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

정치 사건, 인권 침해, 외교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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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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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건, 인권 침해, 외교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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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일본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어 5일 만에 서울 자택 근처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한일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된 초유의 정치 공작으로 그 진실은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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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5.16 군사 쿠데타 발생]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제2공화국이 11개월 만에 단명하고,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며 제3공화국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언론 탄압과 정치 활동 금지 등 강압적인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963

[박정희, 제3공화국 출범]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3공화국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당선되었으며, 많은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국회의원이 되는 등 권력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1968

[국민복지회 사건 발생]

박정희가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당내 김종필 지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복지회 사건'을 이용했습니다.

김용태 등 복지회 회원들이 제명되고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박정희의 장기 집권 기반이 공고해졌습니다.

1969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

박정희가 전국적인 개헌 반대 시위와 야당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기습적인 날치기로 삼선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박정희의 세 번째 대통령 출마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70

[김대중, 신민당 대선 후보]

김대중이 신민당 전당대회 경선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박정희의 영구 집권 시도에 맞설 강력한 야당의 기수로 부상했습니다.

1971

[동교동 자택 폭발물 사고]

대선을 목전에 두고 김대중 후보의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지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조카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하며 의혹만 남겼습니다.

[제7대 대통령 선거 실시]

박정희의 영구 집권 시도를 경고하며 파란을 일으켰던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94만 표 차이로 아쉽게 석패했습니다.

이 선거 직후 그에게 연이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김대중, 교통사고 당하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 유세 중 김대중이 탄 차량이 14톤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그는 양팔 정맥과 골반 관절에 중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게 되었고, 당시 정권의 암살 시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1972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방북]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 선포 전 비밀리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과 회담했습니다.

이 방문은 이후 남북공동성명 발표의 배경이 되었으며, 유신 직전의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습니다.

[박성철, 서울 답방 회담]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및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회담을 통해 남북 간 평화 분위기 조성과 조국 통일 원칙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박정희 정부와 북한이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 합의를 담은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남북 간 평화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10월 유신 체제 선포 직전에 이뤄져 그 정치적 목적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일본으로 치료 출국]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게이오 대학병원에 입원하며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이 출국은 그의 망명과 이후 납치 사건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10월 유신 선포와 망명]

일본에서 치료 중이던 김대중은 박정희가 비상계엄령과 함께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귀국을 포기하고 망명을 택했습니다.

그는 국내에서 할 수 없는 투쟁을 해외에서 전개하며 유신 체제 비판에 앞장섰습니다.

1973

[한민통 조직 및 취임]

김대중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조직하고 초대의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이 단체를 통해 해외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선 반정부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김대중, 일본으로 입국]

미국에서 한민통을 조직한 김대중은 일본 지부 조직과 반박정희 집회 참석을 위해 일본에 입국했습니다.

이는 그의 해외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도쿄 호텔에 투숙]

김대중이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박정희 집회 참석을 앞두고 도쿄 팰리스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이는 납치 사건 직전의 행적으로, 그의 동선이 이미 감시받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양일동 대표와 대화 후 방을 나서던 김대중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는 2210호실에 감금되어 마취제를 투여받고 의식을 잃은 채 납치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괴한들은 김대중을 납치한 후 공작선 용금호로 옮겨 태웠습니다. 배 밑 선실에서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을 여러 겹의 테이프와 붕대로 가린 뒤,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수십 킬로그램의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하려 시도했습니다. 심지어 등에 판자를 대고 상어가 먹기 좋다는 말까지 주고받으며 계획적인 살해를 준비하는 듯했습니다. 당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김대중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국민들을 위해 살려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증언했습니다.

[5일 만에 서울 자택 귀환]

바다에 수장될 위기에 처했던 김대중은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추격해 온 해상자위대 함정 때문에 괴한들이 계획을 변경하면서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납치 5일 만인 밤 10시경, 그는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 뒷골목에 방면되어 기적적으로 귀환했습니다.

[日 경찰, 김동운 지문 발견]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은 납치 현장에서 주일 한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자 중앙정보부 요원인 김동운의 지문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일본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보기관의 관여와 주권 침해 여부를 강력히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사건 개입 유감 표명]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대사관을 통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한국 정부 직원이 개입된 듯한 보도에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일본 측의 강력한 항의와 국제적 압력에 대한 첫 공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요미우리 신문 서울지국 폐국]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논조를 보도한 요미우리 신문은 대한민국 문교부로부터 서울지국 전면 폐국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건 보도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강경한 통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日 경시청, 김동운 용의자 지목]

일본 경시청이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김대중 납치 사건의 핵심 용의자로 공식 지목했습니다.

일본 야당은 강력 대응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한국 정부, 용금호 혐의 부인]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 수사 자료'를 발표하고, 공작선 용금호에 대한 면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납치 용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일본 정부에 공식 회답했습니다.

이는 일본 수사 결과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입장이었습니다.

[日 국회, 내각 불신임안 부결]

일본 국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이유로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습니다.

이는 사건이 일본 국내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박정희, 日에 유감 표명]

박정희 대통령이 납치 사건에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이 관여한 혐의를 인정하고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동시에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면직시키며 사건 봉합을 시도했습니다.

[김종필 총리, 일본 방문]

박정희 대통령의 유감 표명 직후 김종필 대한민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는 납치 사건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1974

[日, 김동운 범인으로 지목]

일본 수사당국이 수사 보고서를 발표하며 김대중 납치 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으로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재차 지목했습니다.

이는 한국 정부의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박정희, 혐의 부인 재통보]

일본 수사당국의 재차 지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동운의 혐의에 대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일본 당국에 다시 통보했습니다.

이는 일본 수사 결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부인 입장이었습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사망했으며,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에 또 다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日 특사, 저격 사건 논의]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자민당 부총재가 일본 정부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는 문세광 사건의 진상 규명 및 김대중 납치 사건 등으로 복잡해진 한일 관계 현안을 논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日, 수사 결과 상세 설명 요구]

일본 당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수사 결과가 납득할 수 없다며 상세한 설명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이는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75

[김동운 불기소 처분 통보]

한국 정부는 일본의 상세 설명 요구에 김동운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고 혐의 입증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했으며, 도쿄에서의 품위 없는 언동을 이유로 공무원 지위를 박탈했다고 통보했습니다.

사실상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日 외무장관, 사건 종결 선언]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귀국 직후 김대중 납치 사건이 결말 지어졌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는 외교적으로 사건을 봉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977

[김형욱 전 중정부장 증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폭로하며 사건이 재점화되었습니다.

그는 일본 총리의 회의적 발언을 비난하며 추가 폭로를 예고, 한일 양국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1987

[이후락 인터뷰 안기부 저지]

납치 사건을 주도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가 실린 신동아 10월호 인쇄를 안기부가 한일 외교 문제 우려를 이유로 막았습니다.

기자들의 철야 농성과 동아일보 보도로 파문이 커지자 안기부가 방침을 철회하며 일단락되었습니다.

1998

[KT공작 계획문서 공개]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 계획 문건인 'KT공작 계획서'가 공개되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살해 계획은 없었으며, 유신 반대 운동을 하던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동교동 자택까지 강제 귀국시키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다고 알려졌습니다.

2006

[국정원, 암살 가능성 언급]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김대중 납치 공작 초기 '야쿠자 동원 암살' 및 '외교배낭 통한 반입' 계획이 논의된 적이 있음을 밝히며, 공작 목표가 살해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외교통상부 문서 공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가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전격 공개했습니다.

이로 인해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그동안 감춰졌던 많은 내용이 세상에 드러나며 진실 규명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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