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독립 전쟁
전쟁, 혁명, 독립 운동, 민족주의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1:45
그리스 독립 전쟁은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여 근대 그리스 혁명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입니다. *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 왕국이 수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 당시 유럽의 현상 유지 질서인 빈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복잡하게 전개되었습니다. * 동유럽 및 비 기독교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민족주의 성격의 독립 운동입니다. *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전조이자 다른 피지배 민족의 독립 투쟁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1814
[필리케 헤타이리아 조직]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그리스의 해방을 목표로 '우호형제단'이라는 비밀 단체가 오데사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도나우 공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리가스 페레오스의 순절에 영향을 받은 젊은 그리스 상인 세 명이 프리메이슨식 비밀 결사 집단인 이탈리아 카르보나리 당의 영향을 받아 이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그리스 상인 디아스포라의 중심지였던 오데사에서 결성되어 빠르게 성장했으며, 그리스 세계 전역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지지자들을 모았습니다.
1820
[입실란티스 수장 선출]
러시아 군대의 장군이자 파나리 사람인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수장으로 선출되어 그리스 봉기 계획의 총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발칸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을 선동하고 러시아의 개입을 유도하고자 했습니다.
러시아 외무장관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지도자로 제의되었으나 거부되었고, 친우회 구성원들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를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1821
[도나우 공국 봉기 시작]
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수장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동지들과 함께 프루트강을 건너 도나우 공국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선언하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봉기를 공식적으로 요구, 그리스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입실란티스는 모든 그리스인과 그리스도교도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을 선언했지만, 루마니아 동맹자들과의 불신, 러시아 차르의 비난 서신 등으로 인해 상황은 복잡해졌습니다.
[마니, 오스만에 전쟁 선포]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해 온 역사가 깊은 마니 사람들이 아레오폴리에서 공식적으로 투르크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은 즉시 펠로폰네소스의 칼라마타로 진격하여 점령하며 반란의 불길을 지폈습니다.
페트로스 마브로미할리스가 지휘하는 2,000명의 마니 군대에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와 파파플레사스 등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3월 23일 칼라마타를 함락했습니다. 같은 날 보스티차에서는 안드레아스 론도스 대주교가 봉기했습니다.
[파트라 혁명 선언]
펠로폰네소스의 파트라에서 예르마노스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아요스 게오르요스 광장에서 혁명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습니다.
이 날은 후대에 그리스 독립 혁명의 공식적인 시작일이자 국경일로 기념됩니다.
그리스인들은 혁명군을 조직하여 파트라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산발적인 공격을 막아냈으며, 아하이아의 혁명 지도자들은 외국 영사관에 혁명의 명분을 설명하는 문서를 보내 국제적인 인정을 모색했습니다.
[중앙그리스 봉기 확산]
중앙그리스 지역에서 필리케 헤타이리아에 합류한 민병대들이 포키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틀 뒤에는 티바에서도 봉기가 뒤따랐습니다.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스와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같은 주요 인물들이 혁명에 참가하며 중앙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오스만 수비대는 살로나 성채에서 버티다 4월 10일 그리스인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비록 알라마나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패배하고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가 전사하는 비극도 있었으나, 그라비아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물리치는 등 중앙그리스에서 혁명의 불길은 계속 타올랐습니다.
[폴리이로스 봉기 및 학살]
마케도니아 지역의 폴리이로스에서 그리스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지역 지사와 그의 부하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테살로니키의 유수프 베이는 400명이 넘는 인질을 투옥하고 인질 절반을 처형하며 잔혹하게 대응했습니다.
폴리이로스 그리스인들은 투르크의 분견대를 두 번이나 물리쳤으나, 유수프 베이의 보복으로 수많은 인질이 살해당하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반란은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토스산, 카산드라, 타소스섬이 반란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화선 첫 시험]
그리스 독립 전쟁 초기, 그리스인들은 바다에서의 승리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화선'을 전략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에레소스에서 디미트리오스 파파니콜리스가 이끄는 화선이 투르크 프리깃함을 성공적으로 파괴하며 그 효용성을 입증했습니다.
