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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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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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나폴레옹 제국과 유럽 연합군 간의 세계적 전쟁. -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시작되어 나폴레옹의 유럽 패권 야망을 둘러쌈. - 연합군의 승리로 나폴레옹 유배 및 부르봉 왕정복고. - 대영제국 세계 최강대국 도약 프로이센·러시아 강대국 성장. -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 사상 확산에 결정적 역할. - 대규모 국민군과 혁신적인 전술로 근대 군사학에 큰 변화를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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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프랑스 오스트리아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혁명 간섭에 반발하여 선전포고하며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프랑스 공화국 정부와 공화제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프랑스 왕당파 등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선전포고를 계기로 프랑스 북부와 동부, 네덜란드, 벨기에, 북부 이탈리아, 이집트, 일부 식민지 등이 주요 전쟁터가 되었다.

1793

[제1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루이 16세 처형과 프랑스군의 벨기에 침투에 대응하여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좌경화와 혁명군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 침투에 따라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국내 반란과 함께 위기에 빠졌다.

1796

[캄포포르미오 조약 체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며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탈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붕괴되었다.

프랑스 총재정부가 라인 방면에 2개 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 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를 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붕괴시켰다.

1798

[제2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오스트리아의 재참전으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며 프랑스는 다시 열세에 처했다.

이집트 원정에서 귀환한 나폴레옹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1798년 오스트리아가 다시 참전하면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다시 열세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최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1802

[아미앵 조약]

프랑스와 영국이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며 프랑스 혁명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프랑스는 혁명 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나폴레옹의 반격으로 오스트리아는 1801년 뤼네빌 조약을 체결하며 프랑스와 강화했다. 홀로 전쟁을 수행하던 영국 또한 아미앵 조약에 응하며 프랑스 혁명 전쟁이 막을 내렸다.

1803

[영국 프랑스 선전포고]

프랑스의 영국 제품 판매 금지 및 조약 위반 행위로 인해 영국이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미앵 조약 체결 이후 평화는 1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프랑스에 의한 유럽시장 내 영국제품 판매 금지와 조약 위반 행위 등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 대립이 심화되었다. 결국 영국이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1804

[나폴레옹 제정 선포]

프랑스 통령정부의 첫 통령이었던 나폴레옹이 제정을 선포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1799년 프랑스 통령정부의 첫 통령이었던 나폴레옹은 안정적인 재정 확보, 강력한 관료체제 구축, 잘 훈련된 군대 육성으로 프랑스를 다스렸다. 이후 그는 1804년 제정을 선포하고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로 등극했다.

1805

[제3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 계획에 맞서 영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계획하고 도버해협에 인접한 브르타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맞서 영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등을 규합하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며 전운이 고조되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괴멸시킨 해전.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좌절시켰다.

영국 해군이 세계 해상 패권을 확립한 결정적인 전투이다.

피에르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에 포착되어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괴멸당했다. 이 해전으로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고, 대영제국이 전 세계적인 해상 패권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나폴레옹의 즉위 1주년이었던 이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며 나폴레옹이 완승을 거둔 전투이다.

나폴레옹의 지휘 능력이 예술로 평가받았다.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우세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맞서 후대에 예술로 평가받는 뛰어난 지휘와 배치를 발휘하며 완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게 된다.

[프레스부르크 조약 체결]

아우스터리츠 전투 패배 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굴복하며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완패 이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12월 26일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며 굴복했다. 이 조약으로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806

[라인 동맹 결성]

나폴레옹이 독일 서남쪽 여러 연합체를 합쳐 친프랑스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 왕,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에 즉위시키고, 독일 서남쪽 여러 연합체들을 모아 친 나폴레옹 성향의 라인 동맹을 결성했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2세는 퇴위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칭하게 되었다.

[프로이센 프랑스 선전포고]

나폴레옹의 패권이 중부 독일에 미치자 프로이센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프로이센은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으나, 라인 동맹의 성립으로 나폴레옹의 패권이 중부 독일에까지 확장되자 위협을 느꼈다. 이에 1806년 7월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전투로, 나폴레옹의 승리로 베를린 입성으로 이어졌다.

1806년 10월 14일, 예나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 후위부대를 격파하고, 아우어슈타트에서는 프로이센군 주력이 다부 군단에 의해 격퇴당하며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군은 추격에 나섰고, 10월 27일 베를린에 입성했다.

