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독립운동가, 정치인, 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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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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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정치인, 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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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며 이승만 보좌. - 제1공화국 교통/사회부 장관 서울시장 역임. - 4.19 혁명 후 이승만 하야를 권고 과도내각 수반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혼란 수습 및 2공화국 출범 기여. -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존경받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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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허정 탄생]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동에서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02

[신학문 교육 및 개종]

고향 초량동의 영국인 선교사가 세운 양국서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크리스찬이 되었다.

6세 때 고향 초량동에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짓고 그 옆에 작은 집을 지어 동리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친 곳을 주민들은 양국서당(洋國書堂)이라 불렀으며, 허정도 그곳에 다니며 크리스찬이 되었다.

1904

[초량사립보통학교 입학]

8세 때 초량동에 있는 초량사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0

[보성중학교 입학]

14세 되던 해 초량사립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하여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소년 시절 주시경이 쓴 잔 다르크전을 읽고 감명받았으며, 이동휘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1912

[이승만 사사 및 추종]

YMCA 기독교청년회 학당에서 임병직, 윤치영 등과 함께 이승만에게서 영어를 배우며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1917

[보성전문학교 진학]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여 수학했으며, 이후 중국 상해 오송상선학교와 남경 항해학교 등에서 수학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영국 런던 항해대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919

[3·1 운동 참여 및 망명]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여했다.

[임시의정원 활동]

상하이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임정 직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했다.

[프랑스 유학]

신규식 등 6명의 청년들과 함께 영국 화물선에 승선하여 프랑스로 유학했으며, 일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권을 사용했다.

1920

[개명 및 아호 제정]

프랑스에 도착한 후 어릴 적 이름인 허성수(許聖壽)에서 허정으로 이름을 바꾸고, 바다를 보고 '우양(友洋)'이라는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교민회 활동]

프랑스 거주 한국인 거류민 회장이 되어 교민들을 결속하고 유법한인회(留法韓人會)라는 프랑스 한국인 유학생 친목조직을 결성했다.

6개월 정도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 거주 한국인 거류민 회장이 되어 교민들을 결속하는 데 힘쓰고, 막노동 중 노령에서 건너온 한국인 노동자들의 무식함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멸시당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도움을 얻어 유법한인회(留法韓人會)를 결성했다. 또한 낮에는 막노동과 밤에는 노동을 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을 모아서 한국의 역사, 지리, 국어, 산수 등을 가르쳤다.

[미국 이주 및 교민 활동]

프랑스를 떠나 미국 뉴욕 항에 도착했으며, 생업에 종사하면서 미국 뉴욕 한인유학생회장 등을 지냈다.

1922

[북미 교민단 총단장]

북미 거주 한국인 교민단 총단장을 지내며 교포 사업에 헌신했으며, 이승만과 안창호 모두 그를 자신의 곁에 두려 했다.

1923

[구미외교위원부 활동]

구미외교위원부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며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한인 교포들에 대한 인두세 징수와 기관지 '통보' 발간을 맡았다.

구미외교위원부에서 그가 맡은 일은 한인 교포들에 대한 인두세 징수와 구미위원부 기관지인 구미위원부 통보의 발간이었다. 통보에서 3·1운동의 결정체인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삼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인두세를 납부하는 것은 해외 한국인 교포의 의무임을 강조하는 글을 싣고 인두세를 구미위원부로 보내달라고 호소하였다.

[삼일신보 창간]

미국 교포신문인 <삼일신보> 사장을 창간하고 취임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회에서 일했다.

1932

[구미위원부 사직]

향수병으로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사직하고 귀국을 결심했으며, 삼일신보를 이기붕에게 맡기고 하와이를 경유했다.

[고국으로 돌아오다]

하와이에서 6개월간 태평양 잡지의 발행책임자를 맡은 뒤 귀국했다.

[백귀란과 재혼]

이화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동래 일신여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백귀란과 재혼했다.

