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문인, 학자, 승려, 생육신,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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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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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학자, 승려, 생육신,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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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천재 문인이자 학자.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둔 승려가 되어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집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평생을 방랑하며 불의를 비판하고 세상을 풍자하는 시와 글을 남겨 조선시대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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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

[천재적인 신동의 탄생]

조선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고 3세에 맷돌을 보고 글을 지었으며, 5세에는 《중용》, 《대학》을 통달하여 '신동'이라 불렸다.

그의 비범한 재능은 세종대왕에게까지 알려져, 5세의 나이에 왕 앞에서 글을 지어 칭찬과 함께 비단을 선물 받았다는 일화는 그의 천재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시절 이계전, 김반, 윤상 등 당대 석학들에게서 학문을 익히며 지적 기반을 다졌다. 이름 '시습'은 논어 학이편의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이름이다.

1447

[중시 백일장 장원 급제]

중시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며 일찌감치 뛰어난 문재를 인정받았다.

그의 학문적 재능과 문학적 소양은 이미 소년기에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1450

[가정적 역경과 결혼]

15세 무렵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의탁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외숙모와 아버지마저 병을 앓는 등 연속적인 가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과 결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정확한 결혼 시기는 불분명하나, 가정적 역경이 시작된 시기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1455

[단종 폐위 소식에 통한]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 중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소식(계유정난)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3일 밤낮으로 문을 닫고 번민한 끝에 통곡하며 아끼던 책들을 모두 불태우는 등 격렬한 절망감을 표출했다.

이 사건은 그가 벼슬길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456

[승려 설잠으로 방랑 시작]

왕위 찬탈에 대한 불만을 품고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었다.

'설잠'이라는 법명을 얻고 21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전국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세상의 허무함을 읊는 시를 지었다.

그의 방랑 시편들은 후일 〈매월당시사유록〉에 수록되었다.

1465

[금오산 정착과 집필]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여 정착했다.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산거백영》 등을 저술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금오신화》는 당시 방랑하며 느꼈던 세태 비판과 허무 의식을 담아낸 작품으로, 이후 한국 소설의 효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468년에는 《산거백영》을, 1476년에는 《산거백영후지》를 발표했다.

1466

[동학사 숙모전 증축 참여]

충청남도 공주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아 단종 복위를 꿈꾸다 순절한 사육신과 단종 관련 신하들을 추모하는 의거에 참여하며 불의에 대한 저항 정신을 이어갔다.

이 증축된 건물은 1728년(영조 4)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 스님이 재건하였다.

1472

[양주 시골에서 저술 전념]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며 시와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자신의 뜻을 지켜나갔다.

1481

[47세에 환속 및 재혼]

47세(성종 12)에 승려 생활을 정리하고 환속하여 안씨 부인과 재혼했다.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는 등, 세속과의 절충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권력자를 향한 통렬한 비판]

세조 찬탈에 협력하여 영의정까지 오른 정창손을 길에서 만나 면박을 주고,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의 행차를 보며 서슴없이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는 등, 변절한 권력자들을 향한 통렬한 비판과 강직한 기개를 평생 잃지 않았다.

그의 해학적인 풍자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회자되었다.

서강을 여행하다가 한명회와 유응부의 시를 패러디하여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내용으로 비꼬아 세인들의 배꼽을 잡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담, 김종직, 서거정 등 당대의 학자들과도 교유하였다.

1493

[무량사에서 영면]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59세.

평생을 불의에 저항하고 자유롭게 살았던 그의 유언에 따라 절 옆에 묻혔다.

사후 3년이 지나 유해를 확인했을 때 얼굴이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지며, 후에 그의 높은 정신을 기리는 부도(浮屠)가 세워졌다.

1506

[사후 재평가와 추증]

사후 중종은 그의 높은 절개를 기려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

이후 선조는 이이에게 그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라 칭송하며 집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하는 등 조선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재평가와 추모를 받았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되었다. 그의 문집인 《매월당집》은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으로 처음 완성되었다. 그러나 명종실록의 사관은 그를 "요사하고 허탄하다"고 비꼬는 악평을 남기기도 하는 등, 그의 삶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시각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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