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고대 문명, 제국,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7:35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를 아우르며 1 500년 가까이 이어진 대제국.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탄생 팍스 로마나 시대를 구가하며 서구 문명의 토대를 다졌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했으나 동로마는 1453년까지 천년을 더 이어지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BC 6C
기원전 6세기경, 로마는 왕정을 몰아내고 시민들의 대표들이 통치하는 공화정 체제를 수립한다. 이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BC 1C
기원전 44년 즈음, 독재관으로 취임하여 1인 독재 구조를 굳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화파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권력 투쟁의 불씨가 된다.
[악티움 해전 승리]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며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벌어진 권력 다툼 속에서,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로마 제국의 식량 확보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새로운 대양 교역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된다.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에 감찰관에 선출된다. 그는 군사, 재정, 정치 전반에 걸친 대규모 개혁을 통해 내전으로 불안정해진 로마를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로마 제국 건국 및 아우구스투스 즉위]
로마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며, 그가 사실상 황제로 즉위하여 로마 제국이 시작된다.
기원전 27년,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하며 공화정을 폐지하고 제정을 시작, 이로써 로마 제국의 장대한 역사가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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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사망 및 티베리우스 즉위]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그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두 번째 황제로 즉위한다.
로마 제국을 창건하고 약 40년간 통치하며 '팍스 로마나'의 기틀을 다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사망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양자로 지명된 티베리우스가 자동으로 제위에 올라 제국을 이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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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사망 및 칼리굴라 즉위]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친척 가이우스 카이사르, 즉 칼리굴라가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다.
변방 보호와 행정 조직 강화를 이룩했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한다. 이후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티베리우스와 달리,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그의 친척인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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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암살 및 클라우디우스 즉위]
과대망상적인 폭군이 된 칼리굴라가 암살당하고,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다음 황제가 되어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진척시킨다.
원로원을 모욕하고 낭비를 일삼으며 폭군으로 변모했던 칼리굴라가 결국 암살당한다. 그의 뒤를 이어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어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키고 브리타니아를 합병하는 등 대외 팽창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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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중앙집권화와 대외 팽창에 기여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사망한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의붓아들인 네로가 불과 16세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며 새로운 시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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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살해하고 로마 대화재를 일으킨 죄를 기독교 신도들에게 돌려 박해했던 네로 황제는 결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직면한다.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그는 자살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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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황제 사망 후 로마는 극심한 내란기에 접어든다. 이 내란의 마지막 승리자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며 플라비우스 왕조를 수립한다. 그는 약해진 변경 수비를 강화하고 재정을 튼튼히 하며 제국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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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사망 및 티투스 즉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사망 후, 그의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많은 인기를 누리지만 짧은 재위 기간을 보낸다.
로마를 재건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티투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티투스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인기를 누리며 성공적인 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기간이 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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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를 누렸던 티투스 황제 사망 후,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불만을 샀으며,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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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암살 및 네르바 즉위]
고압적인 통치로 불만을 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당하며 플라비우스 왕조가 막을 내리고,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전제 정치로 인한 불만 때문에 암살당하며 플라비우스 왕조가 종말을 맞이한다. 이후 군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되지만, 그는 후계자 부재와 군사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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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황제 즉위]
네르바의 양자로 로마 속주 출신 첫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올라 법규를 준수하고 제국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며 영토를 확장한다.
네르바 황제가 군대의 인망을 얻기 위해 군인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운다. 로마 속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는 인민과 군대 모두에게 인기를 얻으며 제국의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다키아와 동쪽 변경을 평정하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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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사망 및 하드리아누스 즉위]
로마 제국이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룩한 후 그가 사망하고,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하여 영토 팽창 대신 평화를 추구한다.
전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며 최대 판도를 이룩했던 트라야누스 황제가 중동의 파르티아 왕국을 정벌하다 사망한다.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영토 팽창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변경 수비 강화에 치중하는 정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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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양자로 삼음]
아들이 없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이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다.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36년에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다. 안토니누스 또한 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아 하드리아누스의 뜻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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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사망 및 안토니누스 피우스 즉위]
하드리아누스 황제 사망 후, 양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제위에 올라 로마 제국이 조용한 번영을 누린다.
영토 팽창보다 평화를 추구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치세에는 로마 제국이 세계주의의 성격을 띠면서 조용한 번영을 누린다. 그러나 동시에 변경 지역의 잦은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위험스러운 징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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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황제 즉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사망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사망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한다. 이는 하드리아누스의 뜻을 따른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치세에는 이민족의 강력한 침략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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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교역로를 따라 퍼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토니누스 역병(두창이라는 것이 통설)이 165년에 로마 제국을 덮쳐 15년간 지속된다. 이 역병으로 특정 구역에서 인구가 최대 70~90% 감소하고 농업 생산성과 경제 활동이 바닥을 치는 등 제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목숨까지 앗아갔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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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및 콤모두스 즉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게르만족 진압 도중 사망하고,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황제가 되어 제국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이민족 침략에 시달리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게르만족을 진압하는 도중에 사망한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아들 콤모두스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우며 쾌락만 추구하여 제국은 점차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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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에 즉위한 후 제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콤모두스 황제가 192년 12월 31일 암살당한다. 이 사건으로 로마 제국은 다시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지며 새로운 내란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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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즉위]
콤모두스 암살 후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강 주둔군이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로 즉위하여 군대 기반의 통치를 강화한다.
