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작곡가, 음악극 창시자, 종합예술가, 논란의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3:45:41
•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거장이자 혁신적인 음악극 장르의 창시자입니다. • 모든 예술이 조화된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을 추구하며 후대 음악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자신만의 오페라 극장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건립 니벨룽의 반지 등 세계최초 최대 규모의 대작을 선보였습니다. • 탁월한 예술성과 함께 반유대주의적 시각 나치의 전유로 인한 논란으로 복합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1813
[바그너, 라이프치히 출생]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출생 6개월 만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이듬해 재혼했습니다.
1822
[9세, 피아노 시작]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극작가를 꿈꿨으나, 이내 음악으로 방향을 틀어 1831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1832
[19세, 첫 교향곡 작곡]
19세에 첫 교향곡 C장조를 작곡하며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듬해에는 첫 완성 오페라 '요정'을 내놓았습니다.
이후 쾨니히스베르크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1832년 미완성 오페라 '혼례'를 시작했으며, 1836년에는 두 번째 오페라 '연애금지'가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으나 반응은 좋지 못했습니다.
1836
[여배우 미나와 결혼]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 즉 '미나'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리가로 이사했고 바그너는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죠.
하지만 미나가 야반도주하는 등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839
[빚 피해 도주, 영감 얻다]
부부는 늘어나는 빚을 피해 리가를 떠났습니다.
빚은 바그너의 평생을 따라다녔죠.
도주 중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폭풍우를 만났고, 이 경험은 그의 대표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바그너는 이후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840년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작곡했습니다.
1842
[오페라 '리엔치' 성공]
작곡한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가 독일 드레스덴 왕립 극장에서 공연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성공 덕분에 바그너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고,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작곡하고 상연했습니다.
1849
[드레스덴 봉기 가담]
정치적 좌익 운동에 가담하여 드레스덴 5월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혁명이 진압되자 체포 영장을 피해 파리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로 도망, 12년간 망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망명 이전에 완성했던 '로엔그린'의 초연을 스승 프란츠 리스트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리스트는 1850년 8월 바이마르에서 성공적으로 지휘했습니다.
1850
['음악 속 유대주의' 출판]
망명 생활 중 음악, 노래, 춤, 시 등 모든 예술을 통합한 '총체예술(Gesamtkunstwerk)' 비전을 설명한 "미래의 예술-작품" 등 주목할 만한 수필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시기, 유대인 작곡가를 비난하는 반유대주의 작품 "음악 속의 유대주의"를 필명으로 출판하여 논란을 낳았습니다.
이 수필은 유대인 음악가들이 "민족의 참 정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유대주의의 박멸을 주장했습니다. 1869년 본인 이름으로 재출판하여 대중적 항의를 야기했습니다.
1854
[쇼펜하우어 철학 접함]
시인 친구 게오르그 헤베그를 통해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접하고 깊이 공감했습니다.
바그너는 이를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여겼으며, 쇼펜하우어의 비관적인 인간관은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음악은 최고의 지위를 점했으며, 이는 바그너의 오페라 이론에도 영향을 미쳐 후기 작품에서는 음악이 더 강력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1857
['트리스탄과 이졸데' 착수]
비단 상인의 아내인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와 사랑에 빠지며, 기존 '니벨룽의 반지' 작업을 잠시 멈추고 그녀에게 영감을 받은 역대급 걸작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며, 바그너의 혁신적인 화성 기법으로 20세기 무조성 음악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불편한 애정 행각은 아내 미나가 편지를 발견하며 1858년 막을 내렸고, 바그너는 홀로 베니스로 떠났습니다.
1861
[추방 해제, '마이스터징거' 시작]
개정판 '탄호이저'가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나, 귀족들의 방해로 대실패를 겪었습니다.
이후 정치적 추방이 해제되어 프로이센으로 돌아와 비브리히에서 그의 작품 중 가장 밝은 오페라인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862년에는 아내 미나와 이혼했습니다.
1864
[루트비히 2세의 후원]
19세의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즉위하자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왕의 극적인 후원을 받게 됩니다.
왕은 바그너의 막대한 빚을 해결해주고 그의 새 오페라 상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865
['트리스탄' 초연 성공]
루트비히 2세의 후원 아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뮌헨 왕립 극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바그너는 후원자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와 사랑에 빠져 사생아 이졸데를 낳는 추문으로 뮌헨을 떠나야 했습니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의 사생아로, 1865년 4월 바그너의 딸 이졸데를 낳았습니다. 결국 바그너는 1865년 12월 루트비히 2세의 요청으로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빌라 Triebschen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868
['마이스터징거' 뮌헨 초연]
스위스 Triebschen에서 완성한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가 뮌헨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으로,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1869년 Triebschen에서 그는 젊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나 굳은 친구가 되었고, 니체의 첫 책 '비극의 탄생'은 바그너에게 헌정될 만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870
[코지마와 정식 결혼]
뷜로와 이혼한 코지마와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바그너 생애 마지막까지 이어졌으며, 딸 에바와 아들 지크프리트가 태어났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습니다.
1871
[바이로이트 극장 선정]
자신의 역작 '니벨룽의 반지' 전곡 공연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새 오페라 극장 부지로 작은 마을 바이로이트를 선정했습니다.
이듬해 바그너 가족은 바이로이트로 이주했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습니다.
'반지' 사이클 중 이미 완성된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왕의 명령으로 뮌헨에서 초연되기도 했습니다. 축제극장 공사 자금 마련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결성되었고, 바그너는 독일 전역에서 콘서트 여행을 다녔습니다.
1876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장]
마침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개장했고, 세계최초의 시도로 특별히 설계된 극장에서 그의 야심작 '니벨룽의 반지' 전곡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축제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화적 유산이 되었습니다.
'니벨룽의 반지'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기초한 4개의 오페라 모음으로, 총 연주 시간이 대략 16시간 가량에 달하는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 작품 중 가장 야심찬 것으로 불립니다. 축제 극장은 1874년 루트비히 2세의 추가 보조금으로 최종 자금이 모였고, 바그너 가족은 바이로이트의 영구 거주지인 '반프리트' 빌라로 이주했습니다.
1877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 시작]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 작품은 성배에 대한 기독교 전설에 기초한 명상적인 '무대신성제전극'으로, 완성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1882
['파르지팔' 완성 및 초연]
'파르지팔'을 완성하고, 그 해 여름 두 번째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초연했습니다.
마지막 공연날에는 지휘자 대신 바그너 본인이 직접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3막을 지휘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바그너는 이 시기에 심한 협심증에 시달렸으며, 축제 후 요양을 위해 베니스로 떠났습니다.
1883
[베니스에서 생을 마감]
심한 협심증으로 고통받던 리하르트 바그너는 1883년 2월 13일, 베니스에서 향년 71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옮겨져 반프리트 정원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