1933

[이기붕과 광산 동업]

이기붕이 귀국하자 광산 일을 동업하기도 했으나, 이재에 밝지 않아 사업에 실패했다.

1938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1940

[창씨개명 거부]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을 권고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1942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나 별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1945

[피신]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불령선인 사살 정보를 입수하고 충청북도 영동으로 내려갔다.

[광복과 정치 투신]

경성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즉시 정치 활동에 투신하였다.

[한국민주당 창당 참여]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경상남도 총무로 활동했다.

[임정 요인과의 관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김구를 찾아갔으나 환영받지 못했으며, 송진우 암살 이후 임정 측을 경계하게 되었다.

[서울시장 시정 고문관]

서울특별시장 시정 고문관에 임명되었다.

1946

[민주의원 활동]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지지를 보냈다.

[민족통일총본부 위원]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통일 운동에 참여했다.

1947

[장덕수 암살 관련]

장덕수 암살 후 한독당을 용의자로 의심하며 조소앙에게 항의했고, 이후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돌아섰다.

1948

[UN한국위원단 통역]

UN한국위원단이 서울에 파견되자 환영회를 주관하고, 위원단의 통역을 담당했다.

[제헌국회의원 당선]

부산 을구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제헌국회가 열린 뒤 유진오, 백관수, 조봉암 등과 함께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대통령중심제 주장]

헌법기초위원 회의에 참여하여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 안건 중 대통령중심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교통부 장관 취임]

제2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취임했으며, 좌익 계열의 농성과 파업에 강력히 대응하며 철도 및 교통부 직원의 노조활동을 금지시켰다.

1949

[민국당 입당]

민국당이 조직되자 민국당에 입당했으며, 한민당 고문직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며 당과 거리를 두었다.

[고려역도구락부 고문]

고려역도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김구 암살 빈소 참석]

김구가 암살되자 빈소에 참석하고 국민장 기간 중 참석했다.

[대한석탄공사 창립 건의]

이승만에게 석탄 수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한석탄공사 창립을 건의하여 추진되었다.

1950

[학생정구연맹 고문]

학생정구연맹 고문에 위촉되었다.

[사회부 장관 취임]

사회부 장관이 되었으며, 공무원의 노동조합 가입 주장에 강력히 반대했다.

[민국당 재입당]

민국당에 입당했으나, 6.25 전쟁으로 이렇다할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대한석탄공사 위원장]

서울 상공부 청사에서 조직된 대한석탄공사 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6.25 전쟁과 피난]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와 6.25 전쟁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석탄공사 총재 선출]

피난지 부산에서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자 총재에 선출되었다.

사회부장관으로 석탄공사 총재직을 겸직하다가 1951년 11월 23일 총재직을 부총재 김성호에게 넘겼다.

[사회부장관 재임명]

피난지 부산에서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었고, 민국당을 탈당했다.

1951

[국무총리 서리 겸직]

유엔 총회 참석차 출국 중인 장면을 대신하여 국무총리 서리를 겸직했다.

[석탄공사 총재직 사임]

대한석탄공사 총재직을 부총재 김성호에게 넘겼다.

1952

[총리 서리 전임 발령]

이승만은 국무총리 서리였던 허정에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허정은 직선제 개헌에 반대했다.

[인접영해선언 재천명]

중앙청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인접영해선언은 한국의 정당한 자위책임을 위한 것이라고 재천명했다.

며칠 전 일본정부가 한국의 영해선언을 공해에 있어서의 항해와 어로에 관한 자유를 규정한 국제법을 무시한 일방적인 조치라고 지적하여 정식 항의해온 데 대해서 이상과 같이 정부의 태도를 밝히면서 계속하여 허총리서리는 영해선언을 가리켜 이론이나 정의 또는 공정에 있어서 어긋나는 아무런 점도 없으며 순전히 한국의 정당한 자위책을 위한 것을 강조하고 한편 타국의 수역이나 주권을 무시 혹은 침범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였다.

