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

독일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 평론가, 낭만주의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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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2: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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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만
독일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 평론가, 낭만주의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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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음악의 거장으로 섬세한 감정과 문학적 깊이를 음악에 담아내다.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된 후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다. 아내 클라라 슈만과의 운명적인 사랑과 갈등은 그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다. 가곡의 해 교향곡의 해 실내악곡의 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폭발적인 창작력을 선보이다. 말년의 정신병적 고통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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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천재의 탄생]

작센 왕국의 츠비카우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로베르트 슈만.

출판업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음악보다 문학을 먼저 접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일찍이 멜로디에 감정과 성격을 담아내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죠.

7세 이전에 곡을 쓴 기록도 있지만, 아버지는 출판업자이자 소설가였기에 음악보다 문학적 가정교육을 받았습니다. 7세에 츠비카우 고등학교 선생님 요한 고트프리트 쿤츠슈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스승의 도움 없이도 혼자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감정과 성격을 멜로디에 묘사하는 재능이 탁월해 사람들을 웃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826

[음악의 길에 들어서다]

16세,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공연을 보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꿈을 지지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그가 음악가가 아닌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음악을 깊이 연구하며 자신만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카를스바트에서 열린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음악가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격려하고 지원했지만, 1826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슈만을 돌본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무렵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작품을 관심 있게 연구했습니다.

1828

[운명의 스승과 그녀를 만나다]

라이프치히에서 당대 최고의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비크와 그의 9살 딸 클라라를 만납니다.

클라라의 놀라운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고 비크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만남은 그의 삶과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칼스 가문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비크와 그의 딸 클라라를 만났습니다. 클라라가 훔멜의 피아노 3중주곡 피아노 반주를 "놀랄 만큼 교묘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비크의 피아노 레슨은 비싸고 엄격했지만, 슈만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레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클라라는 이 해 10월 20일에 음악계에 데뷔했습니다.

[법대생, 피아노에 눈뜨다]

김나지움을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냉철한 법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피아노를 구입해 실내악 연주에 몰두합니다.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음악적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츠비카우 김나지움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 어머니 요한나의 뜻과 후견인의 권유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 법과에 진학했습니다. 법률 공부에는 점차 흥미를 잃었고, 어머니에게도 법학을 좋아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피아노를 입수하고 동료 학생들과 실내악 연주에 열중했으며,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와 바흐 칸타타를 들으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가곡, 폴로네즈, 피아노 4중주곡 등을 습작했습니다.

[작곡가의 길을 선언하다]

자작곡에 대한 조언을 구하다 재능은 있으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이에 "이제 작곡법 연구에 착수할 때"라며 음악의 대극장으로 향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힙니다.

이는 피아니스트를 넘어 작곡가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의 악장에게 자작곡을 보내 조언을 구했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만 전문성과 음악적 요소 사용법이 아직 미흡하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이에 슈만은 답장에서 "이제 작곡법의 연구에 착수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음악의 오디온(대극장)에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들여놓고 싶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1829

[방랑과 첫 작품의 탄생]

법률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한 뒤,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예술적 영감을 받습니다.

이때 그의 첫 작품인 피아노곡 《아베크 변주곡》을 완성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친구 로젠의 편지를 읽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했습니다. 전학 이유는 유명 법학 교수들의 강의를 듣기 위함이었으나, 실제로는 새벽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법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여행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빌리발트 알렉시스,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 여사를 만났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스위스와 북이탈리아를 여행했고,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로시니의 오페라를 들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티보 교수는 그에게 "신은 슈만에게 법률가로서의 운명을 주지 않았다"고 조언했고,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에 할애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덴 대공비 스테파니의 초청을 받아 만하임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이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번호 1번, 《아베크 변주곡》이 이때 완성되었습니다.

1830

[피아니스트의 꿈이 꺾이다]

어머니의 승낙을 받고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비크에게 피아노 레슨을 재개합니다.

