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치오
르네상스 예술가, 화가, 이탈리아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6:52
-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어깨를 나란히 함. - 섬세한 조형미와 공간 표현으로 독자적 예술 세계 구축 대중의 흥미를 사로잡음. - <아테네 학당> 등 수많은 걸작으로 서양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 - 37세 요절에도 불구하고 고전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 천재 예술가.
1483
[르네상스 천재의 탄생]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난 라파엘로 산치오.
그의 탄생은 르네상스 미술사에 위대한 한 획을 그을 천재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조형과 감정, 빛, 공간 표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이며 '천재'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움브리아 우르비노 출생. 아버지는 화가이자 지성인인 조반니 산티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은 후 사제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다 동향인 T.비테와 움브리아파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으며 그림을 연마했다.
1500
[17세 천재, 데뷔작 참여]
불과 17세의 나이에 페루지노가 완성한 페루지아 어음교환소 벽화 중 '우의상' 작업에 조수로 참여하며 그의 천재성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른 나이부터 그의 작품에서는 청순한 색채와 음악적인 리듬감이 돋보였고, 스승의 기법을 능가하는 신선미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17세였던 라파엘로는 P.페루지노가 완성한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의 벽화 중 우의상(寓意像)을 조수로서 그렸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콘데미술관의 《삼미신》, 내셔널갤러리의 《기사의 꿈》 등이 있다. 페루지노풍의 최고 기법을 익히며 《성모대관》, 《그리스도의 책형》,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공간 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는 그의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였다.
1504
[르네상스 본거지로 이주]
당시 예술의 중심지이자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활동하던 피렌체로 이주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선배 거장들의 영향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키고, 수많은 성모자상 등 걸작을 쏟아내며 '피렌체파' 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어 F.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 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웠다. 페루지노의 영향을 벗어나 피렌체파 화풍으로 발전했으며, 《도니 부처상》 및 여러 초상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 움직임까지 모방했으나, 선인의 기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며 독자성을 나타냈다.
1508
[교황의 부름, 로마 시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한 라파엘로.
이곳에서 그는 역사적인 명작 <아테네 학당>을 포함한 바티칸 궁전 스탄체(서명실)의 프레스코 연작을 시작하며 로마 시대의 위대한 예술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예술은 고전적 격조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 고대 유적과 고전 연구에 몰두하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웠다. 공교한 율동적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교황 측근의 의뢰를 받아 《어느 추기경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 등 걸작을 남겼다.
1509
[불멸의 걸작, 아테네 학당]
바티칸궁전 내 스탄체 서명실의 벽화를 그리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환상적인 상상화, <아테네 학당>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그의 탁월한 솜씨와 고전적인 격조를 유감없이 발휘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라파엘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천장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 등을 그렸다. 로마의 고대 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쓰는 한편, 완성 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공교한 율동적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1511
[새로운 색채, 갈라테아]
유명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 벽화 의뢰를 받아 대표작 <갈라테아의 승리>를 제작합니다.
이 시기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온보에게 채화법을 배우며, 그의 그림에 빛과 그늘을 대치시킨 명암 효과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등 새로운 화풍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작업 중이던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온보와 알게 되어 그의 채화법(彩畵法)을 배웠다. 이 색채묘법의 변화는 1511~1514년 제작한 바티칸궁전의 스탄차 데 엘리오도로의 벽화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성 베드로의 해방》, 《로마에서 격퇴당하는 아틸라》 등에 나타나는데, 빛과 그늘을 양괴적으로 대치시킨 명암효과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띠었다.
1514
[건축 총책임자 임명]
화가로서뿐 아니라 건축 분야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 시기 바티칸 궁전의 벽화 장식에도 종사하며 고대 유적 발굴의 감독관까지 겸임하는 등, 그의 예술적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동향 선배인 B.L.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베드로대성당 건조에 관계하였고, 1514~1517년 바티칸궁전의 스탄차델 인첸디오의 벽화장식에도 종사하였으며, 1515년부터는 고대유적 발굴의 감독관이 되었다. 《산시스토의 성모》, 《산타 체칠리아》 등 걸작을 제작했다. 키지예배당 설계와 장식, 바티칸궁전 로지에 장식, 빌라 마다마 건축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518
[만년의 초상화 걸작]
만년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상화 실력은 여전했습니다.
<레오 10세의 초상>에서 군상(群像)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며 뛰어난 초상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증명합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통찰력이 여전히 빛나던 시기의 대표작입니다.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궁정화가로서 일에 쫓기던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차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群像)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1520
[37세 요절, 위대한 유산]
그의 37번째 생일, 라파엘로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교황 직위까지 고려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국가장을 치르게 했죠.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걸작 <그리스도의 변용>은 바로크 양식의 싹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남아 그의 위대한 유산이 됩니다.
교황청의 건축과 회화, 장식 등 미술 분야 감독 책임을 맡고 있던 라파엘로는 37세의 생일에 갑자기 요절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애도하며 국가장을 치르게 했다. 현재 로마의 판테온에 묻혀있다. 만년에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을 완성하지 못한 채 요절했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 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 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의 영향은 지대하여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