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산성, 세계유산, 도립공원, 사적, 군사 요새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3:29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2천 년 역사를 품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천혜의 요새입니다. 병자호란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굳건히 한양을 지켜온 조선 시대의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과거 백제와 신라 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이어진 살아있는 역사 현장입니다. 오늘날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자연과 역사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경기도의 대표적인 도립공원이자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견고한 성벽과 다양한 방어시설 그리고 깊은 역사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흥미를 선사합니다.
BC 1C
[백제 온조왕 축성설]
2천여 년 전, 백제 시조 온조왕이 남한산성에 왕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당시 위례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시대 주거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의 뿌리 깊은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지만, 아직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기원전 5년), 한산 아래 책성을 세우고 위례성 민호를 옮겨 궁궐을 세웠으며,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성이라 불렀다는 《고려사》 및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백제 최초의 수도를 송파구 풍납토성으로 강력히 지목하고 있다. 2001~2002년 발굴조사에서는 백제 유적(수혈, 화덕자리, 토기조각)이 출토되어 백제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673
[신라 주장성 축조]
신라 문무왕 1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와의 투쟁과 고구려 패잔병과의 대치 상황에서 수도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남한산성의 초기 모습으로 강력히 지목됩니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는 통일신라 시대의 대형 건물터와 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오랜 역사를 증명합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12년 기록에는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대립하던 때로, 당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목적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남한산성과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남한산성 행궁터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 시대 초대형 건물지와 대형 평기화가 다수 출토되었다.
1231
[몽골군 격퇴]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에 맞서 1231년과 1232년 두 차례에 걸쳐 광주성(남한산성으로 추정)에서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이 이미 고려 시대에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광주부사 이세화의 묘지명에 따르면 1231년과 1232년, 몽골군이 광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세화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이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당시 광주 지역의 산성 중 남한산성이 규모와 지리적 특성상 몽골군 격퇴의 주 무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361
[홍건적 피난처 활용]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공으로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자, 광주 지역의 많은 백성이 남한산성으로 대피하여 몸을 피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이 유사시 백성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피난처이자 방어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공민왕 10년(1361년) 11월 21일,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피난하자, 광주 주변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가 피난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1410
[태종, 산성 재정비 지시]
명나라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자, 조선 태종은 국방 강화를 위해 전국 산성을 재정비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에 따라 광주 일장성(남한산성)의 수축 여부가 검토되었고, 이는 남한산성이 조선 초기부터 국가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태종 10년(1410년) 1월 14일, 요동에서 돌아온 이자영의 보고로 명나라의 조선 침략 가능성이 제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의 산성을 수축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광주의 일장성(남한산성)도 수축 여부가 검토되었다.
1596
[류성룡, 남한산성 주장]
임진왜란 중,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남한산성을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중요성과 군사적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한 것으로, 이후 본격적인 축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제안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류성룡은 수원의 독성(禿城)과 함께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경도(京都)의 문호를 견고히 할 것을 주장했다.
1621
[광해군, 석성 개축 시작]
조선 광해군 13년에 이르러, 남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더욱 중요해진 수도 방어의 필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남한산성 보강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광해군 13년(1621년)에 남한산성 석성 개축 공사가 시작되어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1624
[인조, 남한산성 증축]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후금의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수도 방어와 유사시 왕의 피난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대대적인 증축 공사를 추진했습니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지금과 같은 견고한 형태로 완성됩니다.
인조 2년(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도성 방어와 유사시 왕의 피신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에 인조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남한산성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증축했다.
1626
[광주목 이전 및 수어청 설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완료된 1626년 6월, 광주목의 관청이 산성 안으로 이전하고, 수도 외곽 방어를 전담하는 핵심 군사기관인 수어청이 남한산성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이 단순한 요새를 넘어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합니다.
인조 4년(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행궁이 완성되었으며, 성곽이 완성될 때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하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1636
[청군 침공, 인조 피난]
1636년 12월 9일, 청 태종 황타이지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 병자호란이 발발했습니다.
조선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진군에 길이 막혀, 최후의 보루인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40여 일간의 치열한 항전이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당시 후금)의 무리한 요구를 조선이 거절하자, 1636년 12월 9일 청 태종 황태극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에 길이 막히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1637
[강화도 함락, 항전 동력 상실]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맞서 항전하던 중, 1637년 1월 22일 조선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됩니다.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수많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남한산성 내의 항전 동력은 급격히 상실되었고, 강화론이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전하던 중,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어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성안의 항전 동력이 크게 상실되었고, 주화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삼전도의 굴욕]
45일간의 처절한 항전 끝에 식량 부족과 강화도 함락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황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역사상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637년 1월 30일, 45일 만에 식량 부족과 강화도 함락으로 인해 인조가 남한산성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황태극에게 삼궤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렀다. 인조는 소복을 입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고백하는 여진족의 의식을 행했다.
1639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
병자호란 이후 인조 17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이 남한산성에 건립되었습니다.
이는 나라의 국운이 쇠락하자 고구려와 신라에 앞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시조에게 의지하려던 조선 왕실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인조 17년(1639년) 2월 2일, 남한산성에 온조왕사당이 건립되어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병자호란 때 죽은 수어사 이서도 함께 배향되었다.
1686
[봉암성 축조 건의]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 강화를 위해, 숙종 12년에 광주유수 윤지선이 남한산성의 동쪽에 봉암성 축조를 건의했습니다.
