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연
중국 삼국시대, 군벌, 정치가, 장군, 연왕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54
공손연은 중국 삼국시대 요동 지역의 군웅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 숙부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후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쳤습니다. * 스스로 연왕을 자칭하고 소한이라는 독자 연호까지 사용하며 위 오 촉 삼국 외의 독립 세력을 꿈꿨습니다. * 하지만 위나라의 사마의가 이끄는 대규모 토벌군에 참패하며 50여 년간 요동을 지배했던 공손씨 정권의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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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 몰아내고 권력 장악]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고 숙부 공손공에게 요동 태수 자리를 내주었던 공손연이, 숙부를 위협하여 마침내 요동 태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이를 추인하고 양렬장군 관직을 추가로 부여하며 그의 권력을 인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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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의 은밀한 접근]
당대 최강 세력 중 하나인 오나라의 황제 손권이 교위 장강과 관독을 파견하며 공손연에게 접근해왔습니다.
이는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공손연의 독자적인 세력 확대를 꾀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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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의 고위 관직 수여]
위나라 황제 조예는 공손연의 세력을 견제하면서도 달래기 위해 그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시켜주었습니다.
이는 요동 지역의 독립적인 군벌이었던 공손연에게 상당한 명예와 권위를 부여한 조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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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황제의 줄다리기 시작]
오나라와 가까워지자 위나라 조예는 전예와 왕웅을 보내 공손연 정벌을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물러났습니다.
공손연은 이에 화답하듯 담비와 말을 바치며 오나라에 칭번했습니다.
손권은 기뻐하며 그에게 청주목 관직과 함께 '연왕'이라는 작위까지 수여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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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사신 참수, 위나라 회유]
오나라에서 만여 명의 대규모 호위와 함께 책봉 조서, 금은보화, 심지어 황제에게만 내려지는 구석까지 가져오며 사신단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공손연은 오나라가 너무 멀어 의지하기 어렵다고 판단, 오나라 사신 장미 등 4명을 전격 참수하고 수행원들을 구속했습니다.
심지어 오나라 군대까지 무찌른 뒤 몰수한 물품과 사신들의 목을 위나라 조예에게 바쳤습니다.
이 공로로 위나라로부터 대사마와 낙랑공 작위를 받았지만, 위나라는 그를 점점 더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공손연의 과감한 배신 행위는 위, 오 양국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뒤흔든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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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자칭 및 독자 연호 선포]
위나라가 관구검을 보내 정벌을 시도했으나, 공손연은 요수현에서 이들을 격퇴했습니다.
이 승리에 힘입어 공손연은 오나라 손권이 부여했던 '연왕' 작위를 스스로 자칭하고, 심지어 '소한'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까지 선포했습니다.
이는 위, 오, 촉 삼국 외에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사실상 독립적인 제국을 꿈꿨던 극히 대담한 행보였습니다.
동시에 다시 오나라와 선비족에게 손을 벌리며 위나라와의 전면전에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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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의 대규모 토벌군 출정]
위나라의 태위 사마의가 우금, 호준 등을 이끌고 보병과 기병 4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손연 토벌에 나섰습니다.
요동의 공손연 세력을 뿌리 뽑으려는 위나라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군이었습니다.
[사마의의 기만 작전 성공]
사마의의 대군이 요수(遼水)에 도달하자, 공손연은 비연과 양조 등 수만 명을 요수현으로 출격시켜 20여 리에 걸쳐 해자 등의 장애물을 설치하며 방어했습니다.
사마의는 동남쪽 방향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다가 북쪽으로 우회하여 강을 건너 양평으로 직행했습니다.
공손연의 군대는 당황하여 진지를 버리고 사력을 다해 추격했지만, 수산마저 뚫리며 수도 양평이 포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절망적인 양평성 포위전]
사마의는 30여 일간 계속된 비로 강이 범람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포위를 풀지 않았습니다.
비가 개자마자 토산, 땅굴, 누거, 발석거, 연노 등 모든 공성 무기를 동원한 맹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성 안은 식량이 바닥나 인육을 먹는 끔찍한 상황에 이르렀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일부 장수들은 투항하며 전의를 상실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구원 요청의 비극]
공손연은 성 안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상국 왕건과 어사대부 유포를 보내 포위를 풀어달라 간청했지만, 사마의는 둘 모두를 참수하며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중 위연을 통해 볼모를 보내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사마의는 항복 외에는 죽음뿐이라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수십 장 길이의 유성까지 떨어져 사람들을 두렵게 했고, 고구려 동천왕이 사마의를 돕고 있었던 반면, 오나라의 원군은 도착하지 않아 공손연의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습니다.
[공손씨 정권의 비극적 종말]
결국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수백 기병만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려 했으나, 위나라 군대에 잡혀 참수당했습니다.
15세 이상 남자 7천여 명과 장군 필성 등 공경 이하 2천여 명도 처형되어 시체로 경관(京觀)이 만들어지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공손연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졌으며, 공손공 시절부터 낙양에 인질로 가있던 형 공손황까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189년부터 요동 지역을 지배해온 공손씨 정권은 이로써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이는 삼국시대 동북방 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한 군벌의 최후를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