그러나 무리한 테크닉 연습과 독자적인 기계 장치 사용으로 오른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가 끝나버리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어머니 요한나는 비크의 3년 내 피아니스트 양성 약속을 받고 슈만의 음악가의 길을 인정했습니다. 1830년 9월 24일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10월 라이프치히로 돌아왔고, 비크의 집에 거주하며 레슨을 받았습니다. 1831년 자서전에서 '테크닉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오른손이 망가졌다'고 적었으며, 독자적으로 고안한 기계장치로 테크닉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것이 현재 정설입니다. 비슷한 시기 눈병에 걸려 실명을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1832

[작곡가로 전향하다]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된 후, 한때 첼로 전향이나 신학 공부까지 고려했지만, 그는 결국 작곡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로 결심합니다.

미완성으로 남은 《츠비카우 교향곡》을 시작으로 피아노곡에 집중하며 새로운 음악의 장을 열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된 후, 슈만은 한때 첼로로 전향하거나 아예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1832년 5월부터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향곡 작곡을 시도했지만 이때의 《츠비카우 교향곡》은 미완으로 끝나고 다시 피아노곡을 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1833

[고독 속에서 《음악신보》를 꿈꾸다]

형과 형수가 잇따라 사망하며 심각한 우울증과 고독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이때, 독일 음악 비평계의 속물적인 수준에 불만을 품고 예술을 사랑하는 친구들과 새로운 음악 잡지 창간을 논의하며 '다비드 동맹'의 영감을 얻습니다.

가을 형 율리우스와 형수 로잘리에가 잇따라 사망함에 따라 슈만은 고독과 공포감에 시달렸습니다. 이 해의 일기에 "나는 내 생애에서 커다란 국면 중 하나를 지나고 있다. 10월부터 12월까지 무서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고 적었습니다. 이 시기에 친구 루트비히 슝케와 예술가의 후원자였던 상인 카를 포익트, 그리고 포익트의 아내 헨리에테 등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1832년 라이프치히의 《일반음악신문》에 쇼팽을 소개하는 글을 투고했다가, 카를 체르니 등 독일의 속물적인 음악비평계의 수준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후 1833년부터 카페 바움 등에 예술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새로운 잡지를 발행하는 것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1834

[에르네스티네와의 짧은 사랑]

비크의 제자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과 연애를 하고 약혼까지 하지만, 그녀의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파혼합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의 대표작인 《사육제》와 《교향적 연습곡》으로 승화되어 영원히 기억될 사랑의 선율을 남깁니다.

1834년 4월 당시 18세였던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이 비크의 새 제자로 비크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와 연애를 하다가 반년이 지나지 않아 그녀와 약혼했지만, 이후 몇 주 안에 양측의 합의로 파혼했습니다. 에르네스티네는 폰 프리켄 남작과 체트비츠 백작 부인 사이의 사생아인데, 이 같은 복잡한 가정 사정에 대해 슈만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알게 된 슈만이 상처를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의 연애에서 나온 것이 《사육제》(Op. 9)와 《교향적 연습곡》(Op. 13)입니다. 《사육제》에서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에서 네 글자 ASCH에 해당하는 음형을 등장시키고, 《교향적 연습곡》은 에르네스티네의 아버지 폰 프리켄 남작이 작곡한 주제에 기초한 변주곡입니다.

[《음악신보》 창간과 '다비드 동맹']

독일 음악 비평의 새로운 장을 연 《음악신보》를 창간합니다. 슈만은 초대 편집자를 돕다가 모든 일을 맡게 되고, '새로운 시적 시대'를 위해 저속한 음악에 맞서는 가상의 '다비드 동맹'을 만들어 자신의 음악적 철학을 펼쳐나갔습니다.

1834년 4월 3일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창간했습니다. 초대 편집자는 율리우스 노르였고, 슈만은 편집을 돕다가 곧 일의 전부를 맡게 됐습니다. 슈만은 《음악신보》에서 '새로운 시적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저속한 불레셋인과 싸우는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 동맹을 만들고, 거기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1835

[클라라, 운명의 시작]

에르네스티네와의 관계가 끝난 후, 슈만은 늘 남매 같던 비크의 딸 클라라에게 사랑의 감정을 키워갑니다.

이 해, 클라라는 16세의 나이로 게반트하우스에서 데뷔하고, 슈만은 그녀의 연주회에 동행하며 둘의 사랑을 키워나갑니다.

슈만과 클라라는 남매 같은 관계였으나,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와 헤어진 뒤 클라라를 향한 사랑을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1835년 가을 펠릭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했고, 슈만은 《음악신보》에서 그의 연주회를 극찬했습니다. 클라라는 1835년 12월 9일 16세의 나이로 게반트하우스에서 데뷔했고, 슈만은 클라라의 고향 츠비카우 연주회에도 동행했습니다.

