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규
정치가, 무장, 삼국시대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51
- 후한 말 혼란기부터 위나라 초까지 활약한 명신이자 용맹한 장수. - 법 집행과 행정 능력으로 조조 조비 조예 삼대에 걸쳐 신임을 얻음. - 오나라와의 국경 방어와 수자원 개발에 큰 공헌을 세워 위나라 안정에 기여함. - 말년에 조휴와의 갈등으로 병사했으나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됨.
174
[난세에 태어나다]
후한 말 혼란스러운 시기에 하동군 양릉현에서 태어났다.
훗날 위나라의 핵심 인물이 될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었다.
202
[원씨 세력에 맞서다]
원상의 장수 곽원과 흉노 선우 난제호주천이 하동을 침공했을 때, 가규는 자신이 지키는 성을 굳건히 사수해 함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적에게 붙잡혔을 때도 백성들이 그를 구해내려 할 정도로 민심을 얻었다.
그는 곽원의 모사를 속여 적의 진군을 7일간 지연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205
[반란 진압의 기지]
고간이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장염이 이에 동조하자, 가규는 장염의 편에 서는 척하며 병사를 얻어 자신의 성을 보수했다.
그리고는 반란을 꾀하던 자들을 모두 주살하고 장염에 맞서 싸워 그를 패배시켰다.
211
[조조의 눈에 들다]
마초 정벌 중 조조는 가규에게 홍농태수 대행을 맡겼다.
가규는 백성을 숨겨주던 둔전도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강직함을 보였고, 조조는 이를 좋게 여겨 그를 승상주부로 삼았다.
조조는 홍농을 지나면서 가규에게 홍농태수를 대행하게 했다. 가규는 둔전도위가 도망친 백성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둔전도위는 군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언어가 불순했다. 가규는 분노하여 둔전도위에게 죄를 묻고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으나, 조조는 이를 좋게 여기고는 승상주부로 삼았다.
220
['진정한 자사'의 탄생]
예주자사가 된 가규는 기강이 해이해진 관리들을 엄중히 처벌하여 2천 석 이하의 관리들을 대거 면직시켰다.
조비는 그를 '진정한 자사'라 칭찬하며 천하에 예주를 본보기로 삼게 했고, 가규는 관내후에 봉해졌다.
이와 함께 국경 방어와 200리에 달하는 '가후거' 운하를 직접 뚫어 위나라 수송 능력에 큰 공헌을 했다.
당시 천하는 기강이 풀어져 있었는데, 가규는 법령을 엄중히 집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병조종사가 옛 자사에게 휴가를 얻어 가규가 임명된 지 여러 달 후에야 나타나자, 이를 기화로 2천 석 이하 관리들 중에서 방종하여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면직시켰다. 문제는 가규를 '진정한 자사'라고 찬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예주를 표준으로 삼았으며, 가규를 관내후에 봉했다. 예주는 오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가규는 척후를 밝히고 전쟁 준비에 힘써 적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한편, 제방을 새로 쌓고 소익양피란 저수지를 만들고 200리의 운하를 뚫었다. 이 운하는 나중에 '가후거'가 된다.
[조조의 마지막을 지키다]
조조가 사망하자, 가규는 그의 장례를 주관하며 조조의 관을 업으로 옮겼다.
조창이 옥새의 행방을 묻자 엄히 꾸짖어 물러나게 하며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의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건안 25년(220년), 조조가 죽자 조조의 장사를 주관했다. 조창(曹彰)이 장안(長安)에서 와 옥새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가규는 엄히 대답하여 조창을 물렸다. 마침내 조조의 관을 업(鄴)으로 옮겼다.
[조비의 신임을 얻다]
조비가 대군을 일으키자 가규는 승상주부좨주를 맡았고, 위왕이 된 조비로부터 업현령, 위군태수, 그리고 예주자사까지 연달아 임명되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 해 6월, 조비가 대군을 일으키자 가규는 승상주부좨주를 맡았다. 문제(文帝)가 위왕이 되자, 업현에 불법이 많으므로 업현령이 되었고, 1달이 지나서 위군태수가 되었다. 문제는 초현에 이르자 가규를 예주자사로 임명했다.
222
[오나라 군 격파의 선봉]
조휴, 장료와 함께 오나라를 공격하여 폭풍우에 휩쓸린 여범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공로로 양리정후에 봉해지고 건위장군 직책이 더해졌다.
황초 3년(222년) 조휴(曹休), 장료(張遼)와 함께 오나라를 쳐, 오나라 대장 여범(呂範)의 군대가 폭풍우에 휩쓸린 틈을 타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공적으로 양리정후에 봉해졌고, 건위장군이 더해졌다.
227
[전략적 요충지 구상]
명제 즉위 후, 오나라 군의 전략적 위치를 간파한 가규는 예주에서 장강까지 이르는 직통로를 뚫어 오나라 동서 군대의 연계를 끊는 대담한 전략을 제안했다.
명제는 그의 안목에 동의했다.
태화 원년(227년) 명제(明帝)가 즉위하였는데, 손권(孫權)은 이때 예주 남쪽이고 장강에서는 400리 떨어진 동관에 주둔하고, 위나라 예주 군대는 수비하고 있는지라 오나라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군대가 없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침공을 받으면 동(여강)과 서(강하)의 군대를 합쳐 전력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가규는 이를 타개하고자 예주에서 장강까지 이르는 직통로를 뚫어 오나라의 동서 군대가 서로 구원하는 형세를 끊고, 요구(潦口)로 나아가 주둔하면 동관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명제는 이에 동의하였다.
228
[조휴 구원, 그리고 죽음]
조휴가 주방의 속임수에 빠져 패전 위기에 처하자, 가규는 조휴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지원군을 이끌고 진격했다.
적에게 의병(疑兵)을 보여 물러나게 하여 조휴를 구원했으나, 이 일로 조휴와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병이 악화되어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조휴가 오나라의 파양 태수 주방(周魴)의 항복을 받아 환현으로 진격하였고, 명제는 가규에게 전장군 만총(滿寵), 동완태수 호질(胡質) 등 4군을 지휘하여 동쪽에서 조휴와 합류하게 했다. 그런데 동관에 방비가 없었으므로 가규는 오나라 군사가 환현에 집결했을 것이며, 조휴가 이와 싸우면 필패한다고 여겼다. 200리를 진군하였다가 조휴가 패전했음을 알았다. 가규는 서둘러 진격하고, 오나라 군대에 의병을 보여주어 물러나게 해 조휴를 구조했다. 원래 가규는 조휴와 사이가 나빠, 황초 연간 조비가 가규에게 절을 주려는 것을 조휴가 가규의 성격 문제를 들어 훼방을 놓았다. 협석에서 조휴가 졌을 때 가규가 없었으면 조휴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가규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조정에 상주하여 가규를 모함했으며, 가규도 돌아온 뒤 상주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가규가 옳지만, 조휴가 종실로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 가규는 마침 병이 위독해져 죽었다. 시호를 내려 숙후(肅侯)라 했으며, 《위서》에 따르면 향년 5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