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당 전쟁

전쟁, 고대 역사, 동아시아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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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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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은 645년부터 668년까지 23년간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입니다. 당 태종의 침략 야욕과 연개소문의 강경책이 충돌하며 시작되었고 고구려 내분과 신라의 연합 참전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전쟁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막을 내리며 동아시아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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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이연, 수나라에 반기]

수나라의 혼란 속에서 이연이 반란에 가담하며 중국 대륙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조짐을 보입니다.

고구려-수 전쟁의 패배로 피폐해진 수나라는 내부 반란으로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실패와 대규모 토목 공사로 국력이 피폐해지자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고, 지방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웠습니다. 귀족 계층인 관롱 집단마저 등을 돌리며 수나라는 정치적 기반을 잃었습니다. 태원 유수 이연이 이때 반란에 가담하며 장안을 점령하고 황태손 양유를 황제로 옹립한 후 대승상이 됩니다.

618

[당나라 건국]

수 양제가 우문화급 형제에게 암살당하자, 이연은 국호를 '당'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릅니다.

이로써 강력한 중화 왕조 당나라가 건국되었습니다.

수 양제가 강도에서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 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당하자, 이연은 국호를 당(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공이 컸던 둘째 아들 이세민은 진왕에 봉해집니다.

624

[이세민 중국 통일과 영류왕 조공]

이세민이 중국을 재통일하며 당나라의 기반을 확고히 합니다.

한편 고구려 영류왕은 당에 조공하고 요동군공에 봉해지며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이세민은 당나라를 따르지 않는 지방 호족 세력과 반란군들을 모두 제압하고 624년 중국을 재통일했습니다. 같은 해 고구려 영류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평화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포로를 송환하며 조공을 바쳐 당 고조로부터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에 봉해졌습니다. 영류왕은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바쳐 제후국임을 인정했습니다.

626

[현무문의 변]

황태자 이건성, 제왕 이원길이 이세민을 제거하려 모책을 꾸미지만, 이세민은 이를 역이용하여 현무문에서 형제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는 당나라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이세민의 인기가 높아지자 형 황태자 이건성과 막내동생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웠습니다. 이를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와 장군 이정, 이세적 등을 이용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세민은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 아뢰었고, 이연은 그들을 장안의 궁성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이 궁성의 현무문으로 들어선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쏘아 살해했습니다.

[당 태종 즉위와 동돌궐 제압]

이세민이 부황 이연으로부터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당 태종으로 즉위하며, 630년 동돌궐을 제압하고 거란, 해족, 습족, 실위 등 주변 민족들을 당에 복속시켜 대제국 당나라의 기틀을 다집니다.

현무문의 변 사흘 뒤 이연은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두 달 뒤 그에게 양위합니다. 이에 이세민이 황제에 오르며 이듬해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입니다. 태종은 630년 동돌궐을 제압했고, 이에 거란, 해족, 습족, 실위가 당에 스스로 속했습니다.

631

[천리장성 축조 시작]

당 태종은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리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이에 고구려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맡기며 다가올 위협에 대비합니다.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행위를 감행하여 631년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을 헐어버렸습니다. 같은 해 영류왕은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했고, 연개소문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습니다. 연개소문은 강경파 외교론자였으며, 이는 온건파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642

[연개소문의 정변]

연개소문이 자신을 죽이려는 온건파 귀족 180명을 살해하고,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옹립하며 고구려의 최고 권력인 대막리지에 오릅니다.

그는 대당 강경책을 펼치며 당과의 전면전을 예고합니다.

이는 고구려-당 전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됩니다.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인(大人)들이 왕과 상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것을 미리 안 연개소문은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아 거짓 열병(閱兵)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자가 18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고 대신 왕의 조카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입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르고 이전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했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습니다.

644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시작]

연개소문이 신라의 화친 요청을 거절하고 당나라 사신 장엄을 감금하자, 당 태종은 이를 빌미로 삼아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 침공을 시작합니다.

