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
문신, 학자, 외교관, 저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2:24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최부는 1454년 나주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학자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관직에 나선 후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하며 명철한 식견을 인정받았죠. 특히 1488년 중국에 표류하여 겪은 일을 기록한 《표해록》은 당시 중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기록으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하지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고 사후에야 복권되었습니다.
1454
1477
1482
[알성시 문과 급제]
알성시에서 문과 을과 1등(전체 3등)으로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홍문관 수찬 등 다양한 관직을 거쳤다.
1486
[중시 을과 1등]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 중 치러진 중시에서 을과 1등(전체 2등)에 오르며 그의 문한적 능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등 국가 편찬 사업에 참여하며 풍부한 역사적 식견과 명철한 논리로 당대 사림의 주목을 받았다.
1488
[중국 표류와 《표해록》 저술]
제주도 추쇄경차관 임무 수행 중 부친상 소식에 강진으로 가던 최부는 폭풍우를 만나 배가 중국 절강성으로 표류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그는 42명의 일행과 함께 극적으로 육지에 도착, 중국 관리들의 호송을 받아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무사히 귀국했다.
귀국 후 성종의 명으로 표류에서 귀국까지의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표해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15세기 후반 중국 동부 연안의 생활과 문화를 외부자의 시점에서 상세히 기록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기록이자 귀중한 사료로,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알려지며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각인시킨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표류 기간 중 상복을 고집하며 부친에 대한 예를 다한 그의 모습은 중국 관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표해록》은 중국의 도시, 풍습, 요리, 대운하를 통한 상업 교류 등 당시 중국의 일상생활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하며, 현재까지도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1492
[사헌부지평 임명]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후 사간원 사간을 거치며 언론, 감찰, 교육 등을 담당하는 삼사에서 활발한 관료 활동을 이어갔다.
1497
1498
[무오사화 연루 유배]
사간원 사간으로 재직 중이던 연산군 4년, 김일손의 조의제문 필화 사건이 무오사화로 확대되면서 김종직의 문인을 자처했던 최부 또한 연루되었다.
조의제문의 실록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명으로 곤장을 맞고 경상도 단천군으로 유배되었다.
최부 외에도 이종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흔 등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 삽입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받고 유배되었다.
1504
[갑자사화로 참형]
유배 중이던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연산군의 무오사화 관련자에 대한 엄벌 지시로 유배지에서 비극적으로 참형당했다.
1506
[사후 복권 및 추증]
사후 2년이 지난 중종 반정 이후 복권되어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그의 문집과 《표해록》은 후대에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특히 《표해록》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본이 제작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