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작곡가, 피아니스트,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08- 15:59:40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거장입니다. 청각 장애 속에서도 음악의 성인(樂聖)으로 불리며 영웅 운명 합창 등 인류에게 희망을 선사한 걸작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삶과 음악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에게 깊은 영감을 줍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출생
- 첫 공개 연주회 데뷔
- 크리스티안 네페에게 사사
- 음악 잡지 최초 소개
- 첫 출판작 발표
- 가장 역할 수행 시작
- 첫 칸타타 작품 의뢰
- 하이든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 하이든의 제자로 빈 이주 결심
- 음악의 도시 빈으로 이주
- 어머니 사망, 모차르트 조우
- 중부 유럽 순회 연주 대성공
- 청력 상실의 시작
- 청력 악화로 연주 여행 중단
- 걸작 '비창' 소나타 발표
- 교향곡 1번, 부르크 극장 초연
- 줄리에타에게 '월광' 헌정
-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작성
- '영웅적' 양식의 서막
- 교향곡 2번 성공적 초연
- 나폴레옹에 실망, '영웅' 개명
- 걸작 '영웅 교향곡' 출판
- 교향곡 5번, 6번 등 초연
- 괴테 희곡 '에그몬트' 음악 의뢰
- '엘리제를 위하여'의 그녀에게 청혼
- '불멸의 연인'에게 편지 작성
- 테플리츠에서 괴테와 조우
- 웰링턴의 승전 & 교향곡 7번 초연
- 독주자로서 마지막 공개 연주
- 동생 사망, 조카 양육권 분쟁 시작
-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발표
- '하머클라비어' 출판 및 필담장 시작
- '장엄미사', '디아벨리 변주곡' 착수
- 런던 필하모닉, 교향곡 9번 의뢰
- 인류의 환희, 교향곡 9번 초연
- 조카 카를의 자살 시도
- 폐렴과 간경변 증상 악화
- 생의 마지막 말 '희극은 끝났네'
- 음악의 성인, 베토벤 영면
- 2만 명의 추모, 성대한 장례식
1770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출생]
독일 본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기록은 없지만, 1770년 12월 17일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관습상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778
[첫 공개 연주회 데뷔]
아버지 요한의 주선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모차르트처럼 '여섯 살 신동'으로 홍보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선보였다.
1780
[크리스티안 네페에게 사사]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작곡을 가르쳤다.
1782
[보조 오르가니스트 활동 시작]
스승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급으로 봉사했으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1783
[음악 잡지 최초 소개]
Magazin der Musik('음악잡지')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실렸다.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으로 묘사되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능숙하게 연주한다고 언급되었다.
[첫 출판작 발표]
첫 출판작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출판되었다.
1784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
무급 보조 오르가니스트에서 승진하여 궁정 예배당에서 임금을 받는 두 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히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789
[가장 역할 수행 시작]
아버지 요한이 알코올 중독으로 궁정에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을 가족 부양을 위해 베토벤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베토벤은 가르치는 일과 궁정 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며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했다.
1790
[첫 칸타타 작품 의뢰]
본의 문학 협회로부터 요제프 2세의 사망 기념 칸타타(WoO 87)를 의뢰받았다.
이 작품은 당시 연주되지 못했으나, 후에 브람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하이든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런던 여행 중이던 요제프 하이든이 본에 들렀을 때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만남은 베토벤의 음악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791
[첫 발레 음악 작곡 의뢰]
친구이자 후원자인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무대를 위한 첫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받았다.
1792
[하이든의 제자로 빈 이주 결심]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에서 다시 만나, 작곡한 칸타타 악보를 보여주었다.
하이든은 감명을 받고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 빈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된다.
[음악의 도시 빈으로 이주]
선제후의 도움으로 프랑스와의 전쟁 소문 속에서 본을 떠나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향했다.
빈 도착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1794
[빈에 정착하며 후원 확보]
본이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빈으로 귀향할 필요가 없어지자, 빈에 남기로 결정했다.
로브코비츠 공작, 리히노브스키 공작, 슈비텐 남작 등 귀족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빈에 정착했다.
1795
[빈에서의 성공적인 첫 연주회]
빈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으며, 이 공연 직후 첫 작품인 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Op.
1)를 출판하여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796
[중부 유럽 순회 연주 대성공]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리히노브스키 공작과 함께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중부 유럽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큰 환영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한 첼로 소나타로 금화를 선물 받기도 했다.
[빈 귀환 후 다시 순회 연주]
성공적인 중부 유럽 순회 연주를 마치고 빈으로 돌아왔다.
그해 11월에는 프레스부르크와 페슈트로 다시 여행을 떠나 연주 활동을 이어갔다.