콤모두스 암살 후 벌어진 내란 속에서 도나우 강 주둔군이 19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추대한다.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 기반인 군대를 우대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는 등 군대를 특권 계급으로 만들어 황제권의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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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내란 최종 승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콤모두스 암살 후 벌어진 내란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며 제국의 안정을 찾는다.
192년 콤모두스 암살 이후 벌어진 로마 제국의 내란 속에서, 도나우 강 주둔군에 의해 추대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197년에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그는 군대에 의존한 황제권을 확립하고 세습을 통해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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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망 및 카라칼라 즉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사망 후, 장남 카라칼라가 황제가 되어 재정 궁핍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린다.
군대 기반의 강력한 통치를 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한 뒤, 그의 큰아들 카라칼라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된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은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이션을 낳고,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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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라 황제 암살 및 마크리누스 즉위]
동방 정벌 중이던 카라칼라 황제가 부하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가 뒤를 잇는다.
재정 궁핍에 시달리던 카라칼라 황제가 동방 정벌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이후 마크리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218
[마크리누스 살해 및 엘라가발루스 즉위]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마크리누스 황제가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살해당하고, 엘라가발루스가 황제가 된다.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마크리누스 황제가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살해당한다. 그 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다.
222
[엘라가발루스 살해 및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즉위]
낯선 신 숭배와 지나친 낭비로 로마인에게 미움을 샀던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살해당하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된다.
14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일삼아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한다. 그의 뒤를 이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235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살해 및 3세기의 위기 시작]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살해당하며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고, 로마 제국은 군사 황제가 난립하는 '3세기의 위기'에 돌입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235년에 살해당하면서 세베루스 왕조의 명맥이 끊긴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235년부터 284년까지 25명의 군사 황제가 난립하고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겪는 '3세기의 위기'로 접어든다.
251
[키프리아누스 역병 발생]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발생한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15년간 지속되며 제국의 인구를 크게 감소시키고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준다.
251년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키프리아누스 역병(출혈열)이 15년 동안 로마 제국을 휩쓴다. 이 역병으로 인해 도기 생산량 급감, 교역 위축 등 경제 활동이 크게 줄어들며, 지중해 주변 인구는 165년부터 400년까지 3분의 1이 감소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284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및 3세기의 위기 종식]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며 '3세기의 위기'가 막을 내리고,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인 사두정치를 준비한다.
235년부터 로마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3세기의 위기'가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린다. 그는 거대한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사두정치 체제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285
[막시미아누스 부제 임명]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아 동서 분할 통치를 시작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285년에 막시미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 동방을,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로 권력을 분담한다.
286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부제 막시미아누스를 이듬해인 286년에 정제로 승격시킨다. 이로써 두 명의 정제가 제국의 동서 통치를 맡는 체제의 기반이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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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정치(테트라키아) 체제 수립]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테트라키아'(사두정치) 체제를 수립하며 제국 통치 효율을 극대화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286년에 두 명의 정제를 둔 데 이어, 293년에는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총 네 명의 통치자가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테트라키아'(사두정치) 체제를 수립한다. 이는 방대한 제국을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전제정의 일환이었다.
297
297년, 황제 갈레리우스는 싱가라(지금의 이라크 신자르)와 니시비스(지금의 터키 누시이빈), 아미다 등의 도시와 티그리스강 동쪽의 로마 영토 전부를 확보한다. 이 지역은 훗날 평화조약으로 페르시아에 양도되기도 한다.
313
[밀라노 칙령 반포 및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고, 제국 내 기독교의 빠른 확산에 기여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한다. 이는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이전까지 박해받던 기독교가 제국 내에서 빠르게 세를 불리고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321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1년에 기독교의 성일인 일요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재판관과 시민, 기술자들이 이날 쉬어야 한다는 일요일 휴업령을 반포한다. 이는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330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0년에 비잔티움 지역에 '새 로마'를 건설하고 그곳으로 천도한다. 이 도시는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되며 동로마 제국의 심장이자 천 년 역사의 중심지가 된다.
337
[콘스탄티누스 사망 및 콘스탄티노플 개명]
콘스탄티누스 1세 사망 후, 그가 건설한 새로운 수도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된다.
로마 제국의 종교와 수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뒤, 그가 건설했던 새로운 수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상징적인 도시가 된다.
361
[율리아누스 황제 즉위 및 이교 부흥 시도]
율리아누스가 황위에 올라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박해하고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기반한 이교 부흥을 시도한다.
361년, 율리아누스가 황위에 오른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책에 반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박해하고,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를 중심으로 한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시도하며 제국의 종교적 방향을 바꾸려 한다.
363
[율리아누스 사망 및 요비아누스 즉위, 페르시아와 평화조약]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하고, 요비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군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와 전쟁을 벌이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363년에 사망한다. 이후 군대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고, 그는 로마군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티그리스강 동쪽의 영토를 양도한다.