이는 고구려-당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합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중재에 나선 당나라는 사농승 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 협박합니다. 연개소문은 '신라가 수나라 침공 틈 타 빼앗은 땅 500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644년 당 태종은 장엄을 다시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그를 토굴에 가두며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당 태종은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이며, 고구려의 군부 치욕(영류왕 시해)을 씻고 늙기 전에 고구려를 취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장작 대감을 설치해 전선을 제조하고, 식량을 영주로 집결하며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645

[당군 현도성 기습 함락]

당나라 선봉군 이세적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예상을 깬 북쪽 통정진으로 기습 진군하여 현도성을 함락합니다.

고구려 각 성들은 성문을 닫고 수비 태세에 들어갑니다.

당 태종이 친정길에 오르기 전인 644년 11월, 당은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의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했습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이세적이 정예 선발대 6만 명을 이끌고 형세를 위장한 뒤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우회하여 고구려가 예상치 못한 통정진으로 진군했습니다. 이는 과거 수나라가 정공법으로 큰 피해를 본 것을 학습한 전략이었습니다. 645년 음력 4월 1일, 이세적의 선봉 요동도행군은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고, 작은 현도성은 쉽게 함락되었습니다.

[요동성 함락]

당 태종 친정군과 이세적의 연합군이 12일간 요동성을 맹공격한 끝에 요동성을 함락시킵니다.

요동성은 과거 수나라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고구려 요동 최대의 요새였으나, 평지성이어서 신형 포차 공격에 취약했고, 성 서남루에 난 불로 인해 무너졌습니다.

645년 음력 4월 29일, 이도종의 선발 기병부대가 요동성에 도달했습니다. 645년 음력 5월 8일, 고구려 신성과 국내성에서 급파된 4만 구원군이 요동성에 도착하여 이도종의 기병부대와 교전했습니다. 초반 당군이 패주하나 이세적의 본대가 도착하여 고구려군을 협공해 승리했습니다. 645년 음력 5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의 친정군이 요하 늪지대를 건너 요동성에 도달하여 이세적의 요동도행군과 합류했습니다. 당군은 밤낮없이 12일간 요동성을 맹공격했습니다. 신형 포차와 충거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남풍을 이용해 불을 질러 성 안을 태웠습니다. 645년 음력 5월 17일, 요동성이 함락되어 1만여 명이 사망하고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 양곡 50만 석을 탈취당했습니다. 요동성은 요주(遼州)로 개칭되었습니다.

[개모성 함락]

이세적과 이도종이 개모성을 공격해 2만 호의 인구와 10만 석의 양곡을 탈취하며 함락시킵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행군총관 강확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현도성 함락 후 645년 음력 4월 5일, 이도종은 신성에 이르렀으나 공략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에 645년 음력 4월 15일, 당군은 군량이 보관되어 있던 개모성으로 이동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주변 가시성에서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원했으나, 치열한 공방전 끝에 645년 음력 4월 26일,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이 개모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개모성은 개주(蓋州)로 개칭되었습니다.

[비사성 야습 함락]

사면이 절벽인 천혜의 요새 비사성이 당나라 장량의 수군과 정명진의 야간 기습으로 허무하게 함락됩니다.

남녀 8천 명이 죽고 성은 당의 손에 넘어갑니다.

장량(張亮)이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의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습니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유격전에 명성을 떨친 당나라 장수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데리고 선봉으로 야습을 시행하였고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습니다. 645년 음력 5월 1일,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습니다.

[백암성 함락]

고구려 백암성주 손대음의 내응으로 백암성이 당군에 함락됩니다.

당 태종은 항복한 백성들에게 관대함을 베풀며 백암성을 암주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습니다.

이로써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중심부가 당군에 넘어가게 됩니다.

