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자, 논리학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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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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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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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20세기 대표 철학자. 초기 《논리 철학 논고》 후기 《철학 탐구》로 분석 철학의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수십억 유산을 기부하고 시골 교사 건축가 군인으로 변신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음악 언어 논리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계적인 철학 난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며 20세기 사상계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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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빈의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손꼽히는 부자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의 여덟 남매 중 막내로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유대인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했고, 외가 쪽으로는 노벨상 수상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도 친척 관계입니다.

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하며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등 당대 최고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카를 비트겐슈타인이고, 어머니는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입니다.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유대인에서 개신교로 개종했습니다. 외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 바이올린 연주가 요제프 요아힘의 사촌이며, 어머니 레오폴디네 칼무스는 노벨상 수상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모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철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1880년대 후반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독점 제철 사업가이자 세계에서 뛰어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재산은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북미 등지에 분산되어 인플레이션에도 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은 개신교와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비트겐슈타인은 천주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술과 지식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카를은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빈 분리파 전시관 설립 재정을 책임졌습니다.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같은 예술가들이 늘 초대되었고, 브람스는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형 파울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절대음감이 있었고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연주했습니다. 교향곡 전체를 외워 휘파람으로 불 정도였습니다.

1902

[장남 형의 충격적 자살]

네 살 때부터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던 장남 한스가 쿠바 아바나에서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유전적으로 우울증과 자살 경향을 보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습니다. 장남인 한스는 네 살 때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습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1903

[린츠 실업고등학교 편입]

가정교육을 받은 후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국립실업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비트겐슈타인보다 6일 일찍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둘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03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보다 6일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양측 모두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회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리라 추정됩니다. 학교 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다고 동급생들은 회고합니다. '선생', '헤어 루트비히' 같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904

[삼남 형의 연이은 자살]

둘째 형 한스에 이어 삼남 루돌프마저 베를린에서 자살하여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비트겐슈타인 역시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1904년 삼남 루돌프가 베를린에서 자살하였습니다. 루트비히도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파울 엥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근 내 상황은 완전히 비참함 자체입니다. 나는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은 여전히 나를 괴롭힙니다. 나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이 지점까지 오지 않기를!"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1905

[볼츠만 선집 읽고 물리학 관심]

하늘을 나는 문제 해결에 대한 내용이 담긴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을 읽고 물리학에 깊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는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기를 희망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05년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을 읽고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1906

[볼츠만의 죽음과 기계공학 시작]

비트겐슈타인이 물리학을 배우고자 했던 루트비히 볼츠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하며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등의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볼츠만은 1906년 생을 자살로 마감하였습니다. 1906년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1908

[공학 박사 학위와 철학적 전환]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동시에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등을 읽으며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 그의 철학적 여정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08년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대기권 상층에 연을 띄우는 연구와 작은 제트 엔진에 사용될 프로펠러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 법칙》를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1911

[프레게 방문과 러셀과의 인연]

여름, 수학기초론 연구의 대가인 프레게를 방문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로 결심하며 본격적인 철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1911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러셀의 제자로 철학 연구 시작]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실에 출석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과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8월부터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실에 출석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되어 수리 논리학의 원리를 대상으로 한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 러셀은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고자 연구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자주 거침없이 비판받기도 하였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천재다운 능력을 이용해 논리학상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매료되었고 영국 철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의해 자신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로만 비추어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러셀은 그를 두고 '천재에게서 나타나는 전통적 특징을 전형이 될 만하게 현현했다. 재언하면, 그 사람은 열정 있고 해박했으며, 격렬하고도 좌중을 휘어잡는 인재였다. 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나는 더는 철학의 기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912

[아이슬란드 여행과 비밀 모임 가입]

고전음악과 여행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아이슬란드를 여행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비밀 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며 지적 교류를 확대했습니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관심사는 고전음악과 여행이었습니다. 1912년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여로에 종종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동행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무어가 이끌던 비밀 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였습니다.

1913

[막대한 유산 상속과 파격적 기부]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 한 명이 될 정도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유산의 상당량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게오르크 트라클 같은 오스트리아 예술가와 작가들을 돕기 위해 기부하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유산을 상속받아 유럽에서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상속받은 유산의 상당량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도우려고 기부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원한 예술가 가운데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게오르크 트라클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르웨이 은둔과 논고 집필 시작]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문적 분위기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 노르웨이 숄덴 인근의 오지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논리 철학 논고》의 바탕이 되는 작업에 몰두하며 지적 역량을 폭발시켰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자신이 일하기에 이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겐 대학 연구자들이 심오한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영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의 끝에 있는 숄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의 한 집 이층을 빌려 겨우내 지내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가장 정열 있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시간이었으며, 이때 이루어진 작업은 흔히 '논고'라고 불리는 《논리 철학 논고》로 정리되었습니다.