364
[요비아누스 사망 및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 공동 황제 즉위]
요비아누스 황제 사망 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정제로 추대되고 그의 동생 발렌스가 공동 황제가 되어 제국을 함께 통치한다.
기독교의 권한을 회복시켜 주었던 요비아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정제로 추대된다. 그는 가까운 친척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삼아 제국 동방과 서방을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한다.
365
[프로코피우스의 반란]
장군 프로코피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가 공동 황제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군 프로코피우스는 365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제국 통치에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367
[프로코피우스 반란 진압 및 그라티아누스 공동 황제 추대]
발렌스 황제가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8세의 그라티아누스가 제국 서부의 공동 황제로 추대된다.
365년에 일어났던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이 367년 발렌스 황제에 의해 진압된다. 같은 해,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그의 8살 아들 그라티아누스가 제국 서부의 공동 황제로 추대되며 미래의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긴다.
374
[발렌티니아누스 1세 사망 및 그라티아누스 단독 황제]
게르만 족에 대해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사망하고,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단독 황제가 된다.
게르만 족에 대해 강경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374년에 사망한다. 이로써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단독으로 황제가 되지만, 군대는 그의 어린 이복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킨다.
376
[서고트족 트라키아 이주 및 반란]
훈족의 압박을 받던 서고트족이 발렌스 황제에게 트라키아 이주를 청원하고 승인을 받지만, 총독의 탄압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376년, 훈족에게 쫓기던 서고트족이 발렌스 황제에게 트라키아로의 이주를 청원하여 승인을 받는다. 그러나 트라키아 총독 루피키누스가 황제의 명령을 거절하고 서고트족을 탄압하자, 이에 반기를 든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패배한다.
378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대패]
발칸 반도로 진군한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완패하고 전사하며, 로마군 3분의 2가 괴멸되는 대재앙을 맞는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는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에서 고트족과 전면전을 벌이지만, 적을 과소 평가하고 서방 증원군 없이 전투에 임해 로마군이 완패한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고 로마군 3분의 2가 괴멸되는 등 제국의 통치력에 막대한 타격을 준다.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379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이 대패하고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자,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379년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동부의 황제로 지명한다.
383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그라티아누스 살해]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타니아에서 황제로 추대되어 갈리아로 건너와 도망치려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살해한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타니아 주둔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갈리아로 건너와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게 하고 도망하려던 그를 살해한다. 이로써 12살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만이 서방의 정제로 남게 된다.
388
[테오도시우스 1세, 막시무스 진압]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며 제국의 안정화를 꾀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88년 마그누스 막시무스에 대한 원정을 개시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를 사형에 처한다. 이는 제국 서방의 불안정 요소를 제거하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된다.
392
[기독교 국교 선포]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가 살해당하고 에우게니우스가 황제로 지명되자,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가 살해당하고 아르보가스테스가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지명한다. 그러나 동방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같은 해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하여 이교도를 압박하고 신전령을 몰수한다. 이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전환점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393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3년에 이교도 문화의 상징이었던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시킨다. 이는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395
395년, 로마 제국 전역을 통치했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사망한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각각 동방과 서방 제국을 물려주어,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분할된다.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이다.
476
395년 동서로 분할된 이후 이민족의 침입으로 급격히 불안정해지던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멸망한다. 이 사건은 서양 고대사의 종결이자 중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480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장악한 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은 480년에 공식적으로 서방 황제직을 폐지한다. 이로써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에 대한 제국적 통치는 완전히 막을 내린다.
500
[동로마 제국의 재건과 영토 회복]
서로마 제국 붕괴 후,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동로마 제국이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에 옛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며 번영한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할 무렵인 5세기에,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고 안정적이었던 동로마 제국은 파괴된 제국을 복구한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에는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일리리아를, 반달족으로부터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으로부터 히스파니아를 빼앗아 옛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며 힘을 과시한다.
610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화 가속]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제국 내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하고 군사 용어를 그리스어로 대체하는 정책을 펼치며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화가 가속화된다.
61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로마 제국에서는 고대의 라틴적인 모습이 점차 사라진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제국 내에서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하고, 특히 군사 용어를 그리스어로 대체하는 정책을 펼치며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이 점차 그리스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로 인해 후세 역사가들은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으로 부르게 된다.
1204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명맥이 끊기고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는 대위기를 맞는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은 일시적으로 역사가 단절되고, '라틴 제국'을 위시한 가톨릭 세력의 침공으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며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다.
1261
[콘스탄티노플 수복]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지만, 로마 제국의 영향력과 위상은 이전처럼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던 콘스탄티노플을 1261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고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회복이었으며,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은 이전의 영향력과 위상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다.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 및 로마 제국 최종 멸망]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하고, 로마 제국의 천년 역사가 막을 내린다.
1204년 십자군에게 함락된 후 약해진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이로써 기원전 27년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장대한 역사가 천여 년 만에 완전히 막을 내린다. 콘스탄티노플 정복자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라 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