[휴전 거부 의사 표명]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부당한 휴전은 단호히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부흥부 발족은 나중에 처리하겠다고 언명했다.

[국무총리 서리 사임]

부산정치파동 직전 국무총리 서리직을 사임했다.

[무임소 장관 임명]

이승만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무임소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입각했다.

[무임소 장관 사퇴]

부산정치파동을 본 뒤 두 달 만에 무임소 장관직을 사퇴하고 야인으로 생활했다.

1954

[야당 결성 불참]

민국당 인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반이승만 세력의 호헌동지회와 이후 창당된 민주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일단 이 대통령 정부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를 반대하는 일선에 선다는 것은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 같았기 때문이라고 불참 이유를 밝혔다.

[제3대 민의원 선거]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부산시 을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관권 동원으로 낙선했다.

선거운동원 손홍병(孫洪秉, 당시 59세)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1956

[제4대 대선 출마]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표를 얻었으나 낙선했다.

1957

[서울특별시장 취임]

제8대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어 취임했으며, 인사파동을 지양하고 관청의 장이 갈릴 때마다 발생하는 무분별한 인사이동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58

[한국 YMCA 위원장]

한국 YMCA 재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9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최고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으나, 장면, 조병옥 간의 언쟁 소식을 접하고 민주당 대표직 추대를 사양했다.

[시위 금지 논란]

서울시 시경국장에게 지시하여 서울시내 데모, 집회, 대회를 일체 금지시켜 야당 등으로부터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했다.

[중화민국 특사 방문]

대한민국 특사 자격으로 중화민국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타이베이 체류 종료]

타이베이 체류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 시장의 초청을 받아 필라델피아로 이동했다.

[귀국]

미국 필라델피아 여행을 마친 후 귀국했다.

[서울시장 경질]

귀국 직후 서울특별시장직에서 전격 경질되었다.

이승만과 민주당의 입각 제의를 모두 사양했다.

[한일회담 수석대표 임명]

한일회담 대표단 수석대표로 임명되어 유태하, 장경근 등 대표단원을 데리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4차 한일회담 결렬]

주일공사 최규하의 임석 하에 일본 도쿄로 가 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나 배상 금액 문제로 마찰을 빚다가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주일미국대사 면담]

대표단을 이끌고 주일미국대사 맥아더를 면담했다.

[귀국]

일본에서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했다.

1960

[외무부 장관 기용]

이승만에 의해 혼란 수습을 위한 개각으로 외무부 장관으로 기용되었으며, 수석국무위원직을 겸직했다.

[이승만 하야]

장면 부통령이 사퇴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함에 따라 정부의 공백 상태를 막기 위해 외무부 장관 사퇴 의사를 철회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부통령과 대통령직이 공석이 되자 수석국무위원으로서 과도 정부의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 허정은 '혁명적 목표를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한다'고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과도정부 각료 발표]

과도정부의 입각자 명단을 발표했으며, 각료는 비정당인으로 구성할 것을 밝혔다.

[국무회의 개최]

첫 국무회의를 열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경제 위기를 타개하며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경제사범 엄단 등 5가지 정책을 채택했다.

[이승만 출국 주선]

새벽 김포공항에서 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지시하여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했으며, 직접 공항으로 나가 이승만의 하와이 출국을 주선하고 배웅했다.

허정은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단독으로 주한 미 대사와 상의하여 이승만의 출국을 추진했으며, 이는 그에게 큰 책임 논란을 가져왔다. 허정은 당시의 감정을 '나는 이승만의 아픈 심정을 직접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메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출국 추궁]

국회에서 이승만 출국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았으나, 이 박사의 건강과 시국 수습을 위한 인도적 배려였다고 해명했다.