요동성 함락 후 당군은 백암성을 공격했습니다. 오골성의 고구려군 1만 명이 백암성을 구원하러 왔으나 당 선봉 계필하력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645년 음력 5월 28일, 당 태종 친정군이 백암성으로 몰려왔고, 당 우위대장군 이사마는 고구려 군사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백암성은 산성이어서 요동성과 달리 함락이 쉽지 않았으나, 성주 손대음이 비밀리에 항복을 청하고 신호를 보내 성문을 열었습니다. 645년 음력 6월 1일, 백암성이 함락되었고, 이세적의 간언으로 당 태종은 성 안 남녀 1만여 명에게 식량을 주고 80세 노인에게는 비단을 주었으며, 다른 성의 군사들은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주필산 전투 대패]

안시성 부근 주필산에서 고구려 대군 15만과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이 대치합니다.

당 태종의 기만 전술에 넘어간 고구려 선봉 고연수, 고혜진의 부대는 삼면 포위되어 대패하고, 3만 6천8백 명이 항복하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생매장당합니다.

이는 한국사와 중국 한족 간 평원에서 벌어진 유일한 대규모 대회전으로, 고구려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신성과 건안성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반격으로 당군이 밀려나자, 당 태종은 요동성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안시성으로 진격했습니다. 645년 음력 6월 11일, 당 태종의 대군은 안시성 부근에 진격했고, 6월 20일 고구려 15만 대군이 안시성 부근에 도착하여 강 건너 당군과 대치했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 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계필하력 대신 아사나두이에게 돌궐 기병 1천 명으로 고구려 군을 유인하게 했습니다. 고구려 선봉 고연수와 고혜진은 초전 승리에 방심하여 당 태종의 거짓 항복 제의를 믿고 안시성 동남방 8리까지 진격했습니다. 6월 21일 밤, 이세민은 이세적, 장손무기에게 기습 부대를 조직하게 하고 자신도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6월 22일 아침, 당군의 북소리와 나팔 소리에 맞춰 모든 군사들이 진격하며 고연수, 고혜진의 고구려-말갈 연합군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군은 크게 패했고, 3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고연수, 고혜진은 남은 3만 6천8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항복했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모두 생매장당했습니다. 고연수는 홍려경, 고혜진은 사농경에 임명되었고, 설인귀는 유격 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안시성 공략 실패와 당군 퇴각]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고 토산까지 빼앗긴 당 태종은 요동의 추위와 군량 부족, 군마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결국 군대 철수를 명령합니다.

퇴각 중 혹한과 폭설로 당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당나라의 패배로 평가됩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있었다면 이번 원정을 못하게 했을 것'이라 한탄했습니다.

주필산 전투 후 당 태종은 645년 음력 8월 10일 안시성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안시성은 산성이라 공성 무기의 효과가 미미했고, 60일간 총 50만 명이 동원되어 토산을 쌓았으나, 폭우로 토산이 무너지고 안시성 군사에 의해 탈취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결국 645년 음력 9월 28일, 당 태종은 군량과 추위를 이유로 철수를 명령했고, 9월 11일 요택으로 달아났습니다. 10월 퇴각길에 폭풍과 눈, 혹한으로 군사들이 동사하고 소와 말의 70~80%가 죽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당군이 요동 10성을 회복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당의 패배를 강조합니다. 항복했던 고연수는 홧병으로 사망했습니다.

647

[당의 소모전 전략 시작]

1차 전쟁 실패 후 당 태종은 소모전 전략을 수정합니다.

유격전에 능한 우진달과 이해안을 보내 고구려 국경을 1백여 차례 침범하고 적리성 전투에서 고구려군 3천 명을 사살하는 등 변경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646년 당은 설연타를 멸망시키며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위협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647년, 당 태종은 고구려가 산성을 의지해 조기 함락이 어렵다고 판단, 소규모 군사를 자주 보내 고구려 변경을 끊임없이 침범하여 방어에 지치게 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여 국력을 소모시키는 장기 전략으로 전환했습니다.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며 고구려군과 교전하고 외성을 불질렀습니다. 가을 9월, 우진달·이해안은 고구려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워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했으며,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워 3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648

[박작성 공격]

당나라 설만철이 이끄는 대군이 압록강 하구 요충지인 박작성을 기습 공격합니다.

