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국제상, 학술상, 과학상, 문학상, 평화상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4- 14:14:29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제정된 세계 최고 권위의 상입니다. * 인류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되며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등 6개 분야로 구성됩니다. * 190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며 각 분야에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집니다. * 수상자는 금으로 된 메달과 표창장 그리고 상금을 받으며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1895
[노벨상 제정 유언 작성]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매년 인류를 위해 크게 헌신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라는 내용의 마지막 유언을 작성했습니다.이는 세계적 권위의 노벨상이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가인 노벨은 자신의 부고 기사 오보를 접한 후, 유산으로 인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기고자 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1901
[노벨상 최초 시상]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등 5개 분야에서 최초로 수상자가 선정되어 시상되었습니다.이는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상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역사적인 해입니다.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나머지 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여되는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03
[마리 퀴리 최초 여성 수상]
마리 퀴리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선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며, 노벨상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상자가 되었습니다.이들은 또한 최초의 부부 공동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마리 퀴리는 1911년 노벨 화학상까지 단독 수상하며, 두 번의 노벨상을 받은 세계 최초의 인물로 기록됩니다. 퀴리 부부의 딸과 사위 또한 노벨상을 수상하며 독보적인 가족 기록을 세웠습니다.
1915
[과학 분야 최연소 수상자]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25세의 나이로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그는 과학 분야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99년간 깨지지 않았습니다.
1918
[노벨상 수상 거부 ("심판은 상을 받지 않는다")]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는 1918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선정되었으나, 당시 스웨덴 한림원 상임이사였던 카를펠트는 수상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심사위원이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며 공정성을 위해 영광을 포기했습니다.
그의 시는 스웨덴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위를 고려해 스스로를 배제했습니다. 이 사건은 노벨상 역사에서 심사위원의 도덕적 책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1931
[사상 최초의 사후 수상]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는 1931년 다시 후보로 지명되어 심사를 받던 중 4월에 사망했으나, 스웨덴 한림원은 그해 10월 그를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이는 노벨상 역사상 최초이자, 규정의 예외를 인정한 사후 수상 기록입니다.
원칙적으로 사망자는 수상할 수 없으나, 한림원은 '추천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다'는 규정을 들어 수상을 강행했습니다. 이는 평생 상을 거절해온 동료에 대한 한림원의 마지막 헌사이자 예우였습니다.
1936
[나치에 저항한 노벨상 메달]
나치 독일이 자국민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자, 독일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는 자신들의 순금 메달을 압수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나치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의 연구소에 메달을 보내 안전하게 보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로써 인류의 위대한 유산은 나치의 손아귀를 피해 잠시 안식처를 찾게 되었습니다.
1935년, 반나치 운동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자 히틀러 정권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전면 금지하고 기존 수상자들의 메달까지 위협했습니다. 이에 나치에 비판적이었던 독일의 저명한 과학자 막스 폰 라우에(1914년 수상)와 유대인이었던 제임스 프랑크(1925년 수상)는 자신들의 23캐럿 순금 메달을 지키기 위해, 당시 유대인 과학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던 덴마크의 닐스 보어 이론물리학 연구소로 비밀리에 메달을 보냈습니다. 독일 밖으로 금을 보내는 것 자체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기에, 이는 목숨을 건 저항이었습니다.
