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여성운동가, 화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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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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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화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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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선구적인 여성운동가이다. 그녀는 봉건적 사회관습과 남성 중심의 이중적 잣대에 도전하며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했다. 결혼관 모성애 정조관에 대한 파격적인 발언과 독립운동 참여로 격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글과 그림을 통해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진 시대의 선각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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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수원에서 태어나다]

호조참판의 손녀이자 시흥군수를 지낸 나기정의 딸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개명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 한학을 수학하고,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1910

[삼일여학교 입학]

수원 삼일여학교(매향중학교 전신)에 입학하며 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재학 중 월간지 '개벽'에 단색 목판화 '개척자'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판화 중 하나로 꼽힌다.

1913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경성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당시 드물던 신교육 여성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1914

['이상적 부인' 발표]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며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 현모양처론과 부덕을 비판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그녀의 초기 여성 해방론의 시작이었다.

1915

[결혼 강요와 휴학]

아버지의 결혼 강요와 학비 송금 중단에 맞서 일본 유학을 휴학하고 귀국했다.

여주공립보통학교 미술 교사로 1년간 근무하며 학비를 모아 독립심을 보여주었다.

1916

[첫사랑 최승구 사망]

일본 유학 중 연애하던 최승구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했으나, 방문 다음날 최승구는 결핵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 비극적인 첫사랑의 죽음은 그녀의 삶과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18

[단편소설 '경희' 발표]

사립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잡지 '여자계'에 자전적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한국 문학사 최초의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받으며, 주인공 경희를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삶과 자아 발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국내 첫 개인전 개최]

귀국 후 진명여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하며 경성부에서 유화 작품 70점으로 첫 개인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는 조선미술사 최초의 여성 유화 개인전람회로, 유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19

[3.1 운동 참여]

2.8 독립 선언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화학당 시위 주도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변호사 김우영과 가까워졌다.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자금 조달을 위해 개성,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투옥 중 식민지 민중의 고통을 깊이 각인했으며, 출옥 후 노동자 위로 판화 '조조'를 제작하는 등 사회 참여 활동을 이어갔다.

1920

[김우영과 결혼]

3.1 운동 당시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김우영과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 조건으로 '그림 그리는 것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별거, 최승구 묘비 건립' 등 파격적인 요구를 했고, 김우영이 이를 수용하여 당대 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다.

신혼여행지로 최승구의 묘소를 방문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1921

[첫 유화 개인전 성공]

경성일보사에서 유화 70점을 전시하는 첫 유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조선미술사 최초의 여성 유화 개인전람회였으며, 첫날 관람객 5000명 이상이 찾고 그림 20여 점이 팔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2

[만주에서 야학 설립]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갔다.

그곳에서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섰으며, 부영사 부인의 지위를 이용해 의열단 김원봉에게 거사 자금을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1923

['모성애는 본능 아냐' 주장]

첫딸 김나열 출산 후 잡지 '동명'에 '모 된 감상기'를 발표하며 "모성은 본능이 아니며 강요된 의무"라고 주장했다.

출산의 고통과 육아의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기존의 모성 신화에 도전했다.

1925

[조선미술전람회 3등]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낭랑조'로 3등을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1926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천후궁'이 특선으로 선정되며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927

[세계 일주 여행 시작]

남편 김우영의 해외 위로여행 대상자 선정으로 함께 부산항을 출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거쳐 유럽으로 향했다.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서구 문물을 직접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도착하여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약 8개월간 미술을 공부하며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 어학 공부도 병행했다. 유럽과 미국 각지의 박물관, 미술관을 순례하며 예술적 시야를 넓혔다.

1928

[최린과의 염문설]

파리 체류 중 당시 외교관으로 주재하던 최린과 연애 관계에 빠졌다.

이 염문은 파리 한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남편 김우영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1929

[최린 흠모 고백]

'별건곤'과의 인터뷰에서 최린에 대한 흠모를 고백하며 김우영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발언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이혼의 배경이 되었다.

[21개월 만에 귀국]

21개월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직후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하여 유럽에서 보고 그린 작품들을 선보였다.

1930

['실험결혼론' 기고]

잡지 '삼천리'지에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실험결혼론'을 주장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사랑 없이 의무적으로 유지되는 결혼 생활의 불행을 지적하며 파격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김우영과 이혼]

최린과의 염문과 결혼 생활의 갈등 끝에 경성법원에서 남편 김우영과 이혼했다.

그녀는 이혼 시 재산 분할과 위자료를 요구했으나, 사회적 편견과 남편의 외도가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931

[조선미전 특선 및 제전 입선]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정원'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고, 일본 제전에서도 입선하며 화가로서 실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인 '반도의 대표적 려인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 사진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는 당시 그녀의 사회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이다.

1934

['이혼 고백서' 발표]

잡지 '삼천리'지에 자신의 이혼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 그리고 조선 남성들의 이중적인 정조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는 '이혼 고백서'를 발표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는 발언으로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은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공개적인 항거였으나, 그녀에게는 비난과 조롱, 사회적 고립이라는 역풍으로 돌아왔다. 이혼 고백서에서 그녀는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고 자녀들에게 남기기도 했다.

[최린 상대 위자료 소송]

변호사를 통해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여성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행동으로, 사회적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으나 패소했다.

1935

[수덕여관 장기 체류]

이혼의 아픔과 아들의 죽음 후, 친구 김일엽이 출가한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장기 체류하며 불교에 귀의하려 했다.

만공 선사는 그녀의 출가를 거절했으나, 그곳에서 고암 이응로 등 후학을 지도하기도 했다.

[아들 김선 요절 및 전시회 실패]

서울 진고개에서 개최한 '소품전'이 실패로 끝나고, 같은 달 장남 김선이 폐렴으로 요절했다.

김우영의 방해로 아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으며, 이 충격으로 불교에 심취하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1940

[창씨개명령 거부]

일제가 단행한 창씨개명령을 거부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 총독부의 협조 요청과 징용 독려 강연 참여 권고 또한 거절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중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44

[양로원 입소]

파킨슨병, 관절염, 중풍 등의 병세와 신경쇠약이 심해져 오빠 나경석에 의해 '최고근'이라는 불명으로 인왕산 근처 청운양로원에 맡겨졌다.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하는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자녀들을 만나고 싶어 양로원을 몰래 빠져나오기도 했으나, 전 남편 김우영의 방해로 끝내 만나지 못했다. 광복 후에도 병세는 악화되었고, 사회적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고립되었다.

1948

[시립자제원에서 사망]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등으로 사망했다.

소지품 하나 없이 행려병자로 처리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이듬해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으로 공고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 전쟁 이후 그녀의 이름은 언급조차 금기시되었고, 대부분의 작품 또한 유실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1974

[사후 재조명 시작]

사망 후 '바람 피우다 이혼당한 여자'로 평가절하되던 그녀의 삶과 작품이 미술평론가 이구열의 회고전과 평전 출간을 계기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한 복권의 시작이었다.

1999

1999.11 사후 51년

['문화인물' 선정 논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로부터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정조 개념 비판" 등의 이유로 일부 자문위원의 반대가 있었으나, 여성운동가들의 반발로 결국 선정되었다.

이는 그녀의 가치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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