1836

[비크의 끈질긴 방해와 사랑의 투쟁]

슈만과 클라라의 관계를 알게 된 비크는 분노하며 클라라를 드레스덴으로 보내 둘을 갈라놓습니다.

그는 슈만을 비난하고 클라라에게 외출과 편지를 금지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둘의 사랑을 방해했지만, 슈만과 클라라는 끈질긴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슈만과 클라라의 관계를 알게 된 비크는 1836년 1월 클라라를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옮겨 살게 해 슈만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같은 해 2월 4일 슈만의 어머니 요한나가 사망하자, 슈만은 클라라를 따라 드레스덴으로 향해 2월 7일부터 10일까지 둘이서 지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비크는 슈만과 클라라를 라이프치히로 소환하여 두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슈만은 비크의 집에 출입을 금지당했고, 클라라는 편지를 검열받고 혼자 외출을 금지당했습니다. 비크는 슈만에게 생활력이 없고 음주벽이 있다는 등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슈만의 전 여자친구인 에르네스티네의 협조를 얻으려 했으며, 클라라의 성악 교사에게 남자친구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1837

[결실을 맺은 사랑의 맹세]

비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클라라는 슈만에게 헌정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하며 사랑에 화답하고, 마침내 슈만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둘의 사랑이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비크의 방해에 지친 클라라는 한 번은 체념하고 슈만의 모든 편지를 돌려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37년 8월 클라라는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슈만이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해 슈만에게 화답했고, 8월 14일에는 슈만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9월 슈만은 비크에게 편지를 했으나, 비크는 클라라를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키웠으며 주부로 만들 생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비크와의 회견이 "두렵고, 비크는 차갑고 적의에 가득 차 있었으며 혼란스럽고 모순 투성이였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1838

[슈베르트 교향곡 9번 초고 발견]

비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빈으로 떠나 《음악신보》의 본거지를 옮기려 했으나, 검열 문제로 실패합니다.

하지만 빈에서 슈베르트의 형 집을 방문하여 세계 최초로 미공개 교향곡 9번 초고를 발견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 곡은 이후 멘델스존의 지휘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슈만은 1838년 10월부터 1839년 4월까지 빈에서 머물렀습니다. 클라라가 빈 연주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을 알고 클라라의 활동반경과 《음악신보》의 본거지를 빈으로 옮기면 비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빈은 반동주의적 정치체제 하에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압박하고 있었고, 검열에 의해 억압받을 것을 염려해 《음악신보》의 본거지를 옮길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빈에 머무는 동안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베토벤의 무덤 앞에서 주운 펜으로 나중에 교향곡 1번을 썼습니다.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해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초고를 발견했습니다. 이 교향곡은 1839년 3월 21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돼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39

[비크와의 결혼 소송 시작]

더 이상 비크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슈만은 클라라의 동의를 얻어 변호사를 선임하고, 결혼을 위한 법적 투쟁을 시작합니다.

이는 비크의 방해에 맞서 사랑을 쟁취하려는 슈만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슈만은 1839년 6월 15일 클라라의 동의를 얻어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그해 7월, 비크와 이혼해 베를린에서 거주하던 클라라의 친모 마리안네 바르길을 찾아가 클라라와의 결혼 동의를 얻었습니다.

1840

['가곡의 해', 음악 스펙트럼의 확장]

클라라와의 결혼을 앞두고 그는 그동안 멀리했던 성악곡의 매력에 눈뜹니다.

이 해에만 120곡 이상의 가곡과 중창곡을 작곡하며 평생 남긴 가곡의 대부분을 완성합니다.

1840년은 그의 '가곡의 해'로 불리며 음악적 스펙트럼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시기였습니다..

