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화가, 관료, 시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1:07:51
조선 후기 풍속 화가의 대가로 정조 시대 문예 부흥기를 이끈 대표적 화원입니다. 산수 풍속 인물 신선 등 모든 회화 분야에서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스승 강세황에게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천부적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왕의 어진부터 서민의 일상까지 폭넓은 작품 세계를 선보여 대중에게 깊은 흥미를 주었습니다.
1745
[김홍도 출생]
조선 후기의 대표 풍속 화가 김홍도가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 화가인 김홍도가 1745년 경기도 안산에서 아버지 김석무와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사능이다. 확실한 출생 등은 알려진 바가 없다.
1755
어린 김홍도는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시, 서, 화에 능했던 당대 최고의 감식안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화법을 배웠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화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김홍도 외가의 가문이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인동 장씨 집안이었기에 화원 사회에 소개될 수 있었다.
1773
[어진 제작 및 첫 관직]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과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고 장원서 별제로 임명되었다.
대략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 및 왕세손 이산(훗날의 정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 공로로 장원서 별제(별제)에 임명되며 화원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774
30세가 되던 해에 왕실 소유의 원포(園圃)와 채소재배를 관장하는 사포서(司圃署)에서 종6품의 관직인 별제(別提)로 임명받았다.
1776
왕세손 이산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다. 또한 32세의 나이로 신선들이 서왕모의 생신잔치에 가는 모습을 그린 <군선도> 병풍(국보 제139호)을 제작했다.
1781
정조 5년,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공로로 와서 별제로 임명되어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정조는 김홍도를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 칭찬하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고 기록했다.
1784
[단원 호 사용 및 찰방 임명]
40세에 자신의 호를 딴 <단원도>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안기역 찰방으로 2년 5개월간 근무했다.
40세가 되던 해에 <단원도>를 그리기 시작하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 '단원'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 찰방으로 임명되어 2년 5개월간 근무하며 민중의 삶을 관찰하는 중요한 기회를 가졌다.
1790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1
48세가 되던 해인 1791년 12월 10일, 충청도 연풍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연풍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민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풍속화에 담아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95
51세가 되던 1795년,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만 3년 만에 연풍 현감에서 파직되었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화원으로 복귀하며 독특한 화풍을 정립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1796
1796년에는 용주사의 <부모은중경> 삽화를 그렸고, 1797년에는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리는 등 교훈적인 주제의 그림 작업에도 참여했다.
1800
1800년, 평생 자신을 총애하며 예술 활동을 지원해 주었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이어 교류하던 후원자 김한태마저 별세하면서 김홍도는 모든 후원자를 잃고 노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1806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마지막 기록으로 전해지며,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61~62세의 나이이던 1805년이나 1806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