1914

[1차 대전 자원입대와 트라클의 죽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에 충격받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이 해에 만나고자 했던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또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1년째 은둔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하였습니다. 입대 초기에는 함선에서 근무하였으나 얼마 후 포병대로 전근하였습니다.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트라클이 자살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게오르크 트라클은 신경쇠약으로 마약에 의존하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에 이어 트라클까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자살하는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1916

[최전방 참전, 영웅적 수훈]

오스트리아 7군에 자원하여 브루실로프 공세를 방어하는 최전방 조종사로 참전했습니다.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다운 활약'으로 수훈하며 군인으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1916년 3월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7군에 자원하여 브루실로프 공세를 방어하는 최전방 조종사로 참전하였습니다. 영국군과의 전투 후에 비트겐슈타인은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다운 활약'으로 말미암아 수훈했습니다.

1917

[러시아 전선 전근, 훈장 수훈]

러시아 전선의 곡사포 연대로 전근되어 다시 한번 용감한 행동을 인정받아 은장무공훈장을 비롯한 여러 개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1917년 1월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전선의 곡사포 연대로 전근되었고 여기서 다시 용감한 행동으로 은장무공훈장을 비롯해 훈장 여러 개를 받았습니다.

1918

[대위 승진 및 최고 훈장 추천]

대위로 승진하여 이탈리아 티롤 남부 전역 산악 포병 연대에 배속되었고, 6월 오스트리아 공세에서 전훈을 세워 최고 훈장인 금장무공훈장에 추천되고 검의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1918년 비트겐슈타인은 대위로 승진하였고 오늘날 트렌티노로 불리는 이탈리아 티롤 남부 전역에서 산악 포병 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1918년 6월 오스트리아의 공세에서 전훈을 세운 비트겐슈타인은 최고 훈장인 금장무공훈장에 추천되었고 그 아래 단계인 검의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차남 형 쿠르트의 비극적 자살]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 오스트리아군 총 퇴각 결정 후 차남 쿠르트가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는 또 다른 가족 비극을 겪었습니다.

차남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군의 총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습니다.

[이탈리아군 포로, 논고 완성]

이탈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동시에, 전쟁 기간 동안 집필했던 《논리 철학 논고》의 최종본을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편지로 그의 죽음을 접하고 핀센트에게 헌정했습니다.

수감 중에도 버트런드 러셀 등의 도움으로 책 반입이 허락되어 원고를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1918년 11월 트렌토 근교에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고, 종전 뒤에도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한 단상을 적어나갔습니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한 작업이 '논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918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다를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데이비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완성된 논고를 핀센트에게 헌정했습니다. 논고는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중부의 카치노에 수감된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키네스 같은 영국 친구의 도움으로 책의 반입이 허락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원고가 영국으로 보내졌습니다.

1919

[《논리 철학 논고》 출간]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고가 철학상 뛰어난 성과임을 간파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논리 철학 논고》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 전기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명합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고가 철학상 뛰어난 성과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1919년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출간하였습니다. 프랭크 램지와 찰스 케이 오그던이 비트겐슈타인의 원고를 영역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이 영역물을 검토하였습니다. 책의 제목 《논리 철학 논고》는 원제 <논리 철학 논설>을 바뤼흐 스피노자의 《정치학 논고》를 기려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지은 것입니다. 서문은 버트런드 러셀이 썼습니다. 《논리 철학 논고》는 중요한 철학 서적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포로로서 수감된 가운데 버트런드 러셀의 서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기본 사항을 러셀이 오해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작업 출판을 대상으로 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출판사는 서문을 쓴 러셀만을 부각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1920

[철학 은퇴와 시골 교사 변신]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경험과 《논리 철학 논고》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답을 구했다고 생각한 그는 철학을 떠나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에 감명받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소박한 삶을 택했습니다.

1920년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끔찍한 전투를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과 감성은 '논고'로 집약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작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스바흐, 오테르탈, 트라텐바흐와 같은 곳의 산골 초등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 학부모들 및 동료 교사들과 불화를 일으켜 교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1921년 10월 버트런드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여전히 트라텐바흐에서 증오와 비천에 둘러싸인 채 있습니다. 저는 수량이나 정도 따위가 중간이 되는 사람이란 어디서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아나 이곳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이 없고 어디보다도 무책임합니다."라고 불평했습니다.

1921

[논리 철학 논고, 독일어판 출간]

빌헬름 오스트발트가 운영하던 독일의 출판사 《자연철학 분석》에서 《논리 철학 논고》의 독일어 초판이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이로써 그의 혁명적인 철학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첫선을 보였습니다.