슈만은 1839년에 "성악곡은 기악곡보다 수준이 낮아 위대한 예술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평했고, 실제로 작품번호 23번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작곡했습니다. 그러나 1840년 클라라와의 결혼을 앞두고 가곡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1840년 3월부터 7월까지 5편의 가곡집을 작곡했습니다. 두 편의 《리더 크라이스》(Op. 24, 39), 《미르텐》(Op. 25), 《여인의 사랑과 생애》(Op. 42), 그리고 《시인의 사랑》(Op. 48)입니다. 이들을 포함해 이 해 120곡 이상의 가곡, 중창곡이 작곡되었습니다. 이는 슈만이 평생 남긴 가곡의 대부분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1840년을 '가곡의 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슈만은 "다른 음악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나이팅게일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노래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나 대학 철학박사 학위]

결혼에 도움이 될 공적 지위를 얻기 위해 셰익스피어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는 그의 다재다능함과 클라라와의 결혼에 대한 절실함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공적 지위를 얻는 것이 결혼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슈만은 1840년 2월 셰익스피어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논문을 통해 예나 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랜 투쟁 끝, 마침내 결혼 허가]

비크의 끈질긴 방해와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마침내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을 허가하는 판결을 내립니다.

비크는 클라라를 집에서 내쫓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등 극단적인 행동으로 웃음거리가 됩니다.

소송을 알고 격분한 비크는 클라라가 피아노 치는 것을 금지하고 집에서 내쫓았으며, 클라라는 베를린에 있던 친모를 따라갔습니다. 비크는 클라라의 상속권 정지 등으로 맞서려 했지만 법정에서는 유효한 혐의를 제기하지 못해 재판장에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거리에서 슈만의 뺨을 때리기도 하는 등 극단적 행동은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자신의 형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비크는 1840년 1월 클라라의 동요를 노리고 레만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슈만에 대한 온갖 비난을 늘어놓은 편지를 써 베를린에서 열린 클라라의 리사이틀 당일에 전달했으나, 클라라 동생 앨빈의 귀띔으로 클라라는 사전에 경계할 수 있었습니다. 슈만은 이 일로 비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1840년 8월 12일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을 허가하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클라라와의 로맨틱한 결혼]

길고 신랄했던 법적 투쟁 끝에, 슈만은 라이프치히 근교 교회에서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다음날은 클라라의 21번째 생일이었고, 프란츠 리스트도 참석하며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했습니다.

라이프치히 근교 쇠넨펠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다음날인 9월 13일은 클라라의 21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이 결혼식에는 4월에 막 알게 된 사이인 프란츠 리스트도 참석했습니다.

1841

['교향곡의 해', 거장으로 발돋움]

결혼 후 클라라와 바흐, 베토벤의 작품을 연구하며 깊이를 더한 그는, 자신의 첫 교향곡인 《교향곡 1번 '봄'》을 완성합니다. 이 곡의 성공은 그를 피아노곡과 가곡 작곡가를 넘어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이 해는 '교향곡의 해'로 불립니다.

결혼 후 슈만은 클라라와 함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구했고, 이후에는 베토벤 등 빈 고전파의 현악 4중주곡을 공부했습니다. 1841년 《교향곡 1번 (슈만)》 Op. 38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교향곡은 슈만의 라이프치히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 곡의 성공은 슈만의 창작활동에서 피아노곡과 가곡에서 교향곡 작가로의 탈피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슈만은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Op. 52),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피아노 협주곡 1악장), 라단조 교향곡(교향곡 4번) 등 오케스트라 작품에 몰두했습니다. 같은 해, 전년도 명예훼손 고소로 비크는 2주간 금고형에 처해졌습니다.

1842

['실내악곡의 해', 장르를 넓히다]

프란츠 리스트의 권유로 실내악곡 분야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3곡의 현악 4중주곡, 피아노 5중주곡, 피아노 4중주곡 등 대작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완성하며 '실내악곡의 해'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그의 창조성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듬해인 1842년 슈만은 실내악곡 분야에 발을 들여놓아 3곡의 현악 4중주곡(가단조, 마장조, 가장조의 Op. 41), 피아노 5중주곡(Op. 44), 피아노 4중주곡(Op. 47) 등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에는 프란츠 리스트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리스트는 1839년 6월 5일자 편지에서 슈만에게 실내악곡 작곡을 권유했었습니다. 이에 따라 1841년을 '교향곡의 해', 1842년을 '실내악곡의 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842년 슈만은 3편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는 데 5주가 채 걸리지 않았고, 피아노 5중주곡은 6일간, 피아노 4중주곡은 5일 만에 쓰는 등 매우 빠른 속도로 곡을 완성했습니다.

