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자, 실존주의자, 현상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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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3: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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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자, 실존주의자, 현상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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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독일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 현상학 해석학 실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 개념으로 존재의 근원적 물음을 탐구함. 나치 정권 적극 지지 및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심각한 역사적 논란을 남겼으며 그의 철학과 정치적 행적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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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독일 시골 출생]

독일 바덴 대공국 메스키르히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시골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성마르틴 성당의 종을 치며 독특한 유년기를 보냈다.

1903

[가톨릭 장학금으로 학업]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가톨릭 교회의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다.

이 장학금은 그가 장차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초기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9

[신부가 되려 했으나…]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예수회에 입단하려 했으나,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결국 일반 신부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며 종교적 길을 모색했다.

1911

[철학으로의 극적인 전환]

2년 만에 신학 학업을 중단하고 철학으로 진로를 변경하는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결정은 훗날 그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만들었다.

이 시기 가톨릭 잡지에 여러 서평을 기고하며 글쓰기 재능을 선보였다.

1915

[사강사 임명]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임명되며 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는 그의 학문적 커리어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16

[후설에게 현상학 사사]

1916년부터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에게 직접 현상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독창적인 철학적 사유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후설의 조수도 겸했다.

1923

[마르부르크대 교수 부임]

마르부르크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며 학계에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젊은 학자로서 활발한 연구와 강의 활동을 펼쳤다.

1927

[철학계를 뒤흔든 《존재와 시간》 발표]

현상학 기관지에 그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발표했다.

이 책은 '현존재(Dasein)' 개념을 통해 존재의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며 독일 철학의 1선에 그를 우뚝 세웠다.

1928

[스승 후임으로 모교 교수]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때의 취임 강연은 훗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그의 초기 철학을 대표하는 글이 되었다.

1931

[논란의 시작: <검은 노트> 기록]

그의 사적인 '철학 일기'인 <검은 노트>(Schwarze Hefte)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일기에는 훗날 그의 친나치 및 반유대주의적 사상이 담겨 있었음이 드러나, 그의 철학 세계에 대한 심각한 논란을 촉발시켰다.

1931년부터 1941년 사이 개인적으로 남긴 이 일기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뿌리 없음'을 육화한 존재로 보고, 이들의 '공허한 합리성과 예측가능성' 정신을 비난했다. 또한 세계유대주의를 인간성을 말살하는 서구 근대성의 주요 추동요인으로 지목하고 비판적으로 논하는 등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1933

[나치 지지 총장 취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에 피선되어 취임 연설에서 학생들에게 나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며 친나치 행보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판받는 시기의 시작이었다.

그는 합리적인 근대 계몽주의적 철학이 초래한 비인간화에 반대하며, 미국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 모두를 이러한 합리화의 산물로 보고 거부했다. 대안을 독일 민족정신 부흥을 추구하는 나치즘에서 찾았으며, 그의 총장 취임 연설은 이러한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장이었다. 그는 1945년까지 나치 당적을 유지했다.

1934

[총장직 사임]

주 문교부와의 충돌로 인해 총장직에서 사직했으나, 1945년까지 나치 당적을 유지하며 정치적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선택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된다.

1945

[학문 활동 금지 처분]

독일 패전 후, 나치 정권 지지 행보에 대한 책임으로 학문 활동이 금지되고 수년간 휴직 처분을 받았다.

유대인 제자 한나 아렌트 등의 증언 덕분에 감옥 처벌은 면했으나, 그의 명성에는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의무적으로 나치당에 가입해야 했던 '수동적 방관자'라고 주장했으나, 철저한 연구조사 결과 나치당 행사에 깊이 참여했으며 동료 교수와 스승 에드문트 후설에게 보인 태도를 통해 심각한 반유대주의자였음이 밝혀졌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지 덕분에 감옥행은 피할 수 있었다.

1950

[명예 교수 복직]

1950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복직하여 명예 교수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에도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며 철학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1976

[철학자의 사망]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동시에 격렬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1976년 5월 26일에 사망했다.

그의 철학은 여전히 활발히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지만, 그의 친나치 행적은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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