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 (건축가)
건축가, 교육자, 문화 후원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2:27
-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으로 김중업과 함께 1세대를 대표합니다. - 단순한 건축가를 넘어 교육자 잡지 발행인 예술 후원자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습니다. - 1977년 타임지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에 비유될 정도로 한국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세운상가 올림픽주경기장 등 수많은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 55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며 짧지만 강렬했던 건축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1931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다]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 건축가가 함경북도 청진 신압동에서 김용환과 김우수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훗날 한국 건축사에 굵직한 획을 긋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938
[서울로 전학, 새로운 시작]
고향 청진의 천마소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서울 교동국민학교로 전학하며 어린 시절의 중요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1940
[건축가의 꿈을 꾸다]
경기공립중학교 2학년 시절, 건축을 전공한 미국 병사에게 영어회화를 배우며 건축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만남은 그의 평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50
[김중업과의 만남과 밀항]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며 한국 현대 건축의 또 다른 거장 김중업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통역관으로 복무 중 일본으로 밀항하는 파란만장한 시기를 겪습니다.
1954
[동경예술대학 입학 및 스승과의 조우]
일본 동경예술대학 건축과에 입학하여 훗날 그의 건축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스승 요시무라 준조를 만나게 됩니다.
학업과 병행하여 마쓰다·히라다 건축 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습니다.
1958
[동경예술대학 졸업]
동경예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하며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준비합니다.
그의 학구열은 이후 도쿄 대학교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집니다.
1959
[국회의사당 설계 당선과 좌절]
남산에 건립될 한국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인해 그의 설계안은 아쉽게도 백지화되고 맙니다.
이는 그의 초기 경력에 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1960
[도쿄대 석사 및 귀국]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일본인 아내 야지마 미치코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학원 재학 중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와 친구가 되어 교류했습니다.
1961
[김수근 건축연구소 설립]
자신의 건축사무소인 '김수근 건축연구소'(훗날 공간 그룹)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건축계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동시에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1963
[자유센터, 워커힐 힐탑바 완공]
자유센터와 워커힐 힐탑바 등 초기 대표작들을 완공하며 건축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워커힐 힐탑바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6
[월간 《공간》 창간]
한국 최초의 건축 및 예술 종합지인 월간 《공간》을 창간하며 건축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문화 후원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968
[세운상가 완공]
당시 한국 최대 규모의 주상복합단지인 세운상가를 완공했습니다.
이는 서울 도심 재개발의 상징이자 그의 거대한 스케일과 도시 건축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1971
[공간사옥 및 '공간 사랑' 개관]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공간사옥을 건립하고, 그 안에 소극장 '공간 사랑'을 개관하여 전위극, 무용, 전통 연희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가를 넘어 문화예술 전반의 발전을 도모한 그의 넓은 시야를 보여줍니다.
1974
[국민대학교 조형학부 개편]
국민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건축학과를 비롯한 여러 학과를 통합, 조형학부로 개편하며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그의 교육자로서의 혁신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1976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
많은 민주 투사들에게 고문의 상징이 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습니다.
이 건물은 창문, 계단, 문, 소품 하나하나가 고문과 취조에 최적화된 구조로, 김근태 열사 전기고문, 박종철 열사 물고문 치사 사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 설계는 그의 건축 경력에 지울 수 없는 논란과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5.16 쿠데타의 핵심 김종필과의 친분,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얻어진 결과물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용도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 주장하나, 건물 구석구석의 치밀한 디테일이 고문과 취조에 최적화되어 있어, 설계팀이 그 공간에서 펼쳐질 끔찍한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는 '간첩 잡는 나랏일'이라는 명분 앞에서 도덕적 판단 회로가 작동을 멈춘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1977
[타임지 '메디치' 극찬 및 올림픽주경기장 착공]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으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 후원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 비유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같은 해 서울 올림픽주경기장 설계를 시작하며 한국 스포츠 역사의 상징이 될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끌었습니다.
인도 대한민국 대사관도 설계하며 외교적 건축물에도 기여했습니다.
1979
[국민대 초대 학장 및 주요 작품 완공]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며 교육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국립청주박물관, 아르코예술극장(당시 종합문예회관), 양덕주교좌성당 등 한국의 문화와 종교 건축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작품들을 연이어 완공했습니다.
1980
[경동교회 완공]
독특한 외관과 경건함이 어우러진 경동교회를 설계했습니다.
이 건물은 그의 종교 건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1981
[경복궁역 설계]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을 설계하며 지하 공간에도 한국적인 미학을 불어넣었습니다.
역사 깊은 경복궁과 어울리면서도 현대적인 기능성을 갖춘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1983
[주한 미국 대사관 등 완공]
주한 미국 대사관, 구미문화예술회관, 광명시청사 등 국내외 주요 공공 건축물을 연이어 완공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그의 폭넓은 건축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1985
[간암 투병 시작 및 마지막 작품]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했지만, 불광동 성당과 벽산빌딩 등 생의 마지막까지 건축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도 그는 한국 건축계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1986
[55세의 나이로 타계]
간암 투병 중 1986년 6월 14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타계했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건축 인생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