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상
위나라 장수, 삼국시대 인물, 조비 친우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2:29
위나라 개국 공신이자 조비의 각별한 친우.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상용군을 평정하고 오나라를 대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움. 강릉성 공략 실패와 애첩 교살 등 개인적인 비극을 겪기도 함. 조비의 깊은 총애와 신뢰를 받으며 위나라 핵심 인사로 활약한 인물. 삼국지연의에서는 황충에게 부상당하는 모습으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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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휘하에서 첫 관직 임명]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던 시기, 하후상은 군사마로 군에 종군했다. 이후 오관장문학으로 승진하며 조조의 핵심 인재로 자리매김했다.
200년 초반, 조조가 기주 지역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하후상은 군사마로 활약하며 조조의 군사 작전에 기여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후에 오관장문학으로 승진하며 조조 진영 내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 조조의 신임을 얻으며 그의 측근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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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의 오환 정벌 참군 수행]
대군에서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의 아들 조창이 이를 정벌하러 나섰고, 하후상은 조창의 참군(參軍)으로 출정하여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군(代郡) 일대에서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켜 혼란을 야기하자, 조조는 아들인 조창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하후상은 조창의 참군으로 동행하여 군사적 조언과 지휘를 보좌하며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 경험은 그의 군사적 역량을 더욱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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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건국과 함께 고위직 임명]
위나라 황조가 수립되자, 하후상은 정남장군, 형주자사, 가절, 도독남방제군사 등 남방 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중요한 고위직에 임명되며 조비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220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자, 하후상은 조비의 측근으로서 큰 신뢰를 받았다. 그는 정남장군(征南將軍) 겸 형주자사(荊州刺史), 가절(加節), 도독남방제군사(都督南方諸軍事)에 임명되어 위나라 남방 국경의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이는 그가 위나라의 핵심 요인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상용성 기습 및 3군 9현 평정]
하후상은 조비에게 상용성 기습을 건의하고 서황과 함께 촉나라 유봉을 격파했다.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 3군 9현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워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
220년, 하후상은 황제 조비에게 전략적인 상용성 기습을 진언했다. 조비의 승인을 받은 그는 서황(徐晃)과 함께 촉나라의 부군장군 유봉(劉封)을 물리쳤다. 이 작전으로 상용태수 신탐(申耽)의 항복을 받아내어 3개 군과 9개 현을 위나라 영토로 편입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로로 그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승진하고 형주목(荊州牧)을 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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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성 포위 및 오나라 구원군 격파]
조비의 남정 중, 하후상은 조진, 장합과 함께 오나라의 강릉성을 포위했다. 오나라 제갈근의 구원군이 오자 배를 불태우고 수륙 병진 공격으로 격파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으나, 주연의 굳건한 항전과 역병으로 성은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황초 3년(222년), 위 문제 조비가 친히 완(宛)으로 내려와 오나라를 남정할 때, 하후상은 조진(曹眞), 장합(張郃) 등과 함께 강릉성(江陵城)을 포위했다. 오나라의 제갈근(諸葛瑾)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하후상은 기지를 발휘하여 제갈근 군대의 배를 불태우고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그러나 강릉성 내 주연(朱然)의 강력한 항전과 군중에 역병이 돌아 결국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삼각주 진입 작전은 동소의 조언으로 철회되어 큰 피해를 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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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았으나 철회됨]
황제 조비는 하후상에게 아랫사람을 처벌하거나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장제(蔣濟)의 간언으로 조서의 내용은 철회되었다.
위 문제 조비는 하후상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그에게 아랫사람에 대한 형벌과 은혜를 직접 베풀 수 있는 파격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사실상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의 일부를 위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하 장제(蔣濟)가 황제에게 간언하여 이러한 조치가 가져올 부작용을 설명했고, 조비는 장제의 말을 받아들여 해당 조서를 철회했다. 이 사건은 하후상이 조비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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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 5년(224년), 하후상은 기존의 작위에서 창릉향후(昌陵鄕侯)로 옮겨 봉해졌다. 이는 그의 공로와 황제 조비와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유지된 특별한 예우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조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애첩 상실로 인한 비탄과 병세 악화]
하후상이 본부인보다 애첩을 더 사랑하자 조비는 애첩을 교살했다. 하후상은 극심한 비탄에 빠져 병을 얻었고, 정신이상이 올 정도로 상심하여 이미 묻은 애첩의 무덤까지 찾아갔다.
하후상이 본부인인 조씨(曹氏)보다 자신의 애첩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자, 친우인 위 문제 조비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 애첩을 교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에 하후상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극심한 비탄에 잠겨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일 정도로 병이 깊어졌다. 심지어 이미 매장된 애첩의 무덤을 다시 찾아가보고 싶어 할 정도였다. 조비는 이를 듣고 분노했으나, 오랜 구신으로서의 정과 은총으로 인해 이전과 같이 그를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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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및 도후 시호 받음]
애첩 상실의 슬픔으로 얻은 병이 깊어져 서울로 돌아왔다. 조비는 직접 병문안을 와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를 아꼈고, 사망하자 '도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황초 6년(225년), 애첩을 잃은 슬픔으로 얻은 하후상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고향인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황제 조비는 그를 매우 아꼈던 관계로 여러 차례 직접 병문안을 찾아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하후상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조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도후(悼侯)'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