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도
군벌,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55
- 후한 말 대혼란의 시대에 요동 땅에서 독자적인 제국을 꿈꾼 야심가. - 흩어진 인재를 모으고 주변 이민족을 제압하며 요동을 안정시키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 - 중앙 조정의 권위를 무시하며 스스로 왕업을 꿈꾼 대담한 리더. - 그의 삶은 난세 속에서 강인하게 살아남아 시대를 뒤흔든 군벌의 전형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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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녕 2년, 유도(有道)로 천거되어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다. 이후 점차 승진하여 기주자사에 이르렀으나, 유언비어에 휘말려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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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태수 부임 및 호족 숙청, 이민족 정벌]
같은 군 사람 서영의 추천으로 요동태수에 부임했습니다. 부임 즉시 뿌리 깊은 호족들을 대거 숙청하여 100여 가문을 멸문시키고,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오환을 쳐서 위엄을 떨쳤습니다.
중평 6년, 동탁의 중랑장이었던 같은 군 사람 서영의 추천으로 요동태수에 임명되었다. 요동 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기자, 부임하자마자 공손소, 전소 등 뿌리 깊은 호족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멸문한 가문은 100여 가에 이르렀다. 또한 동쪽으로 고구려, 서쪽으로 오환을 쳐서 위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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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업 도모 야망과 이민 일족 숙청]
중원이 혼란해지자 참위서의 예언을 근거로 왕업을 도모할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발견된 거석이 길조라 해석하자 크게 기뻐했으며, 자신을 꺼린 저명인사 이민의 무덤을 파헤치고 일족을 몰살하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초평 원년,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심복 관원들에게 참위서의 손등이 천자에 오른다는 예언과 자신의 이름, 자를 연관 지어 왕업을 도모할 뜻을 밝혔다. 양평현 연리에서 발견된 거석을 길조로 해석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하내태수를 역임했던 저명인사 이민이 자신을 꺼리자, 크게 노하여 이민의 아버지 무덤을 파고 시체를 불태웠으며 그 일족을 몰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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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분할 및 독립적 통치 기반 마련]
요동을 나누어 중료군과 영주자사를 설치하고, 스스로 요동후와 평주목을 칭했습니다. 아버지 공손연을 건의후로 추봉하고, 유방과 유수의 제묘를 세우며 천자에 버금가는 의례를 행했습니다.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에 중료군(中遼郡)을 만들었다. 산둥반도에 있는 동래군의 여러 현들도 규합하여 영주자사(營州―)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平州牧)을 칭하고 아버지 공손연은 건의후(建義侯)로 추봉하였다. 한 고조와 후한 광무제의 제묘를 세우고 천지에 제사지내고 적전(藉田)을 두고 어가를 타고 구류(九旒)를 사용하고 모두기(旄頭騎)와 우림기(羽林騎)를 편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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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피난민 요동 유입 및 인재들의 재야 활동]
중원의 혼란을 피해 안정된 요동으로 왕렬, 관녕, 병원 등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공손탁의 등용 제안을 거절하고 재야에서 활동하며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공손탁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황건적과 동탁의 난을 피해 안정된 요동으로 몰려오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왕렬, 관녕, 병원, 국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공손탁이 등용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재야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병원은 공손탁에게 죽을 뻔한 유정(劉政)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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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및 부여와의 관계 정립]
고구려 고국천왕 세력과 연합하여 부산적을 무찌르기도 했지만, 고구려와는 자주 다투는 관계였습니다. 또한, 선비족을 견제하기 위해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가족을 시집보내며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고구려 고국천왕의 대가 우거, 주부 연인 등과 공조하여 부산적을 무찌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와는 자주 다투었다. 선비족 역시 견제하기 위해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집안사람을 시집보내 우호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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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위 다툼 개입]
고구려 고국천왕 사후 왕위 쟁탈전에서 밀린 발기가 공손탁에게 귀순했습니다. 공손탁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동생 계수에게 패하고 자살했습니다.
197년 고구려 고국천왕 사후, 발기가 동생 산상왕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연노가와 함께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공손탁에게 귀순하였다. 발기는 공손탁에게서 3만 명을 지원받아 고구려로 쳐들어갔지만 동생 고계수에게 패하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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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관직 거부 및 병사]
조조가 무위장군과 영녕향후 직위를 제안했으나, "내가 요동의 왕이다!"라며 인수를 거부했습니다. 그 해 병사하여 장남 공손강이 뒤를 이었으며, 차남 공손공은 영녕향후에 봉해졌습니다.
건안 9년, 조조가 표를 올려 공손탁을 무위장군(武威將軍), 영녕항후(永寧鄕侯)로 삼았다. 공손탁은 “내가 요동의 왕이다! 영녕향후가 대수랴!”며 인수를 무기고에 처박았다. 그 해 병사하여 장남 공손강이 뒤를 이었다. 차남 공손공은 영녕향후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