1797
[청력 상실의 시작]
이 시기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작곡과 연주를 계속했으나, 점차 악화되는 청력은 그의 삶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1798
[청력 악화로 연주 여행 중단]
프라하 여행 중 청력이 점차 악화되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는 그의 음악 활동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799
[피아노 '결투'에서 승리]
빈의 귀족 살롱에서 거장 요제프 뵐플과의 악명 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하여 승리하며 피아노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걸작 '비창' 소나타 발표]
베토벤의 여덟 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Op.
13)이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에서 이전 작품들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으며 그의 음악적 성숙을 보여주었다.
[브룬스비크 가문 교습, 사랑 시작]
헝가리 귀족 안나 브룬스비크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작은 딸 요제피네와 사랑에 빠졌으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 관계는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1800
[피아노 결투 연승]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를 상대로 피아노 '결투'에서 승리하며 다시 한번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독보적인 기량을 증명했다.
[교향곡 1번, 부르크 극장 초연]
부르크 극장을 빌려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인 《교향곡 1번》을 초연했다.
이 연주회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으며,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는 호평을 받았다.
1801
[발레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초연]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Op.
43》을 완성하고 빈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여러 차례 연주되었으며, 베토벤은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줄리에타에게 '월광' 헌정]
젊은 백작부인 줄리에타 귀차르디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신분 차이로 진전되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피아노 소나타 14번, Op.
27-2》(‘월광 소나타’)를 헌정했다.
1802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작성]
주치의의 권고로 빈 외곽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청각 장애를 받아들이려 했다.
이 기간 동안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 자살 충동과 예술에 대한 의지를 기록했다.
1803
['영웅적' 양식의 서막]
청각 장애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위기를 겪은 후, 대규모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영웅적' 시기를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교향곡 3번 '영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교향곡 2번 성공적 초연]
안 데르 빈 극장에서 자신의 《교향곡 2번》을 초연했다.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도 함께 연주되며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804
[나폴레옹에 실망, '영웅' 개명]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로 선언하자 큰 환멸을 느껴, 원래 '보나파르트'라 명명했던 《교향곡 3번》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이 곡은 1806년에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되었다.
1805
[오페라 '피델리오' 초연]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프랑스 점령으로 빈이 텅 비어있던 상황에서 초연되었다.
재정적인 실패를 겪고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1806
[걸작 '영웅 교향곡' 출판]
나폴레옹에 대한 환멸 후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이라는 부제와 함께 《교향곡 3번 '영웅'》이 출판되었다.
이 곡은 이전 교향곡보다 훨씬 길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1807
[영국 출판 계약 및 미사곡 의뢰]
음악가 겸 출판인 무치오 클레멘티와 영국에서 작품 출판 권리를 확보하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하이든의 전 후원자인 에스테르하지 왕자로부터 미사곡 《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받았다.
1808
[빈 잔류 위한 귀족 연금 확보]
카셀 궁정의 카펠마이스터 자리 제안을 받았으나, 루돌프 대공, 킨스키 백작, 로브코비츠 공작 등 빈 귀족들의 연금 약속을 받고 빈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교향곡 5번, 6번 등 초연]
대규모 자선 공연을 조직하여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합창 환상곡》 등 여러 중요 작품들을 초연했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809
[괴테 희곡 '에그몬트' 음악 의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의 부수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받았다.
이 작업은 1810년에 완성되었으며, 베토벤이 괴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10
['엘리제를 위하여'의 그녀에게 청혼]
주치의의 조카딸 테레제 말파티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녀는 오늘날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1811
[중병으로 테플리츠 온천 요양]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려, 주치의의 권유로 테플리츠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하며 요양했다.
이 시기 《슈테판왕》과 《아테네의 폐허》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
1812
['불멸의 연인'에게 편지 작성]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다.
수취인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으나,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은 안토니 브렌타노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테플리츠에서 괴테와 조우]
테플리츠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괴테는 베토벤의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에 놀랐고, 베토벤은 괴테가 '궁정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평하며 서로 다른 사회적 태도를 보였다.
1813
['웰링턴의 승전' 작곡]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이 나폴레옹에게 승리했다는 소식에 영감을 받아 《웰링턴의 승전(Op.
91, '전쟁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프랑스와 영국 병사들의 노래, 포병 효과를 포함한 전투 장면을 담고 있다.
[웰링턴의 승전 & 교향곡 7번 초연]
전쟁 피해자를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웰링턴의 승전》과 《교향곡 7번, Op. 92》를 처음 연주했다.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어 베토벤의 경력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왔다.
