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고구려 국왕, 정복 군주, 고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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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2: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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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정복 군주, 고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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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제19대 국왕. - 재위 기간 중 영락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자주적 천하관을 확립. - 백제 거란 숙신 동부여 등 주변국을 정벌하고 신라를 구원. - 고구려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음. - 요동 지역 지배를 확고히 하고 동북아시아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정립. - 불교 장려 및 평양 중시 등 내치에도 힘써 국가의 기반을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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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광개토대왕 탄생]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의 아들 담덕(談德)이 국내성에서 태어났다.

훗날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전성기를 이끌 위대한 군주의 탄생이었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이며, 태어난 해는 소수림왕 4년에 해당한다.

386

[태자 책봉]

아버지 고국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태자로 책봉되며 왕위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아버지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태자가 되었다.

391

[제19대 국왕 즉위]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와 동시에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고구려의 자주적인 천하관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삼국사기》에는 392년 즉위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묘년(391년) 즉위로 새겨져 있어 능비의 기록을 따른다.

392

[백제 북부 변경 공격]

즉위 후 첫 대외 활동으로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 석현성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키며 백제 진사왕을 위축시켰다.

백제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의 군사적 능력에 놀라 군사를 내보내지 못했고, 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들이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거란 정벌 및 백성 귀환]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고구려 백성 1만여 명을 되찾아 돌아왔다.

북방 민족에게 빼앗긴 백성들을 다시 데려오는 인륜적 업적을 달성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 관미성 함락]

백제의 천혜의 요새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무려 20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고구려의 뛰어난 공성 능력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해 12월 백제 진사왕이 급사하고 아신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관미성 함락이 진사왕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393

[평양 9개 사찰 창건]

내치에도 힘써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며 불교를 장려했다.

이는 국가의 정신적 통합과 백성들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해 8월 백제 아신왕이 좌장 진무를 보내 고구려 목책까지 이르렀으나, 이내 회군하였다.

394

[백제 공격 격퇴 및 성곽 축조]

백제의 수곡성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새로 쌓아 방어 체계를 강화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백제의 재침략 의지를 꺾고 고구려 남방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395

[패수 대승 및 거란 정벌]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는 대승을 거두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또한 북으로는 염수(鹽水)까지 진출하여 거란족 비려(稗麗)를 정벌하고 수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염수의 위치는 시라무룬허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396

[백제 위례성 포위 및 항복]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한강 이북의 58개 성과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했다.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냈으며,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개선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점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고구려-백제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백제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398

[숙신 정벌]

동북 국경 지대의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숙신 정벌은 고구려의 동북방 영토 확장을 의미하며, 이 지역의 자원과 인력을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두는 효과를 가져왔다.

399

[평양 순행]

백제와 왜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적할 준비를 하자, 직접 평양으로 순행하며 남방 국경을 살피고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이는 백제와 왜의 위협에 대한 선제적인 대응이었다.

이 순행은 군사적 전략뿐 아니라 민심을 살피고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목적도 겸했을 것으로 보인다.

400

[신라 구원 및 가야 진출]

백제와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구원 요청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고구려군은 왜군을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추격하여 격퇴하며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 사건으로 금관가야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하고 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신라 왕을 교체하는 등 신라를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고구려군이 백여 년 동안 신라 땅에 머물며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후연의 고구려 공격]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를 구원하러 간 틈을 타 후연의 모용성이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여전히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전을 계획하게 된다.

402

[후연 숙군성 함락]

후연의 침략에 대한 보복전으로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며 요동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이 사건은 후연과의 치열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404

[대방 연합군 격퇴]

백제, 왜, 가야의 연합군이 대방 지역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궤멸시켰다.

이는 고구려가 남방 세력의 연합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국경을 철저히 방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는 고구려가 남방 국경에 대한 통제력을 확고히 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후연 정벌 및 연군 함락]

서쪽으로는 후연을 다시 정벌하고, 연군(현재의 베이징 근방)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서방 영토 확장에 힘썼다.

이로써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크게 확장되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영토는 역사상 유례없이 넓은 범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405

[후연군 요동성 격파]

요동을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요동성에서 격파하며 요동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확고한 지배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요동은 고구려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이곳을 방어하는 것은 고구려 국력의 상징이었다.

406

[후연군 목저성 격파]

다시 침략해온 후연군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지역의 방어선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연이은 승리는 고구려의 군사력을 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407

[후연 대규모 격파 및 영토 확장]

5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대규모로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돌아오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을 추가로 점령하며 서쪽 국경을 확장하고 고구려의 막강한 국력을 과시했다.

이와 더불어 남연(南燕)과 우호 관계를 맺어 후연을 견제하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이로써 고구려의 서쪽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으며, 요동 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408

[북연과 우호 관계 수립]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 인물인 고운(高雲)이 북연을 건국하자, 북연과 우호 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 지역의 안정을 확보했다.

이는 외교를 통한 실리 추구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고구려는 북방 민족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통해 다른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했다.

409

[독산성 등 축조 및 민호 이주]

나라 동쪽에 독산성(獨山城)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民戶)를 옮겨 살게 하는 등 국토 방어와 민생 안정에 힘썼다.

또한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며 국정을 살폈다.

이러한 내치 활동은 광개토대왕이 단순한 정복 군주를 넘어 백성의 삶과 국가의 기반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410

[동부여 공격 및 굴복]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이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거나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64개 성과 1,400촌 정복의 상당 부분이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확고히 한 사건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동부여가 이미 고구려의 속국으로 존속하고 있었으며, 이때의 동부여 정벌로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412

[광개토대왕 사망]

38세의 젊은 나이로 국내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삼국사기》에는 413년 10월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법으로 역산하면 412년이 된다.

414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고, 유언에 따라 왕릉을 관리할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정비하여 실행에 옮겼다.

이 능비는 현재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있으며,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 사업과 생애를 기록한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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