화선은 1770년 오를로프 반란 때 프사라 사람들이 진가를 보인 바 있으며, 그리스 함대는 오스만 해군에 대적할 만한 전투용 선박이 부족했기에 화선은 혁명에 중요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훗날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는 히오스 학살 보복으로 오스만 기함을 파괴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드러거샤니 전투 참패]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이끄는 그리스 '신성대'가 도나우 공국의 드러거샤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했습니다.
이 패배로 신성대는 궤멸되었고, 루마니아 동맹자들의 이탈까지 겹쳐 북부에서의 반란은 좌절되었습니다.
입실란티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비난 서신으로 인해 러시아의 개입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로 퇴각하려 했으나 체포되어 7년간 투옥되는 신세가 되었고, 몰다비아의 투쟁도 그해 말 오스만에게 진압되었습니다.
[트리폴리 함락 및 학살]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대가 펠로폰네소스의 주도 트리폴리를 함락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뒤 30,000명이 넘는 투르크인과 유대인 주민 전체가 학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독립 전쟁 중 악명 높은 학살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포병이 부족했음에도 각 수령이 이끄는 비정규 군대로 요새를 포위하고 아르카디아에서 투르크 군대를 물리치며 트리폴리로 진격했습니다. 트리폴리 함락은 그리스 혁명군의 중요한 군사적 승리였으나, 동시에 잔혹한 학살로 얼룩졌습니다.
[살로나 회의 개최]
살로나에서 지역 지도자들과 군대 수장들이 모여 '대륙 그리스 동부의 법질서' 초안을 작성하고, 71명의 저명인사로 구성된 통치 위원회 '아리오스 파요스'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그리스 독립 전쟁 중 첫 정부 형태의 조직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이후 에피다브로스에서 열린 제1차 국회와 대립하며 사실상 지역 정부 간의 내전 상태에 빠지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정치적 분열은 독립 전쟁의 복잡한 전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1차 국회 개최]
에피다브로스에서 그리스 혁명 중 첫 번째 국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중앙 과도 정부가 성립되며 독립 국가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이 국회는 아리오스 파요스와 권력 다툼을 벌이며 그리스 독립 진영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을 드러냈습니다. 혁명의 열기 속에서도 그리스인 파벌 간의 긴장이 높아지며 사실상 내전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822
[카나리스의 기함 파괴]
그리스의 영웅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가 히오스 섬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만 제국의 기함을 파괴했습니다.
이는 화선 운용의 성공적인 사례이자 그리스 해군의 국제적인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스 화선은 오스만 해군의 거대한 전함에 대적할 효과적인 무기였으며, 총 59척의 화선 중 39척이 성공적인 공격을 기록했습니다. 이 승리는 그리스 승무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펠로폰네소스 봉기 지속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23
[그리스 독립군 내전]
그리스 저항군의 지도자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와 임시 정부 내각 수반 게오르요스 쿤투리오티스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듬해 쿤투리오티스의 입지 강화 시도를 둘러싸고 제2차 내전이 일어나는 등 그리스 독립군 진영은 심각하게 분열되었습니다.
내부적인 갈등과 재정적 어려움은 함대 유지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는 이집트 군대가 프사라와 카소스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혁명의 위기를 심화시켰습니다.
1825
[이브라힘 파샤 상륙]
오스만 술탄의 요청을 받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가 아들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그리스에 파병했습니다.
이브라힘 파샤는 메시니아의 메토니에 상륙하며 현대식 무장과 훈련을 갖춘 이집트군의 개입을 알렸습니다.
이브라힘은 크리티, 키프로스, 펠로폰네소스, 시리아를 대가로 군대를 보냈으며, 그리스 주민 대부분을 추방하고 이집트 농민들을 그리스에 재정착시킬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의 군대는 즉시 승리를 거두며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메솔롱기 제3차 포위]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이 전략적 요충지 메솔롱기를 세 번째로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위는 오스만과 이집트군의 육해군 연합 작전으로 진행되었고, 그리스 저항군의 최후의 보루 중 하나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같은 날 나바리노가 이브라힘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투르크 군대는 도시 성벽 밑으로 갱도를 파는 등 맹공을 펼쳤으나 그리스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이브라힘이 코린토스 만을 건너 합류하면서 그리스군의 보급로가 차단되며 위기가 심화되었습니다.
