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미술품, 회화, 초상화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2- 23:31:23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붓 끝에서 탄생한 한 여성의 초상화는 500년의 세월을 거치며 단순한 그림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보물에서 혁명을 거쳐 만인의 예술품이 되었고, 세기의 도난 사건을 통해 전 지구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전쟁의 포화를 피하고 테러의 위협을 견뎌내며, 그 신비로운 미소는 시대의 욕망과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이제 <모나리자>는 예술사를 넘어 인류의 문화사 그 자체가 되었으며, 그 가치는 캔버스가 아닌, 이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상징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1452
[레오나르도 다빈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공증인 아버지 피에로와 농민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의 사생아였습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새벽 3시경,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부가 공증인이었기에 중요한 일을 기록하는 습관 덕분에 이처럼 정확한 출생 시간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피에로는 법률가 집안 출신의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농가의 딸이었기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사생아라는 신분은 레오나르도가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법률가, 의사 등 당시 주류 직업을 갖는 것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 대신 자연과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탐구하는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기존의 학문적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해부학, 광학, 지질학 등 다방면에 걸쳐 독창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훗날 <모나리자>에 구현된 인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연의 오묘한 표현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된, 관습을 넘어선 그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03
[모나리자 제작 착수]
피렌체의 부유한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자신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했습니다.
당시 24세였던 리사 부인은 둘째 아들을 출산한 직후였으며, 이것이 초상화 제작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의뢰를 수락하고, 르네상스 초상화의 역사를 바꿀 혁신적인 작품의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를 위해 주문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조콘도의 부인'이라는 뜻의 <라 조콘다(La Gioconda)>로 불립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다른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초상화 의뢰를 수락했는데, 모델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예술적 자유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법들을 집약시켰습니다. 인물을 정면이나 측면이 아닌 4분의 3 각도로 배치하고, 관람자와 시선을 맞추게 하여 심리적 교감을 유도했습니다. 또한, 인물의 배경을 더 낮게 배치하는 피라미드 구도를 통해 안정감과 장엄함을 부여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핵심은 레오나르도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과학과 예술의 총체적 결합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스푸마토(Sfumato) 기법: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명확하게 그리는 대신, 색채를 미묘하게 번지게 하여 경계를 흐리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입가와 눈가에 신비로운 표정을 만들어냈으며, 대기와 빛에 대한 그의 광학 연구가 회화에 적용된 결과입니다.
해부학적 지식: 수많은 인체 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은 미소 짓는 순간의 미세한 근육 변화까지 포착하여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 배경의 기암괴석과 굽이치는 강물은 그의 지질학적 관찰이 반영된 것으로, 인물의 의상과 머리카락의 곡선과 조응하며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결이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정수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이처럼 <모나리자>는 한 개인의 초상화를 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거장의 예술 철학과 과학적 탐구가 집대성된 불멸의 걸작으로 탄생했습니다.
1516
[프랑스로의 이주와 <모나리자>의 동행]
레오나르도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신진 예술가들의 명성에 가려 입지가 좁아지자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앙부아즈로 이주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모나리자>를 포함한 주요 작품들을 직접 가지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이 여정은 <모나리자>가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6세기 초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교황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노장이었던 레오나르도는 설 자리를 잃어가던 중,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매료된 젊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게 됩니다. 왕은 그에게 '왕의 수석 화가, 건축가, 기술자'라는 칭호와 함께 안정적인 연금, 그리고 거처로 클로 뤼세 성을 제공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피렌체에서 밀라노, 로마를 거쳐 프랑스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오릅니다. 이때 그는 <세례자 요한>,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그리고 <모나리자>를 가지고 갔습니다. 의뢰인인 조콘도 가문에게 작품을 인도하지 않고 10년 넘게 직접 소장하며 계속해서 붓질을 더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 그림을 단순한 주문 제작품이 아닌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는 궁극의 매체로 여겼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518
[프랑스 왕실 컬렉션 편입]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부터 <모나리자>를 구매하여 프랑스 왕실 소장품 목록에 공식적으로 포함시켰습니다.