논고는 1921년 빌헬름 오스트발트가 운영하던 독일의 출판사인 《자연철학 분석(Annalen der Naturphilosophie)》에서 독일어로서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1922

[논리 철학 논고, 영역본 출간]

버트런드 러셀의 서문과 프랭크 램지, 찰스 케이 오그던이 영역한 《논리 철학 논고》의 영역본이 출간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러셀의 서문과 램지와 오그던이 영역한 판본은 192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1926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교사 사전 출판]

초등학교 교사 시절, 아이들을 위해 직접 만든 42쪽 분량의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 《어린이를 위한 사전》을 빈에서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논고》를 제외하고 그가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책으로, 2005년 경매에서 75,000 파운드(한화 약 1억 3천만원)에 판매되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직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Wörterbuch für Volksschulen)은 《논고》를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입니다. 이 사전은 1926년 빈에서 출판되었고 횔더 피흘러 템프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전의 초판은 2005년 2월 경매에서 75,000 파운드(약 1억 3천만원)에 판매되었습니다.

[건축가로 변신, 스턴버러 하우스 설계]

누나 그레틀을 위해 빈에 새로운 집 '스턴버러 하우스'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창틀, 문, 난방기 등 모든 디테일에 관여했으며, 특히 150kg에 달하는 금속 차양막과 직접 설계한 문 손잡이, 난방기 등으로 건축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하고 정교한 건축물을 완성했습니다.

1926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그레틀을 위해 새 집을 구상하였습니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된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습니다. 파울 엥겔만은 새 집이 아돌프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랐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문 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에 이르는 금속 차양막을 달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을 쓴 버나드 라이트너는 이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이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더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누나 헤르미네는 이 집을 두고 '나는 언제나 내가 그 집 안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자문하곤 하였다. 그 집은 신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집은 현재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체벌 논란으로 교직 사임]

11살 소년을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교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빈에서 잠시 머문 뒤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소박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교직 생활하면서 체벌 문제에 휩싸인 비트겐슈타인은 1926년 4월 11살 소년을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고 결국 교직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교직을 그만 둔 후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잠시 머문 후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서 일하였습니다.

1929

[케임브리지 대학 복귀와 열광적 환대]

프랭크 램지 등 친구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했습니다.

기차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는 잉글랜드 지식인들이 몰려들었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자신의 아내에게 '신이 강림하셨으니 나는 그 사람을 5시 15분 기차에서 만났어'라고 쓸 정도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프랭크 램지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랜 친구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자신의 아내 리디아 로포고바에게 쓴 편지에 '뭐, 신이 강림하셨으니 나는 그 사람을 5시 15분 기차에서 만났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환대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집필하여 이미 철학 박사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기록하였고 무어와 함께 박사학위 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사관이 된 두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논고를) 절대로 이해 못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무어는 심사보고서에서 '내 스스로 이 천재다운 연구를 검토하였고 내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논고가 철학 박사학위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점은 명백하다.'고 썼습니다.

1931

[파혼과 독신 생활]

마르게리테 레스핑거와 결혼을 고려했으나 파혼 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양성애자였으며, 데이비드 핀센트, 프랜시스 스키너, 벤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이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부임한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의 집에서 만나게 된 마르게리테 레스핑거와 혼인을 고려하였으나 1931년 파혼한 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양성애자였고 빈의 프라테르 공원에서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윌리엄 워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1973년 발견된 비트겐슈타인의 노트에는 프라테르에서의 만남을 '친구의 격려'와 같이 표기하였다고 밝혔습니다. 뒷날 바틀리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의심받았으나 비트겐슈타인이 데이비드 핀센트, 프랜시스 스키너, 벤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은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도덕적 성찰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을 혐오했습니다. 핵무기 사용에 반대했으며,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한 자책과 천재성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1934

[소련 이민 고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책에 묘사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프랜시스 스키너와 함께 소련으로 이민을 고려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어를 배우는 등 적극적인 준비를 했습니다.

1934년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인 케인스가 쓴 《러시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서술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스키너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이민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1935

[소련 여행]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여행하며 실제 소련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당국에 교사 자리를 문의했으나 3주 뒤에야 답변을 받았습니다.

1935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여행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당국에 교사 자리가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이에 대답은 3주가 지나서야 돌아왔습니다.

1936

[노르웨이 재방문, '조사' 연구]

부터 1937년까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며 철학적 '조사'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선의의 거짓말 등을 밝히는 '고백'을 썼고, 이를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자 했습니다.

1936년부터 37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것을 철학적 '조사'라고 불렀습니다. 1936년과 37년 사이의 겨울에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고백'을 썼습니다. 이 글들은 대부분 선의의 거짓말과 같은 것을 밝히는 소소한 내용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1938

[아일랜드 대통령과 만남]

모리스 드루어리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를 여행하던 중, 아일랜드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를 만났습니다.

수학 교사 출신인 발레라 대통령은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 수학 발전에 기여하길 희망했습니다.