박작성주는 1만여 명으로 방어에 나서고 고구려 구원군 3만 명이 합류하며 격전이 벌어집니다.

당 태종은 우무위 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 보병, 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고구려군을 이겼습니다. 그날 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당군의 고신감 배를 습격했으나 복병에 밀려 물러났습니다. 설만철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압록강 하구의 고구려 요충지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습니다. 박작성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했고, 배행방이 고구려군을 공격했으나 박작성은 험준한 요새라 쉽게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장군 고문으로 하여금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했으며, 격전을 벌인 후 물러났습니다.

649

[당 태종 사망]

고구려 침공을 위한 대규모 선박 건조 계획을 추진하던 당 태종이 사망합니다.

그의 유언으로 더 이상의 고구려 정벌은 중지되며, 당과 고구려 간의 국지전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갑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 30만 대군으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했습니다. 대군 원정을 위해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649년 음력 4월, 당 태종이 사망했습니다. 당 태종은 유언으로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게 했고, 이로써 당과의 국지전은 중단되었으며, 대규모 침공 계획 또한 백지화되었습니다.

654

[고구려, 거란 공격 실패]

고구려가 당에 빼앗긴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말갈군과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지만, 거란 송막 도독 이굴가의 기습으로 5백 명이 참살당하고 7백 필의 말을 빼앗기며 패퇴합니다.

고구려는 당에 빼앗긴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장수 안고로 하여금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보내어 거란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거란의 송막 도독 이굴가가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신성에서 고구려 군을 기습하여 고구려군 5백명을 참살하고 7백여 필의 말을 빼앗는 전과를 얻고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습니다.

655

[고구려, 신라 33개 성 점령]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 33개 성을 점령하며 신라를 압박합니다.

이에 신라 김춘추는 다시 당에 구원 요청을 하게 됩니다.

김춘추가 신라 왕위에 오른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연합해서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했습니다. 고구려, 말갈, 백제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수세에 몰린 신라의 김춘추는 위기 타개책으로 또다시 당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고 당나라가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 말갈,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시 소규모의 고구려, 백제 침공을 계획하게 됩니다.

[귀단수 전투]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나라 정명진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고구려군은 귀단수에서 싸우다 1천여 명의 피해를 입고 외성과 촌락이 불태워진 후 당군은 철수합니다.

655년 음력 2월, 당나라는 영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 중랑장 소정방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습니다. 정명진은 645년 1차 고구려-당 전쟁 때 비사성을 야간 기습하여 함락시켰던 유격전에 능했습니다. 여름 5월, 정명진이 이끄는 당군이 요하를 건너오자, 고구려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습니다. 정명진 등은 고구려를 맹공하여 크게 격전이 벌어졌고, 고구려쪽은 군사 1천여 명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정명진의 당나라 군은 고구려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바로 철수했습니다.

658

[설인귀, 적봉진 함락]

당나라 정명진과 설인귀가 요서 지역 고구려 영토를 침범합니다.

설인귀는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100여 명의 고구려 군사를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웁니다.

여름 6월, 당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기습 침범했습니다. 당나라 설인귀는 부장이 아닌 처음으로 군을 직접 지휘하여 고구려의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군사 100여 명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웠습니다. 당나라의 침범이 예사롭지 않자 이에 고구려에서는 대장 두방루(豆方婁)에게 3만의 병사를 붙여 파견하여 요격하였고 정명진과 설인귀의 당나라 군에 대적하여 크게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659

[설인귀, 고구려 신궁 생포]

당나라 설인귀가 단독으로 고구려 요서 지역을 침범하여 횡산과 석성에서 고구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석성 전투에서는 설인귀가 고구려 신궁을 생포하는 활약을 펼칩니다.