1814
[독주자로서 마지막 공개 연주]
《대공 삼중주》에서 연주하며 독주자로서 마지막 공개 출연을 했다.
청력 손실이 심해지면서 연주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멜젤이 디자인한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815
[동생 사망, 조카 양육권 분쟁 시작]
둘째 동생 카스파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베토벤은 당시 아홉 살이던 아들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카스파의 아내 요한나와 오랜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1816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발표]
알로이스 야이텔레스의 시를 설정으로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
98》을 작곡하여 고전주의 레파토리에 연가곡을 도입했다.
이 작품은 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1817
[메트로놈 공식 지지]
멜젤이 새로 개발한 메트로놈에 대한 베토벤의 지지를 구하고 얻게 되었다.
이는 음악 표기에 대한 그의 혁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1818
['하머클라비어' 출판 및 필담장 시작]
《피아노 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 Op.
106》을 완성하고, 그의 마지막 걸작인 《교향곡 9번》의 일부가 될 음악 스케치를 시작했다.
청력 악화로 '필담장'을 사용하기 시작, 이는 그의 후기 삶에 대한 풍부한 기록 자료가 되었다.
1819
['장엄미사', '디아벨리 변주곡' 착수]
루돌프 대공의 추기경 승진 발표를 계기로 《장엄미사, Op.
123》 작곡에 착수했다.
또한 출판인 디아벨리의 요청으로 《디아벨리 변주곡, Op.
120》의 스무 개 변주곡을 완성하며 후기 걸작의 기반을 다졌다.
1820
[조카 카를 양육권 되찾음]
격렬한 법적 투쟁 끝에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되찾았다.
이후 베토벤은 카를의 삶에 깊이 간섭하게 된다.
1821
[건강 악화, 간경변 예고]
류머티즘과 황달에 시달리며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다.
심한 황달 증세는 간경변을 예고하며 그의 말년 건강을 위협했다.
1822
[런던 필하모닉, 교향곡 9번 의뢰]
런던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교향곡 작곡을 의뢰받았다.
이는 그가 작업하고 있던 《교향곡 9번》의 적절한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 기쁘게 받아들였다.
[갈리친 공작, 현악 사중주 의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갈리친 공작으로부터 현악 사중주 세 개를 의뢰받았다.
베토벤은 각 사중주 당 50 듀카트의 높은 가격을 책정했다.
1823
['장엄미사'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
완성된 《장엄미사》 사본을 루돌프 대공에게 제출했다.
이 작품은 독일과 유럽 여러 법원에 수익성 있게 판매될 수 있다는 구상으로 출판이나 공연이 서둘러지지 않았다.
1824
[인류의 환희, 교향곡 9번 초연]
캐른트너토르테아트르에서 《장엄미사》의 일부와 함께 《교향곡 9번》이 처음으로 연주되어 큰 찬사를 받았다.
청각 장애로 박수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에 눈물을 흘렸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합창이 도입된 교향곡으로, 베토벤의 음악 세계의 정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가 지휘자 옆에 서 있었음에도 청각장애로 인해 관객들의 박수조차 알지 못했지만, 콘트랄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서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
[교향곡 9번 두 번째 공연]
《교향곡 9번》의 두 번째 공연이 열렸으나, 첫 공연만큼의 높은 참석률을 보이지 못했다.
이는 베토벤의 마지막 공개 공연이 되었다.
1825
[현악 사중주 12번 초연]
갈리친 공작을 위해 쓰기 시작한 현악 사중주 중 첫 번째인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이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현악 사중주 15번 작곡 중 발병]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러운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악장을 작곡했다.
1826
[조카 카를의 자살 시도]
베토벤과 조카 카를의 관계는 계속 격렬했으며, 베토벤의 지나친 간섭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결국 자살을 시도했다.
카를은 살아남아 요양하게 되었다.
[동생 요한의 집으로 요양]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조카 카를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 달 동안 머물렀다.
[현악 사중주 13번 피날레 완성]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 시기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한 상태였다.
[폐렴과 간경변 증상 악화]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병상에 누웠다.
1827
[생의 마지막 말 '희극은 끝났네']
죽음을 앞두고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라고 속삭였다.
[음악의 성인, 베토벤 영면]
여러 차례의 치료 시도에도 불구하고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번개와 천둥 소리 속에서 오른손을 들고 주먹을 쥐는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검 결과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한 심각한 간 손상이 확인되었다.
[2만 명의 추모, 성대한 장례식]
배링 지역 공동 묘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약 2만 명의 빈 시민들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으며, 프란츠 슈베르트 등 당대 유명 음악가들이 성화 운반자로 참석해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1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