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군인, 군벌, 장군,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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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9- 16: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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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북방 이민족을 압도한 용맹한 장수. 백마의종 부대를 이끌며 백마장사로 명성을 떨침. 자신만의 난공불락 요새 역경루를 쌓고 최후를 맞이한 비극적 군웅. 유비 조운과 인연을 맺었으나 결국 갈등으로 절연. 원소와의 기주 쟁탈전에서 패배하며 파란만장한 생애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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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장순의 난 발발과 공손찬의 참여]

양주의 난으로 오환돌기 3천명 지원군의 도독이 된 공손찬. 군량 미지급으로 오환족이 돌아가자, 어양군 장순이 이를 기회로 장거, 오환족과 함께 난을 일으켰습니다. 공손찬은 이들과 싸우며 기도위로 승진했으나 반란 세력이 강성했습니다.

중평 연간 양주의 난으로 유주에서 오환돌기 3천명을 모아 지원하게 되었는데 도독은 공손찬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군량 지급이 자꾸 미뤄지자 오환족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어양군 사람 장순은 장거, 오환족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습니다. 공손찬이 이들과 싸워 기도위로 승진하기도 했으나 그 형세가 워낙 왕성하여 요서오환 구력거 등에 의해 청주, 서주, 유주, 기주까지 피해를 입었습니다.

188

[장순의 난 진압 시도와 관자성 포위]

석문에서 장순 등을 대파하고 많은 포로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너무 깊이 추격하다 관자성에서 구력거 등에게 200여 일간 포위되어 식량이 바닥나는 고초를 겪고 병사 절반을 잃은 채 퇴각해야 했습니다.

188년, 드디어 석문에서 장순 등을 대파하고 잡혀있던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추격했는데 너무 깊이 들어간 탓에 도리어 관자성에서 구력거 등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식량이 바닥나 말을 잡아먹고, 말까지 동나 노와 방패를 먹는 등 이백여 일을 처절하게 버텼으나 결국 어찌하지 못하고 사졸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에 각자가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였습니다. 비와 눈도 많이 와 구덩이에 빠져 죽은 이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었습니다. 다만 적들도 굶주렸으므로 유성으로 돌아갔습니다.

189

[장순의 난 완전 진압 및 공손찬의 관직 승진]

전년 부임한 유주목 유우에게 장순의 객 왕정이 장순의 머리를 보내오며 난이 최종 진압되었습니다. 공손찬은 항로교위에 속국장사를 겸하고 도정후에 봉해졌습니다.

189년 3월, 장순의 객 왕정이 전년 부임한 유주목 유우에게 장순의 머리를 보내옴으로써 난이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공손찬은 항로교위에 속국장사를 겸하고 도정후에 봉해졌습니다.

190

[최강의 백마의종 창설]

변경에서 외적들을 엄하게 대하며 강경책을 펼치던 공손찬은 궁술이 뛰어난 부하 수십 명(혹은 수천 명)을 선발, 백마에 태워 최강의 부대인 ‘백마의종’을 조직했습니다. 오환족들은 공손찬을 백마장사라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변경에 있으면서 언제나 외적들을 엄하게 대했습니다. 궁술이 뛰어난 부하 수십 혹은 수천 명을 백마에 태우고 좌우로 전개시켜 자칭 ‘백마의종’이라 하였습니다. 오환인들은 공손찬을 백마장사라 부르며 피해다녔습니다. 공손찬은 오환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유우는 은혜와 신망을 보여 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공손찬은 유우의 절도를 받아야 했음에도 무리를 모아 자신의 세력을 키웠으며 부하들이 민간에 피해를 끼치는 것도 강하게 규율하지 않았습니다.

191

[원술 지원 문제로 유우와 관계 악화]

헌제의 명으로 유우에게 파견된 유우의 아들 유화가 원술에게 억류당하고 원술이 유우에게 군대를 요구하자 유우는 파병했습니다. 공손찬은 원술의 야심을 간파하고 유우를 만류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사촌 동생 공손월을 보내 유화의 병력을 빼앗으라고 귀띔하며 유우와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장안에서는 헌제가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해 유우의 아들이자 시중으로 있던 유화를 유우에게 파견해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맞이하라 명하였습니다. 유화는 동탁을 속이고 무관을 통해 나오면서 남양태수 원술을 들렀습니다. 원술은 유화를 머물게 하고 군대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쓰게 하였습니다. 이를 받은 유우는 수천 명의 기병을 파병하였습니다. 공손찬은 원술의 야심을 눈치채고 유우를 만류했으나 그 결정을 꺾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말렸다는 것을 원술이 알게 되면 이를 원망할까 염려하여 사촌 혹은 육촌 동생 공손월과 천여 기를 원술에게 보내 연합을 맺었으며 유화는 잡아둔 채 그 병력을 뺏으라고 귀띔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공손찬과 유우는 더욱 반목하였습니다.