겨울 11월,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가 처음으로 단독으로 군대를 지휘하여 고구려 요서 지역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대장 온사문(溫沙門)이 요격하러 출병하여 횡산(요양 부근의 화표산)에서 설인귀의 부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습니다. 또한 이어서 설인귀의 당나라 군은 석성으로 침입하여, 고구려 군과 전투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당시 지휘하던 설인귀의 활약이 묘사되어 있는데, 설인귀는 단기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의 궁사 한 명을 생포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석성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고구려 군에는 한 신궁(神弓)이 있어서 원거리에서 연속하여 당나라 군의 병사 10여 명을 사살하는 신기를 보이자, 설인귀가 이에 활을 맞 쏘지 않고 직접 말을 몰고 달려들어서 그 고구려 신궁을 생포했습니다.

660

[나·당 연합 백제 멸망]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략하고 멸망시킵니다.

이는 고구려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당나라의 다음 목표가 고구려임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음력 6월에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했습니다.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와 달리 고구려가 남쪽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게 되는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 멸망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어 2차 고구려-당 전쟁 시 대대적인 해상 침공 작전을 기획하게 됩니다.

661

[칠중성 함락과 북한산성 철수]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가 신라 칠중성을 침공, 성주 필부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성 내부의 배신으로 함락시킵니다.

이어서 북한산성을 공격하나 장마로 인해 철수합니다.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해 고구려는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의 군대와 연합하여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했습니다. 20여 일간 신라군이 맹렬히 저항했으나, 성 내부 대나마 비삽의 배신으로 성은 함락됩니다. 성주 필부는 비삽의 머리를 베고 항전했으나 결국 전사했습니다. 이 소식에 무열왕은 크게 슬퍼하며 필부에게 급찬을 추증했습니다. 이제 뇌음신과 생해의 고구려·말갈 군은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포차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장마철로 진입하면서 번개와 벼락이 치는 큰 비가 퍼붓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당의 대규모 해상 침공]

당나라는 총 44만 대군을 6개 부대로 편성, 대규모 해상 침공을 감행합니다.

소정방, 방효태, 임아상의 3개 주력 부대가 대동강 하류에 상륙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계필하력은 압록강 하류를 점령하며 고구려를 남북으로 단절시킵니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습니다.

음력 8월에 당나라는 총 44만의 대군을 6개의 부대로 편성해 고구려를 향해 2차 침공에 나섰습니다. 과거 수 양제, 당 태종의 전통적인 육로 침공 방식에서 벗어나 해상을 통한 대단위 침공이 주력으로 기획되었습니다. 6개 부대 중 4개 부대가 해상으로 침공했으며, 특히 평양성을 직공하려는 소정방·방효태·임아상의 부대는 660년 백제 침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주력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대동강 하류에 상륙하여 방어하던 고구려 군사들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탈취한 후 평양성까지 도달하여 포위했습니다. 9월에는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압록강 하류에 상륙하여 고구려 정예부대 3만 명을 섬멸하고, 연남생을 도주시키며 고구려의 요동과 남부를 단절시켰습니다.

[철륵 반란으로 당군 고립]

평양성 포위 중, 본국 당나라에서 철륵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합니다.

당군은 고구려 원정 부대 상당수를 철륵 전선으로 회군시키고, 평양성을 포위하던 당의 대군은 적진 한가운데서 완전히 고립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집니다.

661년 음력 10월, 흉노의 별종인 철륵의 회흘부 추장 비속독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수도 장안이 위급해지는 긴급상황이 발생했고, 정인태가 이끄는 당의 철륵도행군이 전멸하는 등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로 출병했던 상당수의 부대, 심지어 계필하력의 정예 요동도행군까지 철륵 전선에 추가 투입을 위해 급히 회군하라는 조서가 있었습니다. 해상으로 대거 침입하여 평양성을 포위한 소정방, 임아상, 방효태 등의 당의 대부대는 이제 역으로 적국 한가운데에서 완전 고립상태에 빠집니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보급 단절로 당의 군사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662