1938년 비트겐슈타인은 모리스 드루어리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를 여행하였습니다. 드루어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정신 의학을 소개한 제자이자 의사였습니다. 드루어리를 만난 자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마침 드루어리를 찾아온 아일랜드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수학 교사 출신이었던 발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 수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나치 병합과 가족의 생존 위협]

아일랜드에 머물던 중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소식을 접하고, 유대인으로 분류될 위기에 처한 가족의 안전을 위해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나치 당국에 헌납하는 힘겨운 협상을 벌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고 나치의 인종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취급되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케인스와 같은 친구들의 힘을 빌어 영국이나 아일랜드 국적을 획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그만두었습니다. 왼손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파울은 공연과 교습을 금지당하자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하였고, 여자 형제들은 위조 여권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나치 독일의 혼혈법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이 유대인 조상이 있는 혼혈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조부인 헤르만이 독일 귀족 자인-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사생아였다는 증언을 모아 제출하였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해외 자산에 눈독을 들인 나치 당국과 재산의 상당 부분을 헌납하는 힘겨운 협상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은 혼혈로 인정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협상 과정은 알렉산더 워의 《비트겐슈타인 가문》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재산을 지키려는 파울과 목숨을 지키려는 누이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이후로 파울은 죽을 때까지 형제자매들과 다시는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침공 하루 전날 비트겐슈타인 가문을 혼혈로 승인하는 문서에 직접 사인을 한 아돌프 히틀러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혼혈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2,100건의 신청 가운데 인정된 건 수는 12건에 불과할 만큼 이러한 조치는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1939

[케임브리지 교수 임명, 재산 강탈]

무어의 사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곧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같은 해 8월, 가족의 안전을 위한 협상 결과 전쟁 시작 일주일 전,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재산 중 금 1.7톤, 현재 가치로 약 6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 나치에게 인도되었습니다.

1939년 무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교수직을 갖게 된 얼마 후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1939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빈을 방문하여 그레틀과 다른 누나들을 만났고, 하루는 라이히스방크의 직원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들렀습니다. 이후, 그는 가족이 처한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던 형 파울을 설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습니다. 1939년 8월 가족에 대한 해방 요청이 접수되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승인으로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재산 금 1.7톤이 나치에게 인도되었습니다. 이는 2009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해에 모스크바를 두 번째로 방문하여 철학자인 소피야 야노프스카야를 만났습니다.

1941

[2차 대전 중 병원 자원봉사]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 런던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 관리 봉사를 자원했습니다.

병원 직원들은 그가 세계적인 철학자인 줄 모르고 함께 일했으며,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며 소박하게 봉사했습니다.

몽크의 전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다고 합니다. 1941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존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존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무렵 그는 몹시 외로워 '내 생활의 미래를 대상으로 해 나는 더는 어떤 희망도 없다. 살아 있는 사망이 길게 늘어진 것과 같은 이런 것은 예전에는 없었다. 최악의 상황 말고는 내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친구도 없고 기쁨도 없고.'라고 일기에 썼습니다. 또한 프란시스 스키너의 연구 수업에 참여한 십대 케이스 커크와 우정을 발전시켰고, 커크가 결혼하자 슬퍼했습니다.

1947

[교수직 사임, 집필 전념]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교수직은 친구인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리흐트가 물려받았습니다.

1947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교수직은 친구인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리흐트가 물려받았습니다.

1949

[유럽 향한 마지막 여정]

학생이었던 노먼 맬콤이 더블린으로 찾아왔을 때 병든 상태였습니다.

맬콤의 설득으로 미국으로 요양을 떠났으나, "난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난 유럽인이라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라며 유럽으로 돌아왔습니다.

1949년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던 노먼 맬콤이 더블린으로 찾아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병들어 있었습니다. 맬콤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여 비트겐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려갔으나 그의 증세는 악화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맬콤에게 "난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난 유럽인이라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암이 골수에까지 옮게 되었습니다.

1950

[누나 헤르미네의 임종]

죽음이 임박한 누나 헤르미네를 만나기 위해 빈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간신히 알아보는 상태였고, 그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다"고 기록하며 슬픔을 표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2월 11일 빈을 방문하여 죽음이 임박한 누나 헤르미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간신히 알아보는 처지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누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4월 케임브리지로 돌아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를 한 번 더 가보고 싶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1951

[마지막 생일, “삶은 참 멋있었다”]

62번째 생일, 의사로부터 며칠 시한부 선고를 받자 "좋군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는 명언을 남기며 삶을 긍정하고 마무리했습니다.

이는 그의 철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62번째 생일이던 1951년 4월 26일 의사가 생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군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의 사망]

천주교식 장례의식을 거쳐 묻히며 62년간의 파란만장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여정을 마쳤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은 후대 인문학, 사회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4월 29일 사망하였고 천주교식 장례의식을 거쳐 묻혔습니다. 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예술가들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에서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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