이는 청나라의 위협에 대비하고 산성의 방어 시스템을 현대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숙종 12년(1686년), 광주유수 윤지선이 봉암성 축조를 건의하였다. 봉암성은 남한산성 원성에 대한 외성으로 '신성' 또는 '동성'이라고도 불렸다.
[봉암외성 축조]
병자호란을 겪으며 홍이포와 같은 신무기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남한산성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숙종 12년(1686) 수어사 윤지선이 봉암외성을 축조하면서 포루, 돈대, 옹성 등 새로운 방어시설을 대거 확충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홍이포 등 공성무기에 대비하여 조총과 화포를 주력으로 하는 체제로 변화하며 성곽을 강화했다. 숙종 12년(1686)에는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하였고, 문루와 장대(將臺)를 축조했다.
1693
[현절사 사액]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며 충절을 지키다 청나라에 끌려가 순국한 삼학사(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사당에, 숙종 19년(1693) 나라에서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이는 나라의 충절을 장려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다 순국한 윤집, 홍익한, 오달제 삼학사를 기리기 위해 숙종 14년(1688)에 사당을 지었고, 숙종 19년(1693)에 나라에서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1751
[서장대, 남장대 재건]
18세기 중엽, 붕괴되었던 남한산성의 서장대와 남장대가 영조의 명에 따라 2층 누각 형태로 재건되었습니다.
특히 서장대는 '수어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장대는 전투 지휘와 관측의 핵심 시설로, 재건은 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시켰습니다.
영조 27년(1751년), 이기진이 영조의 명을 받아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다. 서장대는 '수어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779
[남문 개축 및 대대적 수축]
정조 3년에 남한산성의 남문이 '지화문'으로 개축되었고, 성곽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기와로 쌓았던 여장을 벽돌로 교체하는 등 방어 시설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이 조선 후기까지도 중요한 군사 요새로 관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정조 3년(1779년), 남한산성 성곽 개보수 시 남문이 개축되어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붙여졌고, 대대적인 수축 작업이 벌어져 기와로 쌓았던 여장을 벽돌로 교체하였다.
1896
[경기 의병, 남한산성 점거]
을미사변 이후 봉기한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과 연합하여 1896년 2월 28일 남한산성을 점거했습니다.
이들은 한성 진공을 계획했으나, 내부 밀고로 인해 관군에게 성을 빼앗기고 해산되었습니다.
이는 구한말 의병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자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896년 2월 2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후 봉기한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했다. 이후 한성 진공을 준비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의 밀고로 관군이 성벽 파손 부분을 통해 침입하여 의병을 해산시키고 성을 장악했다.
1907
[일본군에 의한 시설 훼손]
1907년 군대 해산 후, 일본군은 남한산성 내 사찰에 보관 중이던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여 폭발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직전 한국의 국방력 해체를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남한산성 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었다. 군대 해산 후 사찰에 보관 중이던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일본군이 회수하여 폭발시켰다.
1919
[남한산성 만세운동]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 일대에서 인근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이는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한산성이 단순히 유적지를 넘어 항일 독립운동의 현장이었음을 증명합니다.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인근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30
[항일 민족운동 중심지 부상]
1930년대, 남한산성은 석혜환, 정영배 등이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를 중심으로 항일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조직은 당시 두각을 나타내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해방 후에도 인근 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1930년대, 석혜환, 정영배 등이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가 남한산성을 중심지로 항일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이 조직은 1936년 일제에 의해 괴멸되었으나, 해방 후에도 인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63
[사적 제57호 지정]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1963년 1월 21일, 그 견고한 성벽을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이 한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걸음이었습니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1971
[도립공원 재지정]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국립공원 지정이 무효화된 후,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 도립공원 제158호로 다시 지정되었습니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자연경관을 보존하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는 복합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되었던 남한산성이 4·19 혁명 후 무효화되었다가, 1971년 3월 17일 경기도 도립공원(제158호)으로 재지정되었다.
1974
[순환도로 터널 완공]
1974년,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순환도로 터널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는 성남시와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켜, 많은 시민들이 남한산성을 더욱 편리하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남시와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1974년에 완공되었다.
1975
[성벽 복원 사업 시작]
한국전쟁 등으로 파괴되거나 훼손된 남한산성의 성벽을 복원하기 위한 대규모 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97년까지 5.1km에 달하는 성벽이 복원되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의 원형을 되찾고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중요한 노력이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성벽 복원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7년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
1976
[관리사무소 개소]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된 지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남한산성 관리사무소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체계적인 공원 관리와 방문객 편의 증진을 위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된 후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
[역사관 개장]
남한산성의 깊은 역사를 탐방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1999년 남한산성 역사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산성의 가치를 알리고 교육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999년에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했다.
2007
[행궁 사적 제480호 지정]
유사시 왕의 피난처이자 임시 궁궐이었던 남한산성 행궁이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7년 6월 8일, 국가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2년 복원을 마친 후 일반에 공개되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7년 6월 8일, 남한산성 행궁이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복원을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201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발달 단계를 잘 보여주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이 단순한 한국의 유산을 넘어 인류 전체의 소중한 유산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2014년 6월,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는 자료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6
[문화재 관리기관 변경]
2016년 11월 9일, 남한산성의 문화재 관리기관이 (재)경기문화재단에서 경기도지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남한산성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보존 및 관리를 위한 행정적 조치입니다.
2016년 11월 9일, 남한산성의 문화재 관리기관이 종전 (재)경기문화재단에서 경기도지사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