1850

[브람스와의 만남과 장르 확장]

라이프니츠 음악원 강사, 드레스덴 합창단 지휘자로 활약하며 활동의 폭을 넓힙니다.

이 시기, 훗날 위대한 작곡가가 될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나 평생의 음악적 교류를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 활동은 오페라, 극음악, 종교음악으로 더욱 확장됩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라이프니츠 음악원에서 강사, 드레스덴 합창단 지휘자로 활약했습니다. 이 무렵 요하네스 브람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드레스덴 시기와 뒤셀도르프 시기를 통해서는 오페라 《제노베바》(Op. 81), 극부수음악인 《만프레드》(Op. 115), 《괴테의 파우스트의 정경》(WoO 3)를 작곡하는 등 더욱 장르를 확장했습니다. 만년에는 《미사곡》(Op. 147)이나 《레퀴엠》(Op. 148) 등의 종교음악도 작곡했습니다.

1854

[악화되는 병세, 마지막 투쟁]

1833년부터 간헐적으로 시작된 정신병적 증상이 극도로 악화되어 환청, 환각, 망상에 시달리다 라인강에 투신하는 시도까지 합니다.

결국 자발적으로 엔데니히의 정신병동에 입원하여 마지막 2년을 보내게 됩니다.

1833년부터 간헐적으로 정신병적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1840년대에 이미 환청 등 환각 증상과 망상을 나타냈습니다. 증상은 더욱 심해져 1854년에는 라인강에 투신하였습니다. 이후 현재 본에 있는 엔데니히의 정신병동에 자발적으로 입원하였습니다. 정신병적인 우울증으로 진단받은 그는 회복하지 못하고, 2년 후 46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요양원에는 피아노와 오선보, 필기도구가 비치되어 작곡 활동도 가능했습니다.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치오' 피아노 반주를 보필하고 요아힘의 오페라 '하인리히 4세' 서곡 피아노 편곡을 했습니다. 1854년 8월 14일 브람스가 병문안 왔을 때, 슈만은 갑자기 와인을 독이 들어있다며 바닥에 쏟아버리기도 했습니다. 1854년 11월 27일자 브람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브람스가 작곡한 슈만의 주제에 따른 변주곡(Op. 9)에 대한 비평이 실려 있으며 여기에는 정신착란을 떠올리게 할만한 대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1856

[클라라와의 마지막 재회]

투병 2년 만에, 아내가 위급함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엔데니히 요양원에 도착합니다.

쇠약해진 슈만은 그녀를 알아보고 비상한 노력으로 팔을 뻗어 안았으며, 클라라는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포옹"으로 기록했습니다.

이튿날 와인을 쏟자 클라라의 손가락을 핥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을 남겼습니다.

리하르츠 박사로부터 위급함을 알리는 전보를 받은 클라라는, 7월 27일 엔데니히에 도착해 2년 만에 슈만과 재회했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그것은 저녁 6시에서 7시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알아채곤 미소짓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 이 무렵 그는 사지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 그의 팔을 나에게 돌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전 세계의 어떤 보물을 바치더라도, 이 포옹을 다시 받을 수는 없겠죠"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음 날인 28일 슈만의 손발 경련이 이어지자 클라라는 슈만에게 와인을 마시게 했습니다. 와인 일부가 클라라의 손 위로 쏟아지자 슈만은 기쁜 듯이 클라라의 손가락을 핥았습니다.

[낭만주의 거장의 죽음]

오후 4시, 46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의..., 나는 알아"였습니다.

브람스 등 절친한 음악 동료들이 그의 관을 맡아 본에 매장되었고, 그는 낭만주의 음악사에 영원히 기억될 거장으로 남았습니다.

오후 4시 슈만은 46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슈만의 마지막 말은 meine..., ich kenne(나의..., 나는 알아)였습니다. 시신은 이틀 후에 본에서 매장되었습니다. 브람스, 요아힘, 디트리히가 관을 맡았고 그릴파르처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클라라가 장례식을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알려줬기 때문에 클라라와 힐러 외에 참석한 사람은 6년 전 슈만 부부가 뒤셀도르프에 도착했을 때 환영의 세레나데를 연주했던 악단 콩코르디아 게젤샤프트의 멤버들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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