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황녀, 대한제국 황족, 일제강점기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5:29
조선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났으나 격동의 시대 속 비운의 삶을 살았습니다. 일제 강압으로 일본에 강제 유학을 떠나고 정략결혼 후 조현병을 앓는 등 고통을 겪었습니다. 해방 후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개인의 비극과 나라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입니다.
1912
[고종의 고명딸 덕혜 출생]
대한제국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고명딸 이덕혜가 태어났습니다.
출생과 동시에 어머니 양씨는 '복녕'이라는 당호와 함께 귀인으로 봉해졌고, 덕혜옹주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습니다.
훗날 그녀의 기구한 삶은 조선의 비극적인 역사를 대변하게 됩니다.
[고종, 덕혜옹주를 곁에]
고종 황제가 사랑하는 고명딸, 복녕당 아기씨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직접 데려왔습니다.
고종에게는 사실상 유일하게 성년까지 생존한 딸이었기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1916
[덕혜옹주 위한 유치원]
고종 태황제는 어린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안에 특별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했습니다.
이는 덕혜옹주에 대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쿄구치 사다코와 장옥식을 보모로 촉탁하여 귀족 또래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유치원은 준명당에 설치되었으며, 덕혜옹주는 귀족의 딸들 중 또래 7~8명과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1917
[일본 왕공족 신분 인정]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태어났기에 엄밀히 황족은 아니었으나, 일본의 왕공족 신분으로 정식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일본이 조선 황실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1919
[고종, 비밀 약혼 실패]
고종은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볼모로 끌려가거나 정략결혼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의 비밀 약혼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이 계획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고종 황제 승하]
아버지 고종 황제가 승하하면서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상실을 겪게 됩니다.
고종은 생전 덕혜옹주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그녀의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1920
[낙선재로 거처 옮기다]
고종의 혼전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 덕혜옹주는 어머니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내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는 그녀의 유년 시절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궁궐 내 소학교 교육]
덕혜옹주는 궁궐 안에서 3명의 학우들과 함께 심상소학교 1학년 과정을 교육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정식 학업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921
[일출소학교 강제 입학]
덕혜옹주는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통학 시에는 일본 복식을 착용해야 했으며, 일본어에 능숙했다고 전해집니다.
[정식 '덕혜옹주' 호 하사]
복녕당 아기씨는 '덕혜'라는 정식 호를 하사받았고, 일본 궁내성의 승인을 거쳐 '옹주'라는 존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역사에 기록된 순간입니다.
1925
[강제 일본 유학 결정]
일본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가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고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강압적인 조선 황실 통제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38년간의 일본 생활 시작]
덕혜옹주는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시작하며 경성을 떠나 도쿄로 향했습니다.
강제적인 유학은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여자 가쿠슈인 입학]
도쿄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일본 황족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 중등과 2학년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1926
[귀국하여 순종 알현]
덕혜옹주는 잠시 귀국하여 영친왕 내외와 함께 순종을 알현했습니다.
고향을 잠시나마 다시 밟은 순간이었습니다.
[순종 위독으로 재귀국]
순종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친왕 내외와 함께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그녀의 또 다른 슬픔의 예고였습니다.
[순종 황제 승하]
순종 황제가 승하했습니다.
덕혜옹주는 순종의 인산(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 다시 도쿄로 돌아가야 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1929
[생모 귀인 양씨 별세]
덕혜옹주의 생모인 귀인 양씨가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귀국했으나, 왕공족 규범에 따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상복을 입지 못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1930
[조현병 진단]
1930년 봄부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을 겪었습니다.
결국 9월에는 정신장애인 조현병(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게 되면서 그녀의 병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소 다케유키와 결혼 결정]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인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일본 황족이나 조선 귀족과의 혼약설이 있었으나, 결국 정략적인 이유로 일본 화족과 맺어지게 됩니다.
1931
[여자 가쿠슈인 졸업]
병세가 호전되면서 덕혜옹주는 여자 가쿠슈인 본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직후 그녀는 운명적인 결혼을 맞이하게 됩니다.
[쇼와 천황 결혼 칙허]
왕공족의 혼사는 칙허를 받아야 한다는 《왕공가궤범》에 따라 쇼와 천황이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하는 칙허를 내렸습니다.
이는 그녀의 결혼이 개인의 의지가 아닌 국가적 결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소 다케유키와 결혼식]
도쿄에서 소 다케유키 백작과 순일본식으로 결혼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옹주는 실어증 증상을 보이고 조현병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으며,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많았습니다.
그녀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의 서막이었습니다.
1932
[외동딸 마사에 출산]
결혼 생활 중 덕혜옹주는 외동딸 소 마사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출산 이후 그녀의 조현병은 더욱 악화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1946
[마쓰자와 정신병원 입원]
출산 이후 악화된 조현병으로 인해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이 입원은 무려 15년 가까이 이어지며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상징하게 됩니다.
1947
[신적강하, 자금 지원 중단]
신적강하(일본 황족·화족의 평민화)로 덕혜옹주는 평민이 되었고, 이로 인해 생활 및 치료를 위한 자금 지원이 중단되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했습니다.
1955
[소 다케유키와 이혼]
장기간 입원이 계속되자 남편 소 다케유키는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 덕혜옹주와 이혼했습니다.
이후 덕혜옹주는 호적에 '양덕혜'로 일가를 창립했습니다.
이혼 후에 소 다케유키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의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보냈습니다.
1956
[외동딸 마사에 실종]
덕혜옹주의 외동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에 또 다른 큰 아픔을 더했습니다.
1961
[박정희, 귀국 협조 약속]
서울신문 김을한 기자의 노력과 함께, 미국 방문 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를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귀국에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962
[38년 만의 대한민국 귀국]
덕혜옹주는 38년간의 기나긴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했습니다.
김포공항에는 유치원 동창과 유모가 마중 나와 그녀를 맞이했으며, 귀국 후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 회복]
귀국 후 ‘이덕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비로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덕혜옹주 생계비 법안 통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한 〈구황실재산법〉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그녀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한 국가적 지원의 시작이었습니다.
1967
[서울대병원 퇴원]
병세가 안정되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
이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냈습니다.
1970
[자궁 용종 제거 수술 입원]
자궁에 생긴 용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노년에도 건강 문제로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1983
[노환으로 병원 재입원]
노환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녀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점이었습니다.
1989
[덕혜옹주, 77세로 영면]
창덕궁 수강재에서 향년 77세의 나이로 영면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의 생이 마침내 끝을 맺었습니다.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
창덕궁 수강재에서 장조카인 이준 황손이 상주가 되어 영결식이 치러졌고,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품고 비운 속에서 살다간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