국회에 불려가서 그 경위에 대해 '이 박사 건강이 아주 나빠졌는데 마침 하와이 거류민단으로부터 요청이 있어 보내드린 것이오. 매카나기 대사로부터 미국에서 입국 허가는 벌써 나와있어 정부가 여권만 내어주면 그분을 휴양차 하와이에 모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단독으로 내 책임하에 비자를 내드렸오'라고 답변했다.

[국무총리 취임]

3차 개헌으로 국무총리직이 부활하자 제6대 국무총리에 자동 취임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사퇴했다.

[권한대행직 재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민의원 의장 곽상훈에게 인계했으나, 곽상훈이 직을 맡을 수 없다며 사퇴하여 6월 23일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면담]

방한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면담했다.

[딸 허원 결혼식 불참]

딸 허원이 하와이 감리교 예배당에서 결혼했으나, 국내 정치 사정상 불참하게 되었다.

[권한대행직 종료]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직에서 물러났다.

[국무총리직 사임]

윤보선이 지명한 장면이 국무총리에 인준되자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 야인이 되었고, 신임 장면 내각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1961

[5·16 군사정변 발생]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했다.

군사혁명의 성공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UN군 사령관의 저지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1962

[정치정화법 대상]

정치활동정화법의 대상자가 되는 불운을 겪었다.

부패 정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주장했으나 요청이 거절당하자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1963

[대선 후보직 사퇴]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직을 자진 사퇴하여 윤보선이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김병로나 이인, 김도연이라면 양보할 의사가 있으나 윤보선에게는 절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섰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했다.

[이승만 환국 추진]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추진하는 '이승만 박사 환국추진회의' 결성에 동참했다.

[신정당 창당]

신정당을 창당했으나, 곧 민우당의 이범석, 대법원장 출신 김병로 등과 국민의당 결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군정연장 반대 시위]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함께 서울시청, 을지로 주변, 주한 미국 대사관 주변 등에서 산책데모를 벌이며 군정연장에 반대했다.

[군정연장 철회 성공]

윤보선과 함께 3차례 박정희와 조야영수회담을 개최하여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철회시켰다.

[제5대 대선 출마]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국민의당 창당 참여]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발기인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

[국민의당 조직 참여]

이범석, 김병로 등과 함께 국민의당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64

[야당 통합 선언]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민주당과 국민의당 통합전당대회에서 국민의당 대표 자격으로 통합선언서에 서명했다.

박순천이 대표최고위원으로, 허정이 최고위원으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다.

1965

[이승만 추도사 낭독]

이승만의 장례식에서 친히 추도사를 지어 낭독했다.

[민중당 창당 참여]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이후 민중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부고 접함]

이승만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이승만 유해 영접]

비행기를 통해 귀국한 이승만의 유해를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서 영접했다.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이승만의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1966

[민중당 고문]

민중당 고문이 되었다.

[장면 빈소 방문]

장면의 빈소를 방문한 뒤 그의 국민장에도 참석했다.

[후보 단일화 추진위원]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후보단일화 추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7

[신민당 입당 및 은퇴]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신민당이 되자 신민당에 입당했으나,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패한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9

[국토통일원 고문]

박정희 정권의 국토통일원 고문직을 수락하여 1979년 박정희 정권 붕괴 때까지 재임했다.

1975

[고려대 명예박사 학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

[국정자문회의 의원]

10·26 사태 이후 최규하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정자문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80

[국정자문회의 의장]

1980년부터 1984년까지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국정자문회의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81

[국정자문회의 재위촉]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위촉되어 1988년까지 국정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82

[청와대 위촉식 일화]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위촉식이 있을 때, 의전실장의 '줄을 서라'는 지시에 강하게 반발하며 기골 있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

1983

[백귀란 여사 사망]

부인 백귀란 여사가 사망했다.

[동남아시아 시찰]

김용완, 남덕우 등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시찰하고 귀국했다.

1988

[청조근정훈장 수여]

인촌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청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허정 별세]

92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사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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