[사수 대첩 대승]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고구려군이 고립된 당의 대군에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은 사수에서 몰살당하고, 방효태와 아들 13명이 전사하는 대승리를 거둡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도 무너지며 당의 대규모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661년 음력 12월, 혹독한 추위 속에 얼어붙은 패수(대동강 상류) 부근 사수에서 당군은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구려군의 총반격에 두 진지를 빼앗겼습니다. 662년 음력 2월, 연개소문 지휘 아래 고구려군은 각지의 부대를 모아 고립된 당의 대군에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특히 따뜻한 남부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고구려의 추위를 견디기 더 어려웠습니다. 고구려군은 방효태의 옥저도행군과 임아상의 패강도행군을 공격하여 완전히 몰살시켰습니다. 방효태는 탈출 권유를 거부하고 아들 13인과 함께 전사했으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달했습니다. 패강도행군 대총관 임아상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김유신, 소정방 구원 작전]

고립된 당군 소정방의 요청으로 신라 김유신이 군량 4천 섬을 수송하며 구원에 나섭니다.

김유신은 혹한과 고구려군 추격을 뚫고 군량을 전달하고, 소정방은 이를 받자마자 바다를 통해 대규모 철수 작전을 감행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 비견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 군량 수송 요청이 들어오자, 김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자청했습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국경 밖에서 상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면책 특권을 주었습니다. 662년 음력 정월 23일, 김유신은 쌀 4천 섬과 조 22,250섬을 싣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습니다. 고구려군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 험하고 좁은 길을 택했고, 혹한 속에 지친 병사들을 직접 이끌었습니다. 평양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난새와 송아지 그림 암호를 받은 김유신은 김인문, 김양도 등을 보내 당 진영에 군량을 전달했습니다.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다를 통해 대규모 철수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664

[연개소문 사망과 형제간 내분]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산, 연남건 형제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집니다.

연남산과 연남건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고, 연남생은 당에 구원을 요청하며 국내성을 바칩니다.

이는 고구려 멸망의 치명적인 내분이 됩니다.

664년에서 666년 사이,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지방 순시를 떠났습니다. 이 틈을 타 동생 2남 연남산, 3남 연남건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죽였습니다. 소환 명령을 받은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달아나 세력을 규합하고 당나라에 대형 불덕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요동 통과에 실패했습니다. 평양 중앙정부의 압력으로 연남생은 진로를 바꿔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거듭 구원을 청했습니다. 666년 음력 6월, 당 고종이 계필하력을 보내 연남생을 맞이하게 했고, 연남생은 고질, 고현 등 국내성 귀족들과 부하들을 데리고 당나라로 도주하며 국내성을 바쳤습니다.

666

[연정토 신라에 투항]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가 고구려 남쪽의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합니다.

연개소문 형제의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고구려는 북쪽에서는 연남생이 당에, 남쪽에서는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며 심각한 내부 분열을 겪게 됩니다.

고구려에서 형제간 내부 권력 투쟁이 발생하는 동안,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연남생·연남건 형제의 숙부인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가 고구려 남쪽의 12성, 763호, 3,543명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했습니다. 북쪽에서는 연남생이 당에게 국내성을 바치고, 남쪽에서는 연정토가 신라에게 각각 투항하여 고구려가 심각한 내부 분열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667

[내부 배신으로 신성 함락]

오랜 세월 철옹성으로 불리던 고구려 최고의 요새 신성이 내부의 배신(사부구 등)으로 인해 당군 이세적에게 함락됩니다.

이세적은 신성 함락 후 진격하여 16개 성을 추가로 점령하며 고구려 방어선에 큰 구멍을 냅니다.

666년 음력 12월, 당 고종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667년 봄, 당군이 요하를 건넜을 것으로 추정되나, 6개월 이상 신성 전선에서 고구려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대치했습니다. 667년 음력 9월 14일,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끝까지 항전하던 신성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며 신성이 마침내 함락됩니다.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이 모두 항복했습니다. 신성의 방어에 소홀했던 당군은 연남건의 야습을 받았으나 설인귀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금산 전투 대패]

신성 함락 후, 고구려 주력군 20만과 당나라 군이 금산에서 격돌합니다.

당군은 초반 대패하나 설인귀의 구원으로 반격에 성공, 고구려군 5만 명을 궤멸시킵니다.

