 중국 간의 무역 관계 개설을 시도했습니다.
포르투갈 당국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이는 양국 간 최초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평가됩니다.
1637년 6월 27일, 영국의 거상 윌리엄 커틴이 보낸 존 원델 대령이 이끄는 4척의 중무장한 배들이 마카오에 당도하여 영국과 중국 간의 무역 관계 개설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 당국에 의해 거절당했으며, 이는 영국과 중국 간의 최초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기록됩니다.
1640
[청나라, 명 주력군 격파]
청나라가 금주 등 주요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홍승주 등 명나라 주요 장수들이 포로로 잡히면서 명나라의 전선은 산해관으로 후퇴, 사실상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북지역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던 1640년, 청나라가 금주(錦州) 등 주요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의 주요 장수인 홍승주(洪承疇) 등이 포로로 잡혔고, 명나라의 방어선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하며 수도 베이징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때 산해관을 지키던 장수가 바로 오삼계였습니다.
1644
[이자성의 난, 명 멸망]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 중 이자성이 서안을 점령하고 순 왕조를 세운 뒤 북경으로 진격했습니다.
결국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며 명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명나라 후기에는 전염병,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와 함께 사회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농민 출신 이자성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여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한 뒤 북경으로 진격했습니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며 명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고야 말았습니다.
1662
[남명 정권 멸망]
명나라 멸망 후 남쪽으로 후퇴했던 황족과 신하들이 세운 남명(南明) 정권이 고질적인 내분과 무능함 속에 결국 청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1644년 명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남은 신하)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명 정권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고질적인 내분과 무능함으로 인해 결국 1662년 경 청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