이 거래를 통해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으로 프랑스의 국유 재산이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제기될 소유권 논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로부터 그림을 직접 구매했는지, 혹은 선물로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518년경, 작품이 왕실 컬렉션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이 합법적인 소유권 이전은 <모나리자>의 운명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습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중요한 오해를 바로잡는 핵심 근거가 됩니다. 첫째, 훗날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이 제기한 '나폴레옹 약탈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나리자>는 전쟁 약탈품이 아니라, 작가와 후원자 사이의 정당한 거래를 통해 프랑스로 귀속되었습니다. 둘째, 이로 인해 이탈리아 정부나 시민 단체의 반환 요구는 법적 정당성을 갖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518년의 소유권 이전은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역사적, 법적 토대를 마련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1519
[퐁텐블로 성에 보관되다]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자신의 주 거처이자 르네상스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퐁텐블로 성에 보관했습니다.
이 시기 그림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왕의 개인적인 감상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들 앙리 2세는 이 그림을 자신의 욕실에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모나리자>를 비롯한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퐁텐블로 성에 소장하여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했습니다. 당시 예술 작품은 공공재가 아닌 군주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는 사유재산이자 장식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앙리 2세가 그림을 욕실에 걸었다는 일화는 이러한 시대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나리자>는 약 1세기 이상 퐁텐블로 성에 머물며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만이 접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보물로 존재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 앙부아즈 근처 클로 뤼세 성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의 죽음으로 <모나리자>는 완전히 프랑스 왕실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오른손 마비로 인해 그림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죽기 직전까지 과학 연구와 스케치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수아 1세의 극진한 총애 속에서 임종을 맞았으며, 그의 시신은 앙부아즈 성의 생 플로랑탱 교회에 안장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죽음 이후, <모나리자>는 한 예술가의 손을 떠나 프랑스 왕가의 보물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1690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전]
'태양왕'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정치, 문화 중심지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기면서 왕실의 주요 예술품 컬렉션도 함께 이전했습니다.
이때 <모나리자>도 퐁텐블로를 떠나 베르사유 궁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권위를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을 유럽 최고의 예술품으로 채우고자 했습니다. <모나리자>는 왕실 컬렉션의 일부로서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을 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작품은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왕의 절대 권력 아래 궁전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1797
[루브르 박물관 영구 전시 시작]
프랑스 혁명은 예술품의 소유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혁명 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에 있던 왕실 컬렉션을 모두 국유화하여 루브르 궁전을 대중을 위한 박물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이때 <모나리자>도 루브르로 옮겨져, 왕의 소유물에서 모든 국민이 감상할 수 있는 공공재로 거듭났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의 것'은 '인민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따라 1793년 루브르 박물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고, 1797년부터 <모나리자>는 이곳에서 영구적으로 전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수 세기 동안 궁전에 갇혀 있던 <모나리자>는 비로소 대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그림은 수많은 걸작 중 하나로 여겨졌을 뿐, 오늘날과 같은 독보적인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1801
[나폴레옹 침실에 걸리다]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모나리자>의 매력에 빠져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약 4년 동안 튈르리 궁전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고 감상했습니다.
이 일화는 당대 최고 권력자가 인정한 <모나리자>의 예술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나폴레옹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루브르에 있던 <모나리자>를 자신의 개인 공간인 튈르리 궁전 침실로 옮겨와 약 4년간 소장했습니다. 황제가 된 후인 1804년, 그는 그림을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와 예술적 위상이 이미 19세기 초부터 최고 권력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1911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박물관에서 유리 설치 작업을 하던 이탈리아 출신 노동자 빈첸초 페루자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국보가 프랑스에 부당하게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애국심으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범인 빈첸초 페루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내부 구조와 보안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범행 전날 밤, 박물관 내의 작은 옷장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 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 그림을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그는 그림을 보호틀에서 분리한 뒤 자신의 작업복 외투 아래 숨겨 유유히 박물관을 빠져나왔습니다.