[대륙봉쇄령 발표]

나폴레옹이 베를린에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이는 오히려 유럽 여러 나라에 큰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1806년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산업 혁명이 발흥하던 영국과 유럽 대륙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금지시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교역 상대를 잃은 유럽 여러 나라가 더 큰 경제적 타격을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

1807

[프리틀란트 전투]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격멸시킨 전투로, 이후 틸지트 조약 체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일라우 전투에서 결판을 내지 못한 프랑스군은 체제를 정비한 후 1807년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포착하여 격멸시켰다. 이 승리는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틸지트 조약 체결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틸지트 조약 체결]

프리틀란트 전투 승리 후 프랑스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폴란드 영토 일부가 바르샤바 공국으로 되살아나고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프리틀란트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프랑스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1807년 7월 7일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옛 영토의 일부를 되찾아 바르샤바 공국으로 재탄생했으며,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동참하게 되었다.

1808

[이베리아반도 침공]

나폴레옹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스페인 민중의 봉기와 영국의 지원으로 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륙봉쇄령을 발표한 나폴레옹은 1808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반발한 스페인 민중은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했고, 이 반란은 삽시간에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어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와의 진흙탕 싸움인 반도 전쟁으로 발전했다.

1809

[제5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을 본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함께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나폴레옹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진흙탕 싸움에 고전하는 것을 목격한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함께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친프랑스 바이에른 왕국을 침공하며 새로운 전선이 열렸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프랑스군이 다뉴브강 도하 중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아 나폴레옹 자신의 지휘에 의한 최초의 패배를 경험한 전투이다.

나폴레옹은 비엔나에 입성했으나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도나우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이 비엔나 근교에서 도나우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가교가 파괴되면서 절반쯤 건너갈 때 공격을 받았다. 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전투 중 최초의 패배로 기록된다.

[바그람 전투]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한 전투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패배를 설욕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프랑스군은 체제를 정비하고 1809년 7월 5일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하며 설욕했다. 이 승리 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쇤브룬 조약을 체결하며 영토 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1812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자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했다.

러시아군의 초토화 전술과 겨울 추위로 프랑스 대육군이 궤멸하며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자 나폴레옹은 1812년 역사상 유례없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이 달아났다. 식량 보급 부족과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추위로 프랑스 대육군이 궤멸하며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13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러시아 원정의 프랑스 대패를 목격한 프로이센의 호소로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등이 참여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 나폴레옹 기치를 내걸었다. 프로이센의 호소로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등이 참여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1813년 2월 결성되며 나폴레옹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

동맹군에게 포위 공격당한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전투.

프랑스로 도망가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 징집된 청년들로 변변찮은 군대를 이끌고 싸웠다. 1813년 봄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포위 공격당해 대패하고 프랑스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1814

[파리 함락]

연합군 대포위망 속에 프랑스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다.

이는 나폴레옹의 무조건 퇴위를 강요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14년에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3월 31일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다.

[나폴레옹 엘바섬 유배]

나폴레옹이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하고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부르봉 왕정복고가 단행되었다.

파리 함락 이후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으나,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했다.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섬으로 추방되었으며, 유럽 연합국은 부르봉 왕정복고를 단행했다.

1815

[빈 회의 개최]

나폴레옹 실각 후 유럽의 국경 재편을 논의하기 위해 빈 회의가 개최되었다.

각국의 이해관계로 회의는 난항을 겪었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개최되어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했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으며, 결국 빈 체제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통치권을 회복하며 백일천하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열린 빈 회의는 난항을 겪었고,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민중의 불만이 쌓였다. 1815년 2월, 이 틈을 타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복위하는 데 성공하며 '백일천하'가 시작되었다.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이 영국과 프로이센 등의 연합 공격에 완패하며 백일천하가 끝났다.

이는 나폴레옹의 최종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나폴레옹의 복위에 맞서 연합국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등의 연합 공격에 완패하며 백일천하가 막을 내렸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하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했다.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 유배]

워털루 전투 패배 후 나폴레옹은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여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

워털루 전투에서의 완패와 백일천하의 종말 후, 나폴레옹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했으나 항구 봉쇄로 단념하고 영국 군함에 투항했다. 영국 정부는 그를 남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헬레나섬에 유폐시켰고, 이곳에서 나폴레옹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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