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하르트 오일러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공학자, 논리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09- 16:13:21
- 18세기 가장 위대한 수학자이자 과학 혁명을 이끈 거인. - 총 92권의 전집과 866편 논문 역사상 가장 많은 연구 업적을 남긴 기록 보유. - 함수 기호 f(x)를 최초 도입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 오일러 항등식을 구안. - 미적분학 정수론 그래프 이론 등 수학 전반과 물리학에 지대한 영향. - 양쪽 눈의 시력을 잃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집념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업적을 달성. - 자신의 이름을 딴 상수가 두 개인 유일한 수학자.
1707
[위대한 수학자의 탄생]
스위스 바젤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리헨에서 보냈으며, 당대 최고의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던 아버지 덕분에 베르누이의 영향을 받으며 수학적 재능을 키웠다.
1720
[바젤 대학교 입학]
13세의 어린 나이에 바젤 대학교에 입학하여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으며 수학적 역량을 키웠으나,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1723
[철학 석사 학위 취득]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바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미 이때부터 그의 천재성은 널리 알려졌다.
1726
[음향학 박사 학위 취득]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참가하여 2등을 차지했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이 상을 무려 12번이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727
[러시아 학계 진출]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의 추천으로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생리학 교수직을 제안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곧 수학부 교수로 승진하며 다니엘 베르누이와 활발한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1731
[물리학 정교수 임명]
표트르 2세 사망 후 아카데미 여건이 개선되면서 물리학 정교수로 승진했다.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733
[수학학부장 취임]
아카데미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자, 그를 대신하여 수학학부의 장을 맡아 연구와 학문 발전을 이끌었다.
1734
[함수 기호 f(x) 최초 사용]
수학 역사상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함수 기호 f(x)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는 미적분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현대 수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카타리나 젤과 결혼]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 젤과 결혼하여 네바강 옆에 집을 장만했다.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다섯 명만이 살아남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735
[난제 '바젤 문제' 해결]
오랫동안 수학자들을 괴롭혔던 난제 '바젤 문제'를 멱급수를 이용하여 해결하며 해석학 분야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741년에는 더욱 정교한 증명을 제시하여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738
[오른쪽 눈 시력 상실]
고열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3년 후, 그의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며 시련을 극복하는 놀라운 집념을 보여주었다.
1741
[프로이센 아카데미로 이적]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으로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25년간 약 380편의 논문을 쓰며 활발히 활동했다.
1752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 발표]
다면체의 꼭짓점, 모서리, 면의 개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V-E+F=2 공식을 발견했다.
이는 현대 위상수학의 시초가 되는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수학적 사고의 지평을 넓혔다.
1755
[스웨덴 한림원 회원 선출]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명성이 높아져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그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학자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1760
['독일 공주에게 보내는 편지' 출간]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인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공주를 가르치며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은 후에 묶여 '독일 공주에게 보내는 오일러의 편지'로 출간되었고, 그의 사상과 종교적 신념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1766
[왼쪽 눈 시력 상실]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실패, 결국 양쪽 눈 모두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키클롭스'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암산과 암기 실력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1772
[인류 최대 소수 증명 (당시)]
놀랍게도 2^{31} - 1이 메르센 소수임을 증명했다.
이 수는 1867년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큰 소수'로 기록되어,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역사적인 업적으로 남았다.
1775
[맹인 천재의 경이로운 집필]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조수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775년에는 매주 평균 한 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며 경이로운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집념의 증거였다.
1783
[계산과 삶을 멈추다]
76세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도르세는 그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 "그는 계산하는 것과 사는 것을 멈췄다"고 묘사하며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렸다.
1957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이장]
오일러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유해는 바실례프스키섬의 스몰렌스크 루터회 공동묘지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업적은 후세에도 길이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