이 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대규모 전투로, 고구려의 주력 정예부대가 소멸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신성을 함락시킨 당의 대군은 667년 음력 10월, 방동선과 고구려 항장 고간을 선봉으로 동남쪽으로 진공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남건은 요충지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 주력 정예부대 20만 대군을 모두 소집하여 당의 군대를 요격하려 보냈습니다. 고구려 20만 대군은 동남쪽으로 진공하던 방동선과 고간의 당나라 선봉 부대를 금산에서 만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갑작스러운 고구려 대군에게 밀려 크게 대패하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설인귀의 군대가 신속하게 구원하어 나타나 측면에서 갑작스러운 반격에 나섰고, 이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져 크게 패하여 5만 명을 잃고 무너져 후퇴했습니다. 이로써 고구려군의 주력 정예부대는 소멸되었고, 당과 고구려의 군사적 균형이 무너져 고구려의 일방적인 열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668

[설인귀, 부여성 기습 점령]

설인귀가 단 2천 명의 현갑기병을 이끌고 부여성을 기습하여 점령합니다.

추운 겨울, 흰 옷을 입은 당군이 백설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고구려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고, 부여성 주변 40여 개 성이 모두 항복합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북쪽 예비 병력 자원까지 크게 손실하며 전력 열세가 가중됩니다.

금산 전투 이후 당군은 북쪽의 고구려 후방 지역을 급습하여 후방을 안전히 할 목적으로 북쪽으로 진군했습니다. 667년 음력 11월 하순, 설인귀는 2천 명의 현갑기병을 데리고 전진하여 부여성으로 향했습니다. 부하 장수들은 병력이 너무 적다고 반대했으나, 설인귀는 '병사는 많아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신속히 이동했습니다. 고구려 부여성에서는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신성으로 다시 보내려 했으나 당군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습니다. 겨울에 눈이 내린 곳에서 설인귀의 2천 명 현갑기병은 모두 흰 옷을 입고 고구려 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기습했습니다. 고구려 군은 혼란에 빠져 2만여 명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 7만여 명은 부여성으로 되돌아가 수비했습니다. 668년 음력 2월 20일, 설인귀는 부여성을 기습하여 점령했고, 이에 부여천 안에 있는 부여성 주변 40여 성이 모두 항복했습니다.

[신라군 북진과 한성 함락]

신라 문무왕이 김흠순, 김인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북진을 시작합니다.

고구려 남부의 군사 요충지인 한성(황해도 재령·사리원 추정)을 포함한 2군 12성이 항복하며, 고구려 남부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에게 군사를 징발케 하여 남쪽으로부터 진군하게 했습니다. 이에 신라 문무왕은 김흠순, 김인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668년 음력 6월, 고구려의 남부 군사 요충지였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했습니다. 특히 한성은 국내성·평양성과 더불어 고구려의 3성으로 불리던 고구려 남부의 정치·경제·군사·인구의 중심지였습니다. 8월 12일(음력 6월 29일), 신라 군은 평양을 향하여 북진을 시작했고, 7월 평양 부근 사천벌에 도달하여 고구려 군과 격전이 벌어졌으나 고구려 군이 크게 패했습니다.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한 달 넘게 공격합니다.

결국 승려 신성, 오사, 고요묘 등이 내응하여 성문을 열고 연남건은 할복을 시도하지만 붙잡힙니다.

보장왕이 항복하며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이로써 700년에 가까운 고구려의 역사가 막을 내립니다.

북쪽에서 압록강 방어선마저 붕괴된 가운데, 668년 음력 9월 21일, 신라군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평양성을 포위했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보장왕은 연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막리지 연남건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했습니다. 연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 고요묘 등과 함께 이세적에게 비밀리에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5일 뒤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었고, 당나라, 신라, 거란 연합군이 성안으로 쇄도했습니다. 대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술탈은 신라군과의 교전 중 전사했습니다. 연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할복했으나 죽지 않고 당나라 군사에게 붙잡혔으며, 보장왕도 붙잡히며 고구려는 결국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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