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농민 반란, 후한 말기 전쟁, 삼국시대 서막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44
후한 말기 외척과 환관의 부패로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습니다. 질병과 불안에 지친 백성들은 현세 구원 신앙인 태평도에 의지했습니다. 장각이 이끈 태평도 신도들이 창천(한나라) 대신 황천(새 시대)을 내세워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후한의 중앙 통제력을 붕괴시키고 삼국시대라는 300년간의 혼란기를 여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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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 대규모 봉기]
후한 영제 시기, 거록의 장각이 태평도를 창시하며 병자 치료와 포교로 민심을 사로잡았습니다.
10여 년 만에 수십만 신도를 모아 36개 방으로 조직된 태평도 세력은 부패한 한 제국에 맞서 '창천은 죽고 황천이 선다'는 구호 아래 전국적인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장각은 스스로 천공장군을 칭하며 이 거대한 농민 반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후한, 진압군 편성]
황건적의 난이 후한 전국 13곳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자, 영제는 대장군 하진 등과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이에 노식, 황보숭, 주준 등 명망 높은 장수들이 진압군으로 편성되었고, 훗날 삼국지의 주역이 될 조조, 손견, 그리고 유비 삼형제(관우, 장비 포함) 등도 각지에서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하며 난세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장각 사망, 동탁과 유비]
광종으로 향하던 유비는 노식이 뇌물 모함으로 중랑장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에 좌절합니다.
돌아가던 중, 황건적에게 쫓기던 동탁을 도와주지만, 동탁은 미천한 유비를 무시하며 오만함을 드러냅니다.
이 일로 유비는 주준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한편, 황건적의 수장 장각은 이 광종 전투 중에 병으로 사망하며 반란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유비, 유주성 첫 승리]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 태수 유언을 찾아가 합류합니다.
5만 대군을 이끈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유주성을 공격해오자, 유비는 고작 500명의 의병과 관군 대장 추정의 병력을 이끌고 대흥산에서 맞섰습니다.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부장 등무를 베고, 관우가 직접 정원지의 목을 베어 황건적을 무찌르며 유비 삼형제의 첫 승리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황보숭, 장량 격파]
황건적의 수장 장각이 병사하여 사기가 떨어진 틈을 타,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이 황건적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기도위 조조의 맹활약 속에 관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승리하는 대승을 거두며, 장각의 동생이자 황건적의 주요 지휘관인 장량의 목을 베어 반란의 핵심 세력을 궤멸시켰습니다.
조정은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합니다.
[유비, 청주성 대승]
유주성 전투 승리 직후, 황건적에게 함락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위급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유주 태수 유언은 유비를 필두로 5천 명의 군사를 청주로 보냅니다.
유비는 지형을 이용해 황건적을 계곡으로 유인하여 대파하고, 공경의 군사와 협공하여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 승리 후 유비는 노식 장군을 돕기 위해 광종으로 향했습니다.
[유비, 장보의 항복 유도]
양성에서 유비와 주준의 관군이 장각의 동생 장보가 이끄는 황건적 대군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 부장 고승을 베자 적들은 양성으로 후퇴했습니다.
유비는 장기전을 통해 황건적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기지를 발휘했고, 결국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면서 황건적의 또 다른 핵심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완성 전투, 난 진압]
유비, 손견, 주준이 이끄는 관군이 남양 완성을 점거한 황건적 잔당을 상대로 최후의 대결을 펼쳤습니다.
황건적 주요 지휘관인 장만성, 손중, 조홍, 한충 등이 모두 전사하며 184년에 시작된 황건적의 대규모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후한의 중앙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각지의 군벌들이 성장하는 군웅할거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영천, 황보숭의 화공]
예주 영천에서는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 파재와 그의 연합군인 장량, 장보의 대군과 치열하게 맞섰습니다.
초반 주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황보숭과 힘을 합쳐 황건적 주력을 화공으로 크게 격파했습니다.
도주하던 장량과 장보는 조조를 만나 1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6월에는 팽탈의 황건군까지 격파하는 등 예주의 황건적은 관군의 맹공으로 완전히 평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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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 잔당 활동]
184년 대규모 진압 이후에도 황건적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습니다.
188년 산시성에서 백파적이, 산둥성에서 청주와 서주의 황건적이 다시 맹위를 떨치며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192년 동탁 사후에는 수십만 명의 청주 황건적이 포신과 유대까지 전사시키는 위세를 보였으나, 조조가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이들을 자신의 '청주병'으로 흡수하며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194년 관해 등의 잔당 역시 유비, 태사자, 조조 등에 의해 토벌되며 황건적의 위협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