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소
관료, 작가, 역사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2:03
응소는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탁월한 행정 능력과 전략적 통찰력을 겸비한 관료였습니다. 특히 30만 황건적을 격파하며 태산의 수호자로 불렸고 조조의 복수를 피해 망명길에 오르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무인에 머무르지 않고 《한관의》 《풍속통의》 등 136편의 방대한 저술을 남기며 후한 지식의 보고 역할을 수행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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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족 병사 징병 논의 참여]
한수 등의 강족 반란 발생 시, 황보숭의 오환족 징병 요청에 반대하며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강족에서 병사를 징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받아들여졌습니다.
중평 2년(185년), 한양의 한수 등이 강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 토벌에 나선 황보숭이 오환족 병사 3,000명을 요구하자, 북군중후 추정은 오환족이 약하니 선비족보다 징병을 많이 해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응소는 선비족은 한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억제하기 어려운 종족이므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강족에서 징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191
[태산태수로서 황건적 격퇴]
태산태수 재직 중 황건적 30만 명이 침입하자, 군을 통솔하여 황건적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에서 수천 명을 참수하고 1만 명의 포로를 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초평 2년(191년), 태산태수에 임명된 응소는 황건적 30만 명이 군의 경계에 침입해 오자, 군의 문·무관들을 통솔하여 황건적을 무찔렀습니다. 이때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으며, 1만 명 가량의 포로를 잡았고 2천 량의 치중을 빼앗는 등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94
[조숭 피살 사건과 원소 망명]
조조의 부친 조숭이 이주하는 것을 맞이하려 했으나, 도겸이 보낸 장개에게 조숭이 살해당했습니다. 조조의 보복이 두려워 태산군을 버리고 기주목 원소에게 의탁했습니다.
흥평 원년(194년), 연주목 조조의 부친 조숭이 낭야에서 태산으로 이주하려 하자 응소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맞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서주목 도겸이 파견한 장개가 조숭을 공격하여, 응소의 군세가 합류하기 전에 군의 경계에서 조숭을 죽였습니다. 응소는 조조에게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군을 버리고 기주목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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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의》 저술 및 헌상]
《한관의》(漢官儀)를 완성하여 헌제에게 바쳤습니다. 이 저술은 당시 혼란 속에서 유실된 제도에 관한 많은 서적을 보완하고 제도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건안 원년(196년), 응소는 《한관의》(漢官儀)를 완성하여 헌제에게 바쳤습니다. 당시 헌제는 도읍을 허로 막 옮겼을 때였고 혼란 속에서 제도에 관한 많은 서적이 유실되었는데, 《한관의》를 통해 제도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7
건안 2년(197년), 헌제의 명으로 원소의 군모교위(軍謀校尉)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헌제와 원소 사이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204
조조가 업을 점령하기 전인 204년 경, 응소는 업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사망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조조가 업을 점령하기 직전 또는 그 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