[원소와의 연합으로 한복 위협]

원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발해군에서 남하, 한복군과 접전하여 승리했습니다.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진군하자 한복이 겁을 먹고 기주목 자리를 원소에게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1년(초평 2년), 발해태수 원소가 서찰을 보내와 남하하라고 꼬드겼습니다. 안평군에서 한복군과 접전해봤는데 승리하였습니다.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실은 한복을 급습하고자 진군하였습니다. 이를 겁낸 한복이 기주목 자리를 원소에게 양도하였습니다.

[사촌 공손월의 죽음으로 원소와의 전쟁 발발]

원술과 원소의 싸움 중, 공손찬의 사촌 동생 공손월이 원술을 돕다 원소 진영 장수들과의 교전에서 전사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공손찬은 원소에게 보복하기 위해 반하로 출진했고, 또 다른 사촌 동생 공손범도 그에게 가담하며 원소와의 전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원술은 원소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주흔·주앙·주우 형제가 원술의 예주를 취하려 했기에 공손월이 이들과 교전하다가 유시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공손찬은 노하여 원소에게 보복하겠다며 반하로 출진하였습니다. 이에 원소는 차고 있던 발해태수의 인수(印綬)를 공손찬의 또다른 사촌 혹은 육촌 동생 공손범에게 쥐어주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공손범 역시 공손찬에게 가담하였습니다.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선경을 연주자사로, 기타 장수들도 태수와 현령으로 임명하고 나아갔습니다. 기주의 여러 성들도 호응하였습니다.

[동광현 대승으로 황건적 대파]

청주와 서주에서 일어난 30만 황건적이 태산태수 응소에게 격파된 후 흑산적과 합치려 하자, 공손찬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동광현에서 황건적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죽였습니다. 강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고 7만여 명을 생포하며 분무장군과 계후 작위를 받았습니다.

청주와 서주에서는 황건적 30만 명이 일어났는데 11월에 태산태수 응소에게 격파되자 발해군을 거쳐 흑산적과 합치려 하였습니다. 공손찬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끌고 나가 동광현에서 대파하고 3만여 급을 취했습니다. 황건적은 치중 수만 량을 내버리고 강을 건너 달아났습니다. 반쯤 건넜을 때 또다시 들이쳐 수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 피로 강이 붉어졌으며 7만여 명을 생포했고 수레와 갑옷, 재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위명이 크게 진동하여 분무장군에 계후가 되었습니다.

192

[계교 전투에서 원소에게 대패]

원소와 계교 남쪽 20리 지점에서 격돌했으나, 국의가 이끄는 원소의 정예병에 의해 대패했습니다. 선봉장 엄강을 포함한 천여 명이 전사하고 전군이 궤주했으며, 공손찬은 광양군 계현으로 물러났습니다.

192년 봄, 원소도 몸소 나서 계교 남쪽 20리 지점에서 격돌하였습니다. 공손찬은 3만 명의 보병으로 방진을 형성하고 1만 명의 기병은 좌우익에 5천 명씩 배치했으며 백마의종은 중견으로서 역시 두 부대로 나누었습니다. 원소는 국의의 정예병 8백 명을 선봉으로 삼고 이를 강노 1천 장으로 받쳤으며 자신은 그 뒤에서 보병 수만 명으로 진을 쳤습니다. 공손찬은 국의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보고 기병을 풀어 공격하였습니다. 국의 부대는 방패 아래로 몸을 낮추고 있다가 거리가 가까워지자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달려들었습니다. 강노도 빗발치니 공손찬군은 엄강 등 천여 명이 죽고 나머지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계교까지 돌격해오는 국의를 다리 위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이마저 막지 못하고 본영의 아문까지 내주는 등 전군이 궤주하였습니다. 공손범과 같이 광양군 계현으로 물러났습니다.

[거마수 승리 후 용주에서 다시 패배]

계교 전투 후 원소의 장수 최거업이 탁군 고안현 포위를 실패하고 회군하자, 공손찬이 추격하여 거마수에서 칠팔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세를 타고 남진했다가 평원국 용주에서 다시 패배하고 유주로 되돌아왔습니다.

원소의 장수 최거업이 수만 명으로 탁군 고안현을 에워쌌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하였습니다. 공손찬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으로 추격하여 거마수에서 칠팔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승세를 타고 남진하여 평원국에 이르렀는데 용주에서 또 깨지고 유주로 되돌아왔습니다. 전해로는 청주를 점거하게 했는데 2년간 원소군과 공방을 거듭하여 양군이 모두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약탈에 시달렸습니다.

