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조각가, 예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1:22
권진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테라코타와 건칠 조각으로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가입니다. 생전 고독하고 힘든 삶 속에서도 타협 없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고집했습니다. 현실과의 괴리와 대중의 외면 속에서 고통받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나 사후 재조명되어 그의 작품들은 높은 평가를 받고 아틀리에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22
[부유한 상인의 아들]
함경남도 함흥에서 부유한 상인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훗날 한국 조각계에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거장으로 불리게 됩니다.
1938
1943
[일본 유학, 그리고 징용]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 도쿄로 건너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곧 징용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예술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가혹한 현실에 부딪혔던 그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1944
[징용 이탈과 은신]
징용지였던 히다치의 다치가와 공장에서 이탈하여 고향 함흥으로 돌아와 은신했습니다.
해방 전 불안정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1945
1946
[서울에서 미술 공부]
월남하여 서울 성북동에 체류하면서 화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1947
[미륵대불 조성 참여]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 작업에 조각가 윤효중의 조수로 참여하며 대형 불상 조각에 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불상을 제작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48
[형 간병으로 일본행]
형 권진원의 간병을 위해 다시 일본 도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일본행이자, 훗날 그의 예술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사건들과 연결됩니다.
1949
[무사시노 미술학교 입학]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를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서양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조각가로서의 기틀이 다져지기 시작합니다.
1951
[운명적인 만남, 오기노]
같은 학교 서양화과 재학생인 오기노 도모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되었으나, 비극적인 개인사 속에서 헤어지게 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1952
[이과전 입상]
재학 중이던 37회 이과전에서 입상하며 뛰어난 조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초기 작가 활동에 큰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1953
[이과전 특대상과 동거]
38회 이과전에서 석조 2점으로 '특대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또한, 오기노 도모와 동거를 시작하며 일본에서의 생활이 안정되는 듯 보였습니다.
1955
[테라코타의 시작]
훗날 그의 대표적인 조각 기법이 될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만든 조각) 작업을 이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 세계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59
[동선동 아틀리에 건축]
귀국 후 약 2년에 걸쳐 서울 동선동에 가마와 우물을 갖춘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직접 설계하고 건축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 혼을 불태울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훗날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큰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 아틀리에는 2004년에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34호로 등록되었고, 2006년에는 동생 권경숙이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하여 보존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기증을 통해 확보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문화유산 보존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오기노 도모와 혼인]
일본에서 오기노 도모와 혼인신고를 하며 정식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 생활은 훗날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복잡하게 얽히며 아픔을 남기게 됩니다.
[예술 혼 불태우려 귀국]
홀로 된 노모를 부양하고 은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도모와 재결합을 기대하며 희망에 찬 발걸음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1965
[아내와 비극적인 이혼]
열악한 생활 여건으로 인해 아내 도모를 한국으로 데려오지 못하던 중, 일본 처가에서 보내온 이혼 서류로 인해 오기노 도모와 법적으로 헤어지게 됩니다.
이는 그의 개인사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제1회 개인전, 싸늘한 반응]
서울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당시 추상미술이 주류였던 한국 미술계의 싸늘한 반응에 직면했습니다.
구상 조각을 고집했던 그의 작품은 대중에게 외면당하며 힘든 현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1966
[홍대 강사 출강]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비상근 강사로 출강하며 여러 여학생들을 모델로 삼아 테라코타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원의 얼굴>이 만들어졌습니다.
1968
[건칠 작업 시작]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전시 후 귀국하여 테라코타 외에 삼베에 옻칠을 바른 '건칠' 작업에 착수하며 작업의 폭을 넓혔습니다.
이 시기 다수의 불상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개인전, 도모와 재회]
서양화가 권옥연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오기노 도모와 재회했지만, 그 만남은 눈물로 점철되었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일본 미술계에서는 그의 작품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으며, <춘엽니>와 <애자>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1971
[제3회 개인전, 재차 외면]
명동화랑에서 제3회 개인전을 열었지만, 건칠 작품이 미술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습니다.
사명대사 동상 수주도 취소되는 등 예술가로서의 좌절을 겪게 됩니다.
1972
[의욕 상실과 심신 쇠약]
계속되는 대중의 외면과 현실의 어려움으로 제작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불상을 제작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했으나, 몸에 병까지 얻으며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1973
[고려대, 작품 2점 구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이규호 학예관의 노력으로 그의 작품 <마두>와 <가사를 두른 자소상> 2점을 15만원에 구매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찾아온 한 줄기 희망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고려대 작품 전시 목격]
고려대학교 박물관 미술실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좋은 위치에 전시된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날 저녁 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들으며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틀리에에서 비극적인 죽음]
오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재방문하여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본 후, 동선동 아틀리에로 돌아와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누이동생 권경숙에게 '자신의 아이(작품)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서와 30만원을 남겼습니다.
그날 오후 3시, 직접 지은 아틀리에에서 생을 마감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