그의 범행 동기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의 예술품을 약탈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위대한 유산인 <모나리자>를 조국으로 되찾아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도난 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며 <모나리자>를 순식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습니다.
1913
[2년 만의 극적인 회수]
페루자는 2년 넘게 그림을 파리의 자신의 아파트에 숨겨오다 결국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골동품상에게 팔려다 덜미를 잡혔습니다.
그림은 무사히 회수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순회 전시된 후 1914년 1월 프랑스로 반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를 단순한 명작에서 전설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년 동안 그림을 숨기고 있던 페루자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관장에게 접촉하여 그림을 판매하려 했습니다. 그의 제안을 수상하게 여긴 관장은 경찰에 신고했고, 페루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 도난 사건은 <모나리자>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 대중적 인지도 폭증: 사건 이전까지 미술계 외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나리자>는 , 2년간의 실종 기간 동안 연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이 걸려 있던 텅 빈 벽을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고, 이는 '작품의 부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볼거리가 된 역사적인 현상이었습니다.
2. 강력한 서사 부여: 절도, 미스터리, 애국심, 그리고 극적인 회수라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는 <모나리자>에 '도난당한 보물', '되찾은 국가적 자존심'이라는 강력한 상징적 가치를 덧씌웠습니다.
3. 문화 아이콘으로의 등극: 이 사건을 통해 <모나리자>는 순수 예술의 영역을 넘어 대중문화의 한복판으로 진입했습니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더해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독보적이고 신화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입니다.
1939
[제2차 세계대전 중 피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의 예술품 약탈로부터 <모나리자>를 지키기 위해 비밀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비밀리에 반출되어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의 성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숨겨졌습니다.
이는 <모나리자>가 프랑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대체 불가능한 문화유산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939년 9월, 나치의 침공 위협이 고조되자 루브르 박물관은 가장 중요한 소장품들을 피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모나리자>는 'MNLP No. 0' (루브르 국립 박물관 회화 0번)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상자에 담겨 샹보르 성, 루비니 성, 로크듀 수도원 등 10여 곳이 넘는 장소로 옮겨 다니며 전쟁의 포화를 피했습니다. 이러한 필사적인 보호 노력은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한 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야 할 국가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6월, <모나리자>는 마침내 루브르로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1956
[염산 및 돌 투척 테러]
1956년 한 해 동안 <모나리자>는 두 차례의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반기에는 한 남성이 그림 하단에 염산을 뿌렸고, 12월 30일에는 볼리비아인 우고 운하가 비예가스가 던진 돌에 맞아 일부가 훼손되었습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모나리자>는 영구적으로 보호 유리 뒤에 전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공격은 프랑스 몽토방의 한 박물관에 대여 전시 중일 때 발생했으며, 신원 미상의 남성이 뿌린 염산으로 인해 그림 하단부가 손상되었습니다. 이후 복원 작업을 거쳤지만, 이 사건은 작품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공격은 같은 해 12월 30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났습니다. 볼리비아 출신의 우고 운하가 비예가스(Ugo Ungaza Villegas)가 던진 돌에 그림의 왼쪽 팔꿈치 부분 유약층이 미세하게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연이은 공격은 <모나리자>의 관람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박물관 측은 추가적인 훼손을 막기 위해 작품 전면에 보호 유리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보호 유리는 작품을 물리적으로 지키는 안전장치인 동시에,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영원한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더 이상 작품과 직접적으로 교감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작품의 신비로운 아우라를 더욱 강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이 안전장치는 훗날 작품 훼손의 우려 없이 자신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표출하려는 시위자들에게 <모나리자>를 '안전한 무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1963
[미국 순회 전시]
<모나리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합의 하에, 이 그림은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습니다.
이 순회 전시는 냉전 시대에 예술을 통한 양국 간의 우호를 다지는 중요한 문화 외교 행사였습니다.
