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중국 왕조, 여진족 국가,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2:53
- 금나라는 1115년 여진족 완안부의 아골타가 건국한 중세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한 왕조입니다. - 건국 초기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는 정강의 변을 일으키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 금 세종 치세(1161~1189)에 전성기를 누리며 국력과 여진족 문화 보존에 힘썼습니다. - 그러나 여진족 우대 정책과 한족 차별로 사회적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쇠퇴하다가 1234년 멸망했습니다.
1115
[금나라 건국]
여진족 완안부의 수장 아골타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금'으로 정하며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하게 될 금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아골타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금나라를 건국했습니다. 국호는 '금만이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아골타의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1121
[송-금 연합 요나라 토벌]
금나라는 요나라를 함께 무너뜨리기 위해 송나라와 '해상의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두 강대국이 연합하여 요나라를 협공하는 대규모 전략적 동맹이었습니다.
1122
[요나라 멸망]
금나라 군대가 송나라와의 연합 작전 끝에 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금나라는 요나라의 광대한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1127
[남송 건국]
북송 멸망 후, 송나라의 잔당들이 강남으로 후퇴하여 고종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며 남송을 건국했습니다.
이는 금나라의 남하 정책에 대한 한족의 저항의 시작이었습니다.
[정강의 변 발생]
금나라가 북송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며 북송을 멸망시켰습니다.
송의 황제와 태상황을 포함한 고관대작, 황족 여성들이 금나라로 끌려가는 치욕적인 사건, '정강의 변'이 일어났습니다.
금 태종은 송나라의 황제 흠종과 태상황 휘종을 잡아갔으며, 이들의 황후와 후궁, 모친들을 기방으로 보내 기생으로 삼는 등 극도의 치욕을 안겼습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135
1141
[송-금 굴욕적 화의 체결]
남송은 금나라와 굴욕적인 평화협상인 '화의'를 맺었습니다.
이로 인해 송나라는 화이허 이북의 영토를 모두 금나라에 내주고 매년 막대한 세공을 바쳐야 했으며, 충신 악비를 죽여야 했습니다.
송나라는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매년 조공하고 수 만명의 남송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송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조약 중 하나였습니다.
1149
[희종 암살 및 해릉왕 즉위]
폭정을 펼치던 금나라 희종이 결국 암살당하고, 황위를 찬탈한 완안량이 해릉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해릉왕은 즉위 직후 남송 정복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1153
[중도 천도 (베이징)]
해릉왕은 수도를 상경회령부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겼습니다.
이는 남송 정복을 위한 전진 기지 확보의 의미가 컸습니다.
1157
[상경 여진족 강제 이주]
해릉왕은 중도대흥부의 중요성을 높이고자 상경에 남아있던 여진족들을 강제로 중도대흥부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161
[해릉왕 남송 원정 및 피살]
해릉왕이 대규모 남송 원정을 강행했으나, 무리한 징병으로 상경과 거란족의 반란이 동시에 터져 위기에 처했습니다.
결국 반란 진압 중 휘하 장군들에게 살해당하며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해릉왕이 남송 원정으로 눈이 쏠린 틈을 타, 상경에서는 황실 내 반대 세력이 오록(훗날 금 세종)을 황제로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거란족도 해릉왕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해릉왕은 남송에서 철수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그 해 12월에 장군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1164
[용흥화의 체결 및 반란 진압]
금 세종은 오랜 노력 끝에 거란족 반란을 진압하고 국력 강화를 위해 송나라와 '용흥화의'를 맺었습니다.
이는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1189
[금 세종, 전성기를 이끌다]
금 세종은 1161년부터 1189년까지 28년간 통치하며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여진족의 풍습을 보존하고 농경지 개발을 장려하는 등 뛰어난 선정으로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종은 탈세 방지를 위해 맹안을 재정비하고 농경지 개발을 크게 장려하여 쌀 생산량을 늘렸습니다. 특히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고 여진어로 문학 작품을 편찬했으며 황실 주도의 여진 학교를 설립하고 과거제를 여진어로 보게 하는 등 여진족 문화 보존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족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1207
[남송 토벌 시도 및 굴복]
남송이 금나라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금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더 많은 공물과 공녀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금나라는 송나라 재상 한탁주의 처형까지 요구했습니다.
남송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을 매년 바치는 '세폐'를 약속했으며, 송나라의 주전론자였던 재상 한탁주를 처형시키는 굴욕적인 요구까지 들어주었습니다.
1211
[몽골, 금나라 첫 침략]
몽골의 칭기즈 칸이 이끄는 5만 명의 기병대가 금나라를 침공했습니다.
15만 명의 금나라 기병대가 맞섰으나 패퇴했고, 이는 금나라 국력 약화의 결정적인 시작점이었습니다.
1214
[수도 개봉 천도]
몽골군의 위협이 심화되자, 금나라 선종은 수도 중도대흥부를 버리고 개봉으로 천도했습니다.
이는 몽골의 압박을 피하려는 고육지책이었으나, 수도 방기라는 오명을 낳았습니다.
1213년 몽골족이 금나라의 수도 중도대흥부를 공격했고, 1214년 여름 금나라는 몽골과 조약을 맺어 피해를 줄이려 했으나, 결국 선종은 몽골의 위협을 피해 중도대흥부를 버리고 개봉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1216
[대남송 원정 실패]
금나라 선종이 몽골에게 받은 분풀이를 위해 송나라를 공격했으나, 양쯔강에서 송나라 군에게 크게 패하며 국가의 위신이 더욱 추락했습니다.
1232
[오고타이 칸의 재침공]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 칸이 다시 금나라를 침공하며 멸망을 향한 마지막 압박을 시작했습니다.
금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1234
[금나라 멸망]
금 애종이 채주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되자 자살했고, 뒤이은 금 말제 또한 몽골군에게 살해당하며 금나라는 건국 11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1233년, 애종은 개봉을 탈출해 허난 지역을 전전했습니다. 결국 1234년 채주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마지막 황제인 말제마저 몽골군에 살해당하면서 중세 만주와 북중국을 호령했던 금나라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