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 사건
간첩 조작 사건, 공안 사건, 인권 침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6:06
*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 * 유럽 유학생 교민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접촉 간첩 교육을 받았다는 주장. *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노 등 예술계 거장 다수 연루. * 서독에서의 강제 납치 송환으로 외교 문제 유발. * 2006년 국정원 진실위 사건의 확대·과장 및 불법 행위 인정 정부 사과 권고. * 대한민국 현대사 속 국가 권력 남용과 인권 침해의 대표적 사례.
1957
[북한, 동베를린 거점화]
북한은 1957년부터 동·서베를린 통행이 용이한 동베를린을 거점화하여 대남 활동 실무자를 파견하고 한국인들을 접촉, 평화통일 방안을 선전하며 북한 방문을 권유했다.
이는 이후 한국인 유학생 및 교민들이 동베를린을 왕래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1966
[간호사 국제결혼, 감시 시작]
서독 파견 간호원 정완순 씨가 유고슬라비아 국적 청년과 결혼하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자, 한국 정부는 재유럽 한국인들의 공산권 출입 현황에 대한 점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동백림 사건 수사의 숨겨진 계기 중 하나가 된다.
1967
[이기양 기자 체코 실종]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이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된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취재 중 실종된다.
이 사건은 이후 중앙정보부가 재유럽 한국인들의 행적을 주시하게 되는 중요한 촉발점이 된다.
[중정, 기자 실종 확인]
중앙정보부는 한국여자농구선수단 감독을 통해 이기양 기자의 실종 사실을 확인하고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 기자가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프라하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임석진 교수, 박 대통령 면담]
서독 유학파 교수 임석진이 이기양 기자 실종 소식에 북한의 납치를 확신하고 자신의 대북 접촉 전력 노출을 우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면담해 유럽 유학생들의 대북 접촉 상황을 진술했다.
박 대통령은 임 교수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중정 수사 협조를 지시했다.
임석진 교수는 홍세표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받았고, 5월 17일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직접 대북 접촉 상황을 진술했다. 대통령은 "신변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 중정 수사에 협조해라"고 언급하며 서면 제출을 요구했다.
[임석진 교수, 진술서 제출]
임석진 교수는 원고지 200매 분량의 글을 작성하여 홍세표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 진술서는 중앙정보부의 일명 'V-318' 수사의 결정적인 단초가 된다.
[중정, 'V-318' 공작 수립]
중앙정보부는 임석진 교수 조사를 바탕으로 대공 혐의자 40여 명의 명단을 파악하고, 국내외 관련자 40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수사 계획인 'V-318' 공작을 수립했다.
[국내 관계자 연행 시작]
중앙정보부는 'V-318' 공작 계획에 따라 국내에 거주하던 사건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연행을 시작했다.
이는 동백림 사건이 본격적인 수사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해외 체포 작전 수립]
중앙정보부는 해외 혐의자 23명을 체포하여 국내로 강제 연행하기 위한 비밀 작전인 'GK-6717 공작계획', 일명 'GK-공작'을 수립했다.
이는 외교적 파장을 예고하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합동수사본부 발족]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검찰, 경찰, 군 방첩대까지 총동원된 대규모 합동수사본부가 발족하며 동백림 사건의 수사 규모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
[해외 혐의자 강제 소환]
중앙정보부는 'GK-공작'에 따라 독일 등 해외에 거주하던 혐의자들에 대한 강제 소환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납치와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동백림 사건 공식 발표]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사건"을 공식 발표하며,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 체류 중인 유학생과 교민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 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 발표는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심 유죄 판결]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총 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특히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예술계와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68
[대법원, 일부 파기환송]
대법원 형사부는 상고심에서 피고인들의 간첩죄 및 잠입죄 적용에 법률적 오류와 증거 미흡을 지적하며, 사형 선고를 받은 정규명, 정하용, 임석훈 등 12명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
이는 재판 과정의 문제점을 시사하는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해외 유학생 명단이나 남한의 막연한 실태를 북에 제보한 것은 구체적인 군사기밀을 제보한 것이 아니기에 적을 이롭게 했다는 반공법 제4조 제1항을 적용해야 하나 국가보안법 군사목적수행과 형법 간첩죄를 적용한 것은 잘못이며 북의 지령을 받았더라도 실행의사와 목적없이 귀국했다면 잠입죄 적용할 수 없음에도 증거없이 사실을 인정한 것은 위법하고 임석훈이 법률상 자수는 아니더라도 범죄의 고백과 수사상 협조 등으로 보아 준자수에 해당됨에도 사형선고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반면 이응로 등 9명에 대한 상고는 기각했다.
[대법관 사표 제출]
동백림 사건 상고심을 담당하던 최윤모 대법원 판사가 "시기적으로 적당치 않은 느낌이 있으나 이 사건 판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히며 사표를 제출했다.
같은 날 김병룡 부장판사도 사표를 제출해, 사건의 복잡한 배경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1969
[대법원, 사형 확정 판결]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을 거쳐 열린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정하용과 정규명에게는 사형이, 조영수에게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이 판결은 많은 인물의 삶을 뒤흔들었으며, 사건의 비극성을 더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이 정당하다고 판단하여 정하용(36세)과 정규명(41세)에게 사형을, 조영수(36세)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어준, 임석훈, 천병희, 강빈구, 윤이상 등은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70
[광복절 특사, 전원 석방]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와의 외교 마찰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동백림 사건 관계자 전원에 대한 잔형 집행이 면제되었다.
이로써 사형수였던 정규명, 정하용을 포함한 모든 연루자들이 석방되었다.
이는 인권 유린과 외교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2004
[국정원 진실위 출범]
국가정보원과 관련된 과거 의혹 사건 조사를 위한 민·관 합동 기구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진실위)'가 출범했다.
이는 동백림 사건의 진실 규명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2005
[진실위, 동백림 사건 조사]
국정원 진실위는 동백림 사건을 7건의 1차 조사대상 사건 중 하나로 선정하고, 담당 조사위원 및 조사관을 배치하며 본격적인 진실 규명 작업에 착수했다.
2006
[진실위, 사건 조작 인정]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이 단순 대북 접촉 및 동조 행위를 국가보안법과 간첩죄로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 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위원회는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에 대해 정부의 사과를 권고하며, 이 사건이 사실상 조작된 것임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