1962년 12월 14일부터 1963년 3월 12일까지 진행된 미국 전시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작품의 안전을 위해 최고 수준의 보안 조치를 취했으며, <모나리자>는 '문화 대사'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이 신비로운 미소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섰고, 이는 <모나리자>의 명성을 북미 대륙에 확고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
[도쿄, 모스크바 순회 전시]
<모나리자>의 두 번째 해외 순회 전시가 일본 도쿄와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렸습니다.
이 전시는 동서 양 진영에 걸쳐 <모나리자>의 세계적인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도쿄 전시 중에는 박물관의 장애인 관람 정책에 항의하는 여성이 붉은 페인트를 뿌리는 사건이 있었으나, 보호 유리에 막혀 작품은 무사했습니다.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전시 첫날, 박물관의 장애인 차별적 관람 정책에 항의하던 25세 여성 토모코 요네즈가 붉은색 페인트를 뿌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1956년 사건 이후 설치된 보호 유리 덕분에 작품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표출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였습니다.
2005
[루브르 박물관 전용 전시실 개편]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엄청난 인파를 감당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은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살 데 제타(Salle des États)'를 <모나리자>만을 위한 전용 전시실로 꾸몄습니다.
이는 <모나리자>가 박물관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치입니다.
매년 루브르를 찾는 수백만 명의 관람객 중 상당수가 오직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방문합니다. 이로 인한 극심한 혼잡을 해소하기 위해, 박물관 측은 4년간의 공사 끝에 2005년 4월, 새로운 모나리자 룸을 공개했습니다. 이 공간에서 <모나리자>는 방 중앙에 단독으로 배치되었으며,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온도 및 습도 조절 기능과 무반사 방탄유리가 장착된 특수 보호 케이스 안에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작품의 보존과 관람객의 안전, 그리고 원활한 관람 동선을 모두 고려한 결과였습니다.
2009
[찻잔 투척 사건]
프랑스 시민권을 얻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한 러시아 여성이 <모나리자>를 향해 찻잔(머그컵)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찻잔은 방탄유리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지만, 작품에는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개인적인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세계적인 명작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입니다.
이 여성은 루브르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찻잔을 소지하고 있다가 작품을 향해 던졌습니다. 방탄유리의 견고함 덕분에 작품은 완벽하게 보호되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으며, 정신 감정을 받은 후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의 강화된 보안 시스템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작품이 다양한 이유로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2022
[케이크 투척 사건]
노파로 위장한 한 남성 환경운동가가 휠체어를 타고 <모나리자>에 접근한 뒤, 방탄유리에 케이크를 문지르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그는 "지구를 생각하라"고 외치며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작품 훼손이 아닌, 작품의 상징성을 이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였습니다.
이 남성은 보안 요원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지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예술가들은 지구를 생각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21세기 <모나리자>를 향한 공격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범인의 목적은 작품의 물리적 파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방탄유리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행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는 상징 자본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 세계 미디어에 노출시키려는 계산된 '퍼포먼스'였습니다. <모나리자>가 현대 사회의 첨예한 이슈를 둘러싼 상징적 투쟁의 장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2024
[수프 투척 사건]
프랑스 농업 정책과 식량 안보 문제에 항의하는 두 명의 여성 환경운동가가 <모나리자>의 방탄유리에 수프를 끼얹었습니다.
그들은 "예술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식량에 대한 권리가 더 중요한가?"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가 예술 작품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증폭시키는 강력한 확성기로 이용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식량 반격(Riposte Alimentaire)'이라는 단체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힌 이 시위는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던 농민 시위와 연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작품 훼손이 아니라, <모나리자>라는 세계적인 아이콘을 배경으로 한 충격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하는 것이었습니다.
2022년 케이크 사건과 2024년 수프 사건은 공통적으로 <모나리자>가 현대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의 정점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즉, 수많은 정보와 메시지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가장 확실하게 대중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상징적 대상으로 <모나리자>가 선택된 것입니다. 작품의 예술적 아우라가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 주장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대가 되고 있는 현상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