1826
[메솔롱기 함락과 비극]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군에 의해 메솔롱기가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포위된 그리스인들은 밤에 대규모 탈출을 시도했으나, 불가리아인 탈주자의 밀고로 이브라힘에게 발각되어 참패했습니다.
3,000~4,000명의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결하며 항전했습니다.
이브라힘은 도시 주변 늪지를 점령하여 그리스인들의 바다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함락은 유럽 전역에 그리스 문제에 대한 동정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으며, 서구 열강의 직접 개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니 침공 저지]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군이 알미로 근처에서 마니반도로 진군했으나, 베르가스 요새에서 2,000명의 마니 사람과 500명의 그리스인 탈주자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콜로코트로니스의 후방 공격까지 더해져 이집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브라힘은 마니 사람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펠로폰네소스처럼 약탈하겠다고 위협했으나, 마니 사람들은 '당신과 당신네 군대를 기다리겠다'고 답하며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브라힘은 2,500명의 사상자를 내며 마니 침공 계획을 망쳤습니다.
1827
[유럽 열강 런던 조약]
영국, 러시아, 프랑스 세 열강이 런던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약은 오스만 제국이 중재안을 거부할 경우 적대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규정하며, 그리스의 독립 승인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초기에 열강들은 그리스 문제에 미온적이었으나, 조지 캐닝 영국 외무장관의 노력과 이브라힘 파샤 군대의 승전으로 인한 그리스의 위기 심화, 그리고 러시아의 단독 개입 우려가 커지면서 프랑스가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나바리노 해전 대승]
그리스 독립 전쟁의 판도를 바꾼 세계적인 대사건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연합 함대가 나바리노 만에서 오스만-이집트 연합 함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연합군은 배 한 척의 손실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그리스 독립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연합국 함대는 이브라힘의 군대에 대한 보급품 차단을 시도하던 중 이집트군의 도발로 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오스만 제국은 붕괴 위기에 직면했고,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할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집트-투르크 함대 89척 중 14척만 돌아갔고 8천명 이상 사망했습니다.
1828
[프랑스 원정대 진압]
나바리노 해전 이후, 프랑스 원정대 지휘관 니콜라 조세프 메종이 페탈리디에 상륙하여 그리스인들을 지원했습니다.
이들은 10월 30일까지 펠로폰네소스에서 모든 적대 세력, 즉 이브라힘의 이집트군을 몰아내며 그리스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브라힘 군대를 몰아내는 데 협력했습니다. 메종은 무함마드 알리의 승인을 받아 모든 이집트 군대가 펠로폰네소스에서 철수한다는 협정을 시행했습니다.
1829
[아드리아노폴리스 조약]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며 오스만 제국을 붕괴 위기에 몰아넣었습니다.
이에 오스만은 런던 조약과 의정서의 조항에 동의하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그리스 독립을 위한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러시아는 1828년 4월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다음 해 8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와 공국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등 큰 양보를 했습니다.
1830
[그리스 독립국 승인]
영국, 러시아, 프랑스 삼국이 그리스를 자신들의 보호 아래 독립국으로 두기로 하는 의정서에 합의했습니다.
이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최종 목표인 독립 국가 수립을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중요한 외교적 결정이었습니다.
당초에는 레오폴 1세를 그리스 국왕으로 삼고자 했으나 그가 왕위를 거부하고, 카포디스트리아스 암살 사건으로 협상이 지체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의정서는 빈 체제의 정통주의 원칙을 흔드는 선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1832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와 여타 열강 대표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을 체결하여 새 그리스 왕국의 국경선을 아르타-볼로스 선으로 최종 확정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 독립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그리스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독립 주권 국가가 되었습니다.
1832년 5월 런던 회의에서 바이에른 왕자 오톤을 그리스 국왕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군주정을 보장하기 위해 열강이 차관을 맡기며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8월 30일 열강들의 런던 의정서에서 그리스 왕국의 국경선 획정이 비준되며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