1940
[왕수에 녹아 사라진 노벨상]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연구소에 보관 중이던 두 개의 노벨상 메달은 발각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때 헝가리 출신 화학자 게오르크 드 헤베시가 기지를 발휘하여, 금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액체인 '왕수(Aqua Regia)'에 메달을 녹여버렸습니다. 순금 메달은 나치 병사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주황색 화학 용액으로 보였고, 덕분에 인류의 유산은 약탈의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나치가 코펜하겐 시내를 행진하는 동안, 게오르크 드 헤베시는 메달을 땅에 묻자는 닐스 보어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발각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질산과 염산을 1:3 비율로 섞은 강력한 산성 용액인 '왕수'를 만들어, 200그램에 달하는 순금 메달 두 개를 그 안에 담갔습니다. 금은 매우 비활성 금속이라 녹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치 병사들이 연구소를 샅샅이 뒤질 때쯤 메달은 완전히 녹아 평범한 오렌지색 용액(클로로아우르산 용액)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비커들 사이에 놓인 이 용액의 정체를 몰랐던 병사들은 그냥 지나쳤고, 메달은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1945
[비커 속에서 부활한 순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3년 스웨덴으로 피신했던 게오르크 드 헤베시는 코펜하겐의 연구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선반 위에 고이 놓여있던 주황색 용액을 발견하고 안도했습니다. 그는 화학 반응을 역으로 진행시켜 용액 속에 녹아있던 금을 다시 순금 가루(침전물) 형태로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연구소로 복귀한 드 헤베시는 자신이 숨겨두었던 비커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용액에 특정 화학물질을 첨가하여 화학 평형을 반대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원리를 이용, 용해되었던 금 이온을 다시 고체 금으로 침전시켰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나치의 눈을 속였던 주황색 액체로부터 원래의 순금을 거의 완벽하게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1952
[원래의 금으로 재탄생한 메달]
게오르크 드 헤베시는 회수한 순금을 스웨덴의 노벨 재단으로 보냈습니다. 노벨 재단은 이 금을 다시 녹여 원래의 주인인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의 메달을 똑같이 재제작했습니다. 마침내 두 개의 노벨상 메달은 원래의 금으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며 한 편의 첩보 영화 같았던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노벨 재단은 드 헤베시가 보낸 금을 받아, 이를 이용해 두 개의 새로운 노벨상 메달을 만들었습니다. 이 재제작된 메달은 1952년에 막스 폰 라우에와 제임스 프랑크에게 다시 수여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일을 해낸 게오르크 드 헤베시 자신도 194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였으며, 그의 기지는 단순한 재치를 넘어 파시즘에 맞서 인류의 지성과 양심의 상징을 지켜낸 과학자의 위대한 저항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1954
[폴링, 유일무이한 2관왕]
라이너스 폴링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그는 1962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으며, 유일하게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그의 화학 결합 연구와 핵실험 반대 운동이 인정받았습니다.
1956
[바딘, 동일 분야 2회 수상]
존 바딘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1972년 또다시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그는 같은 분야에서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로, 반도체 연구와 초전도 현상 연구에 기여했습니다.
1958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수상 거부]
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정부의 강력한 압력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스웨덴 아카데미는 그의 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해당 연도의 시상식을 보류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아들은 1989년에 아버지의 노벨상을 대신 수령했습니다.
1961
[두 번째 최초 사후 노벨상 수상]
다그 함마르셸드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 사망했으나, 유족이 대리 수상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1964
[장폴 사르트르 수상 거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습니다.그는 어떠한 공식적인 기관으로부터도 영예를 받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1968
[노벨 경제학상 제정]
스웨덴 국립은행이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 분야의 스웨덴 중앙은행상'을 제정했습니다.이는 노벨의 유언에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분야지만, 다른 노벨상과 동등한 권위를 인정받으며 노벨상의 범위를 확장시켰습니다.
이 상은 1969년부터 시상되기 시작했으며, 노벨 재단이 관리합니다.
1969
[경제학상 첫 시상]
전 해에 제정된 노벨 경제학상에서 최초로 수상자가 선정되어 시상되었습니다.이는 노벨상의 새로운 분야가 성공적으로 안착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73
[레득토의 평화상 거부]
베트남의 혁명가 레득토가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베트남의 평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2014
[역대 최연소 수상자 탄생]
파키스탄의 인권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17세의 나이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역대 모든 분야를 통틀어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이는 99년 만에 깨진 기록으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19
[역대 최고령 수상자 탄생]
존 B. 구디너프가 97세의 나이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며, 역대 모든 분야를 통틀어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 기록을 경신했습니다.그의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기여가 인정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