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조선 시대 문신, 소설가, 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2:15
•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소설가. • 늙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한글 소설을 창작. • 격동의 정치 상황 속에서 여러 차례 유배를 겪었으나 문학적 업적을 남김. • 한글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며 조선시대 소설 문학의 지평을 연 선구자.
1636
[아버지 김익겸 순절]
김만중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중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이로 인해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에게 엄격하고 자상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이로 인해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와 형 김만기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 윤씨는 뛰어난 학식으로 두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1637
[김만중 출생]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낸 조선 시대 중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 김씨이며, 호는 서포, 시호는 문효이다.
김만중(金萬重, 1637년 3월 6일~1692년 6월 14일)은 조선 시대 중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본관은 광산 김씨이며, 자는 중숙,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아버지 김익겸은 그가 태어나기 전 병자호란으로 순절하여 유복자로 자랐다.
1649
[어린 시절 글재주]
12세의 어린 나이에도 과문(科文)을 쓸 만큼 뛰어난 글재주를 보이며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훗날 위대한 문인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어머니 윤씨의 엄격하고 자상한 교육 아래, 김만중은 12세에 이미 과문을 쓸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윤씨 부인은 궁색한 살림에도 자식에게 필요한 서책을 아끼지 않고 구입했으며, 직접 『소학』·『사략』·『당시』 등의 책을 가르치기도 했다.
1650
[향시 합격]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며, 일찍이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는 그의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여주는 초기 성과였다.
김만중은 14세에 향시에 합격하며, 어린 나이부터 학문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652
[사마시 1등 합격]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는 관료의 길로 들어서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그의 학문적 역량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만중은 1652년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할 기반을 마련했다.
1665
[정시문과 장원 급제]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성균관 전적에 임명된 후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지평, 수찬, 교리 등 주요 요직을 거치며 젊은 인재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1665년(현종 6년)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이후 예조좌랑으로 옮겼으며, 사간원 정언·지평·수찬·교리 등을 지내며 중앙 관직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667
[홍문관 수찬 임명]
사헌부 지평을 거쳐 세자 시강원 문학, 이후 홍문관 수찬이 되는 등, 핵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조정의 인재로 성장했다.
1667년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가 문학(세자 시강원의 정5품 벼슬)으로 전직되었고, 바로 홍문관 수찬이 되는 등, 젊은 나이에 중요한 학문 및 행정 관직을 경험했다.
1671
[암행어사 활동]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와 삼남 지방의 진정(賑政,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을 조사하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71년(현종 12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진정을 조사하며, 민생을 살피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과 백성을 향한 마음을 보여주는 활동이었다.
1672
[동부승지 역임]
겸문학, 헌납을 거쳐 동부승지에 임명되며 왕의 비서실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이는 왕권을 보필하는 핵심 요직이었다.
1672년 겸문학·헌납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왕의 가까이에서 국정에 참여하는 핵심 관료로 자리매김했다.
1674
[예송논쟁으로 파직]
인선왕후 작고 후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하는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한 후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 즉 권력의 정통성 논란인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김만중은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판 김수항이 임금의 뜻을 거스를 때, 김만중은 관료들과 함께 임금께 간청하다가 엄중한 비답을 받고 상소 사직했다.
1679
[예조참의 재등용]
관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의에 임명되며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의 능력과 학문이 다시 인정받는 계기였다.
관직 삭탈 이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년) 예조참의가 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680
[대사간 및 공신 책록]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고,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며 국가에 대한 공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그의 정치적 위상이 한층 높아진 중요한 사건이었다.
1680년(숙종 6년)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같은 해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는 그가 서인 노론계열의 중신으로서 국가에 기여한 바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683
[공조판서 및 대사헌]
공조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하며 고위 관직에 올랐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잠시 전직되는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1683년(숙종 9년) 공조판서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다른 직책으로 전직되었다. 이는 격동의 정세 속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정치적 시련 중 하나였다.
1685
[홍문관 대제학 임명]
조선 최고의 학문 기관인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조정의 중신으로 활약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된 후 예조판서, 병조판서까지 역임하며 조선의 학문과 행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686
1686년 좌참찬, 지경연사로 재직하면서 김수항이 아들 김창협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 이 일로 인해 숙종의 진노를 사 선천(宣川)에 유배되는 정치적 고난을 겪게 되었다.
[한글 소설 창작]
선천 유배 생활 중, 늙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주옥같은 한글 소설을 직접 집필했다.
당시 한문 위주의 문학 풍토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본격적인 한글 소설을 선보이며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한글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어머니의 소일거리를 위해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특히 『구운몽』의 저작 시기는 '서포연보'가 발견되면서 선천 유배 중인 1686년경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한글로 쓴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독창적인 국문학관을 피력하며, 소설 문학 및 서민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687
[숙종 진노로 파직 유배]
판의금부사,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던 중, 조사석의 우의정 임명과 장희빈 어머니 윤씨와의 추문 문제를 숙종 면전에서 비판했다가 파직되어 다시 유배당하는 큰 시련을 겪었다.
1687년 판의금부사, 예문관 제학, 장악원 제조 등을 겸임하던 중, 우의정에 임명된 조사석과 희빈 장씨 어머니 윤씨의 내연관계 추문에 대해 언관들이 탄압받자 경연장에서 숙종에게 직접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희빈 장씨 때문이 아니냐'며 항의했다. 이로 인해 숙종의 진노를 얻어 파직되고 다시 유배되었다.
1688
유배되었던 김만중은 1688년에 방환(放還)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1689
[남해 유배]
박진규, 이윤수 등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는 기사환국 이후 남인의 정치적 보복에 의한 것이었다.
1689년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 이는 기사환국 이후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서인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1692
[김만중 사망]
조선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남해 유배지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한글 소설을 썼던 효자이자, 시대의 고난 속에서도 문학적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로 기억된다.
1692년 6월 14일, 김만중은 남해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격변하는 조선 시대 정치 상황 속에서 겪은 수많은 고난의 결과였다.
1698
1698년(숙종 24년), 김만중의 관직이 복구되어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는 기사환국으로 인한 그의 억울한 유배와 죽음이 후대에 재조명되었음을 보여준다.
1706
[효행 정표]
그의 효행에 대해 국가에서 정표(旌表)가 내려져 공식적으로 효심을 인정받았다.
어머니를 위해 한글 소설을 지었던 그의 효심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706년(숙종 32년), 김만중의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이는 그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효심과, 어머니를 위해 한글 소설을 지었던 일 등 그의 전반적인 삶이 국가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968
[국역본 간행]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서포집』과 『구운몽』 등 김만중의 주요 저서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국역본으로 간행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문학 작품이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만중의 『서포집』과 『구운몽』 등의 한글 번역화된 국역본이 간행되면서, 그의 문학 작품이 현대인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2001
[초상화 문화재 등록]
그의 조카 죽전 김진규가 그린 김만중의 초상화가 대전광역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며, 그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현대에 다시 한번 재조명받았다.
2001년 1월 10일, 김만중의 조카 죽전 김진규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대전광역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 의결되어 대전광역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는 김만중의 시대를 넘어선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