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흠
인물, 장군, 삼국시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1:23
문흠은 삼국시대 위와 오를 넘나들며 혼란의 중심에 섰던 장군입니다. 뛰어난 무용과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예측 불가능한 행보와 불같은 성정으로 여러 차례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특히 아들 문앙의 용맹함은 당대 최고로 손꼽히며 그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권력을 향한 갈망과 독립적인 기질이 그를 파란만장한 운명으로 이끌었으며 결국 동맹군에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219
219년, 업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노리고 위풍이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나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문흠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아버지 문직의 공으로 인해 조조가 사면해 주었다.
227
태화 연간에 오영교독이 되었고, 아문장이 되었다.
240
[여강태수 재임 및 교만]
여강태수와 응양장군에 임명된 후 실정으로 중앙에 소환되었으나, 조상의 비호로 다시 여강태수 겸 관군장군으로 복귀하며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전임하여 여강태수 및 응양장군이 되었다. 왕릉이 상주하여 문흠의 실정을 치죄하길 구해 중앙으로 불러들여졌으나, 당시 권세를 쥔 조상과 동향이었으므로 문흠의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후대하였다. 이에는 조상의 최측근 심복 정밀의 계책이 있었다. 다시 여강으로 돌려보내, 관군장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문흠은 더욱 교만해지고, 허명을 높였다.
243
문흠은 육안 땅에 진영을 두고 오나라의 도망자나 반란자를 유인하여 변방에 피해를 주고 있었는데, 주이의 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 이는 적오 4년(243년) 이후의 일이다.
250
적오 13년(250년) 겨울 10월, 거짓으로 모반하여 주이를 유인했다. 그러나 주이가 거짓 투항으로 알고 신중하게 대처하였으므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252
[양주자사 임명과 제갈탄과의 불화]
조상 주살 후 전장군에 이어 제갈탄을 대신해 양주자사에 임명되었으나, 제갈탄과 사이가 나빠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조상이 주살된 후, 위로 차원에서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해했다. 제갈탄을 대신해 양주자사가 되었다. 양주의 군권을 쥔 제갈탄과는 사이가 나빠 모의를 함께하지 않았다.
253
253년,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포위하였을 때 관구검과 함께 방어했다.
255
[낙가 전투 패배와 사마사의 위기]
아들 문앙의 기습으로 사마사를 위기에 빠뜨렸으나, 자신은 사마사의 추격으로 낙가에서 격파당했고, 이 패배로 관구검의 군대가 붕괴되었습니다.
관구검의 명령을 받아 낙가에 주둔하고 있는 연주자사 등애의 군대를 쳤으나, 사마사가 곧 등애를 구원하였다. 아들 문앙의 진언으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적을 협공했는데, 과연 문앙의 습격은 성공했으나 문흠이 약속한 시각에 늦어 뜻대로 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문앙의 기습에 놀란 사마사는 눈이 튀어나와 목숨이 경각간에 처했었다. 윤달 16일, 사마사는 기병으로 문흠을 추격하여 낙가에서 격파했다. 이 패배를 들은 관구검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정원 2년(255년) 정월, 관구검과 함께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수춘 일대의 사람들을 협박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성은 노약자들로 지키게 한 후, 5~6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주 항현으로 진격했다. 관구검은 성을 지키고, 문흠은 유격대를 맡았다.
[오나라 망명 및 고위직 제수]
관구검·문흠의 난 실패 후 오나라로 도망쳐 승상 손준에게 투항했고, 오나라에서 도호, 진북대장군, 유주목, 초후의 높은 관직을 받았습니다.
이 패배를 들은 관구검의 군대는 붕괴되었으며, 문흠은 오나라로 도망쳐 마침 수춘을 치러 오던 승상 손준에게 투항했다. 오나라에서는 문흠을 도호(都護)·가절(加節)·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유주목(幽州牧)·초후(譙侯)로 삼았다.
256
[손준 사후 여거 체포 시도]
손준이 죽자 여거, 당자와 함께 등윤을 승상으로 추천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조서를 받아 여거를 체포하려 공격했습니다.
손준이 죽자 여거·당자와 함께 표를 올려 등윤을 승상으로 임명하도록 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서를 받아 유찬·당자와 함께 여거를 체포하고자 쳤다. 여거는 자살했다.
[손준의 위나라 공격 명령 참여]
손준에게 위나라를 칠 계책을 냈고, 여거, 유찬, 주이, 당자와 함께 회수와 사수로 들어가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이듬해(256년), 손준에게 위나라를 칠 계책을 내었다. 8월, 손준에게 여거·유찬·주이·당자와 함께 회수와 사수로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257
[제갈탄의 난 구원군 합류]
당자 등과 3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구원하기 위해 성내에 진입했으나, 포위망을 뚫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듬해(257년) 6월, 당자·전단(全端)·전역(全繹)·왕조(王祚)와 함께 3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구원하여, 왕기가 포위망을 완성하기 직전 성내에 들어가 주이와 호응하여 여러 차례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258
문흠이 제갈탄에게 주살당하자, 아들 문앙과 문호는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문앙과 문호는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투항했었던 사람들이었고, 사마소의 형 사마사를 병들어 죽게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위나라에 다시 투항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마소가 이들을 용서하고, 이들에게 수춘성 주위를 돌면서, "나같은 사람도 위나라에서 용서해 주었다"고 외치게 했다. 이들의 외침을 들은 제갈탄의 병사들은 더더욱 항복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제갈탄의 난이 평정된 후, 두 아들들은 허락을 받아 문흠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듬해(258년) 1월, 문흠은 전씨 일족들이 투항했으므로, 이쪽이 크게 불리하게 되어 저쪽이 방비가 없을 때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갈탄과 당자도 이를 옳게 여기고 포위망을 뚫고자 맹렬히 싸웠으나 결국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문흠은 위나라 군사를 내어 보내고 오나라 군대들로 성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제갈탄은 듣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쁜 사이였는데 단지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결국 제갈탄은 문흠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