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옹

학자, 서예가, 역사가, 정치인, 음악가, 천문학자, 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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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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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옹은 후한 말기의 위대한 학자이자 서예가 역사가입니다. 그는 5경 석경 제작을 주도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으나 환관의 모함으로 유배당하고 도피 생활을 하는 등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후 동탁에게 등용되어 파격적인 고속 승진을 했으며 동탁의 폭정 속에서도 노식을 구하고 묘호를 개정하며 바른 정치를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동탁의 죽음을 탄식했다는 이유로 왕윤에게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혼란했던 후한 말기의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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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삼호법 개정 요구]

관직에 있는 인척 간의 결탁을 막는 '삼호법'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이 등용되지 못하자, 채옹은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뽑을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채옹이 당시 관료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개혁을 추구했음을 보여줍니다.

자기나 자기 인척의 본적이 있는 지방의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는 법인 삼호법으로 인해 유주와 기주에서 관리가 없어도 쉽게 등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채옹은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개정을 요청했습니다.

[5경 석경 제작 주도]

후한 영제의 명으로 유학 경전 '5경'의 글자를 바로잡고, 고문, 전서, 예서 세 가지 서체로 직접 글씨를 써 비석에 새겨 넣었습니다.

이 비석이 세워지자 채옹의 글씨를 보려는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이는 그의 서예 실력과 학자로서의 명성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영제는 유학자들에게 5경의 문자를 바로잡게 했고, 채옹은 의랑으로서 이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완성된 비석은 당시 최고의 서예가였던 채옹의 글씨로 새겨졌으며,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178

[환관 모함으로 유배]

궁궐에 푸른 무지개가 나타나 불길하다 여겨지자, 채옹은 환관인 정황과 곽옥 등을 비판하며 어진 인재 등용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이 환관 조절을 통해 정황에게 알려졌고, 앙심을 품은 정황의 모함으로 숙부 채질과 함께 옥에 갇혔습니다.

다행히 다른 환관 여강의 도움으로 사형은 면하고 머리를 깎인 채 삭방으로 귀양 갔습니다.

채옹은 푸른 무지개 현상을 계기로 조정의 문제를 지적하며, 환관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인재 등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정황은 양구와 채질의 불화를 이용해 채옹을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여강의 노력으로 사형은 피했으나, 유배지에서도 암살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179

[재등용 상소 기각]

귀양 중이던 채옹을 재등용하려는 여강의 상소가 영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사면령으로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오원 태수 왕지의 모함으로 조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를 받아 동탁이 부를 때까지 계속 도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채옹의 불운이 계속되었던 시기입니다.

여강은 179년에 채옹의 재등용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영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사면 후에도 왕지의 모함으로 인해 채옹은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동탁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189

[동탁에 의해 등용]

하진 사후 정권을 잡은 동탁은 채옹의 명성을 듣고 조정으로 불렀습니다.

채옹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지만, 동탁의 가문 멸족 협박에 결국 응했습니다.

동탁은 채옹을 극진히 대접하며 단 '3일 만에' 시중으로 파격적인 고속 승진을 시켰고, 이후 좌중랑장, 고양향후에 봉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습니다.

동탁은 채옹의 학식과 명성을 높이 평가하여 강제로라도 조정에 불러들였고, 즉위 후 채옹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려 했습니다.

[노식의 목숨을 구함]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우려는 뜻을 비치자, 노식이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에 동탁이 노식을 죽이려 했으나, 갓 등용되어 동탁의 신임을 받던 채옹이 간언한 덕분에 노식은 죽음을 면하고 벼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는 채옹이 불의에 맞서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노식의 소제 폐위 반대에 동탁이 격분하여 죽이려 하자, 채옹은 즉시 달려와 동탁에게 간언하여 노식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190

[묘호 개정 건의 채택]

채옹은 후한 화제, 안제, 순제, 환제 등 네 황제의 묘호(사당의 이름)를 모두 없앨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져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채옹이 역사가이자 유학자로서의 깊이 있는 식견을 바탕으로 조정의 의례와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채옹은 화제(목종), 안제(공종), 순제(경종), 환제(위종)의 묘호를 없애자고 건의했으며, 이는 《자치통감》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91

[동탁 상보 추대 저지]

동탁의 부하들이 동탁을 태공망 여상에 비유하며 '상보'로 추대하려 하자, 채옹은 반동탁 연합군이 진압되고 낙양으로 환도한 후에 실행할 것을 건의하여 이 일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는 채옹이 동탁의 과도한 권력욕을 견제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적인 판단력을 갖춘 인물임을 드러냅니다.

동탁의 부하들이 동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상보로 추대하려 했으나, 채옹의 현실적인 간언으로 인해 이 계획은 연기되거나 중단되었습니다.

192

[동탁 탄식과 비극적 최후]

왕윤이 동탁을 죽였을 때, 채옹은 같은 자리에 있다가 동탁의 죽음을 탄식했습니다.

이를 노엽게 여긴 왕윤은 채옹을 죽이려 했고, 채옹은 한나라 역사 저술을 조건으로 목숨을 구하려 했습니다.

상서복야 사손서와 태위 마일제 등 대부분의 신하들도 채옹을 구제하려 했으나, 왕윤은 끝내 듣지 않고 채옹을 죽게 했습니다.

불세출의 학자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순간입니다.

채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역사를 저술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많은 신하들이 그의 학문적 가치를 들어 구명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윤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후한서》와 《자치통감》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나, 모두 왕윤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음을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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