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계몽주의 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2:13:34
데이비드 흄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입니다. 그는 경험주의를 발전시키고 회의론적 방법으로 인과율과 종교 등 기존 관념에 도전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칸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양 철학사의 거장이자 인간 본성과 사회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 선구자입니다.
1711
[데이비드 흄 탄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북쪽 천사이드에서 변호사 존 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흄은 후일 성을 Home에서 Hume으로 개칭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1723
[에든버러대 조기 입학]
12살의 어린 나이에 에든버러 대학교에 조기 입학했습니다.
법학 대신 몰래 철학을 탐닉하며 학문의 길로 들어섰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학문에만 전념했습니다.
1729
[철학적 각성 및 신경쇠약]
18세에 철학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하며 깊은 학문적 몰두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십대 시절을 오직 읽고 쓰는 데 바치게 했고, 결국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치열한 지적 여정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734
[프랑스에서 저술 시작]
브리스톨에서 잠시 사무원 생활을 한 후, 프랑스 앙주의 라플레체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데카르트가 수학했던 예수회 학교를 자주 방문하며, 그의 첫 철학 저서 집필에 매진했습니다.
1739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출판]
4년여의 집필 끝에 26세의 나이로 첫 철학 저서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완성하고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당대에는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1744
[교수직 임용 좌절]
도덕과 정치에 관한 논문으로 에든버러 대학교 교수직에 응시했으나, 당시 총장이 흄을 무신론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임용에 실패했습니다.
이는 당대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철학적 입장이 얼마나 과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1745
[『영국사』 집필 시작]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한창이던 시기, 애너데일 후작부인의 가정교사로 지내며 대작 『영국사』의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이 방대한 작업은 무려 15년간 이어졌습니다.
1748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출판]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핵심 사상을 대중에게 보다 쉽고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입문서입니다.
1751
[『도덕 원리론 탐구』 출판]
자신의 윤리 철학을 집대성한 『도덕 원리론 탐구』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도덕을 감정의 문제로 보고, '동정'을 도덕의 심리적 기초로 삼아 후대 공리주의 도덕론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1752
[에든버러 도서관장 역임]
신학적 문제로 글래스고 대학교 철학 수석 교수직을 얻는 데 또 다시 실패했습니다.
이후 에든버러로 돌아와 도서관장을 지내며 학문 활동을 이어갔고, 이는 『영국사』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754
[『영국사』 완간]
15년에 걸친 대장정 끝에 대작 『영국사』를 총 6권으로 완간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회의론과 온건한 보수주의적 시각을 담고 있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757
[『종교의 자연사』 출판]
종교에 대한 그의 심도 깊은 성찰을 담은 『종교의 자연사』와 『네 편의 논문집』을 출판했습니다.
특히 『종교의 자연사』는 당대 종교 비판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저작으로 평가받습니다.
1763
[주 프랑스 대사 비서 역임]
헤트포드 경의 비서로 파리에서 체류하며 루소와 교류하는 등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곳에서 말년의 대부분을 보내며 유럽 지성계와 활발히 소통했습니다.
1776
[데이비드 흄 사망]
65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하여 에든버러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종교 관련 저작은 사망 후에야 출간될 정도로 당대 사회의 규제가 심했으며, 그의 파격적인 사상은 사후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778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사후 출간]
생전에는 출간하지 못했던 종교 비판서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가 그의 사후에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는 흄의 사후에도 그의 종교적 견해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와 사회적 파급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