193

[조정의 중재로 원소와 일시적 화해]

2년간 이어진 원소군과의 공방전으로 양군과 백성이 모두 피폐해지자, 조정에서 태복 조기를 파견하여 공손찬과 원소를 화해시켰습니다.

전해로는 청주를 점거하게 했는데 2년간 원소군과 공방을 거듭하여 양군이 모두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약탈에 시달렸습니다. 193년, 조정으로부터 태복 조기가 와 공손찬과 원소를 화해시켰습니다.

194

[유우 살해로 유비와 조운이 떠나다]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일은 유비에게 친척 살해나 마찬가지였기에 유비는 공손찬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서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운 또한 형의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일로 인해 공손찬은 유비에게 절교를 당했습니다. 유비의 입장에서 보면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일은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일이므로 황족인 유비로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결국 유비는 이 일로 인해 공손찬에게 되돌아가지 않고 서주에 머물렀습니다. 훗날,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한 것 역시 원소가 공손찬의 불구대천이기 때문입니다. 추가로 이 일로 인해 조운 역시 공손찬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공손찬에게는 형의 사망으로 인해 장례식을 치른다는 핑계로 도망쳤으며 다시는 공손찬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유우의 습격 격퇴 및 처단]

공손찬의 무력 남용과 이민족 정책으로 유우와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 유우가 10만 대군으로 공손찬을 습격했습니다. 그러나 공손기(公孫紀)의 밀고와 유우군의 미숙함 덕분에 공손찬이 유우군을 대파하고, 도주한 유우와 그 처자식을 사로잡아 계현으로 개선했습니다.

한편 예전부터 유우는 공손찬이 무력을 남용하는 것에 근심했으며 만약 원소를 꺾으면 더욱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봐 우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출병을 불허하고 군량 지급도 줄였지만 공손찬은 더 엇나갈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공손찬은 이민족들을 재물로 달래면 달랠수록 오히려 한나라를 낮잡아 볼 것이라 생각해 유우가 이민족들에게 주는 재물도 번번이 노략하였습니다. 유우는 그 죄를 상주했고 공손찬 역시 유우의 군량 미지급을 상주하며 상호 비방하였습니다. 공손찬은 계현의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 내지 경을 축조하고는 유우의 부름에도 매번 병을 핑계 대며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겨울, 마침내 유우가 친히 십만 명을 인솔해 공손찬을 습격하였습니다. 유주종사로 있던 공손기가 이 사실을 밤중에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평소에 같은 성씨라며 공손찬이 각별히 대해온 덕분입니다. 당시 부곡들은 밖에 흩어져 있었고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터라 동쪽 성벽을 파서 피신하려 했는데 유우의 병사들이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민가에 피해가 갈까 불도 못 지르게 했다는 것을 알고는 가려 뽑은 정예병 수백 명으로 바람의 방향대로 불을 놓으며 돌진해 크게 무너트렸습니다. 유우는 상곡군 거용현으로 도주해 오환과 선비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이를 3일 만에 공략하고 유우와 그 처자식을 사로잡아 계현으로 개선하였습니다.

[황실 사자 위협, 유우 강제 처형]

황제의 사자 단훈이 당도하여 공손찬은 전장군, 역후 작위를 받고 4개 주의 독권까지 얻었습니다. 이후 공손찬은 단훈을 위협하여 유우가 존호를 참칭하려 했다고 거짓 고발하고는 날씨로 신의 뜻을 물어본 후, 결국 유우를 참수했습니다.

마침 황제의 사자 단훈이 당도하였습니다. 공손찬은 전장군에 오르고 역후에 봉해졌으며 유주, 병주, 청주, 기주를 독할 수 있는 가절도 받았습니다. 공손찬은 이전에 원소 등이 유우를 옹립하려 했던 일을 들먹이며 유우가 존호를 참칭하려 했다고 무고하고는 유우를 처형하라고 단훈을 위협하였습니다. 하늘을 향해서도 ‘유우가 천자가 될 만하다면 비를 내려 그를 구하소서!’라고 빌어봤지만 날씨는 온종일 쨍쨍했습니다. 드디어 유우를 참하고 단훈을 유주자사로 추천하였습니다.

195

[유우 잔당과 원소 연합군에 대패, 역경으로 철수]

유우의 종사 선우보와 염유 등이 유우의 남은 군사 및 오환, 선비, 한족 수만 명을 규합하고 원소 진영의 유화와 국의까지 합류하여 십만에 달하는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 공손찬은 이들에게 포구수에서 패배하여 2만 명을 잃고 본거지를 역경으로 옮겨 방어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유우의 종사 선우보·제주, 기도위 선우은 등은 유주의 군사를 규합해 공손찬에게 복수하고자 평소 은덕과 신망이 높던 염유를 오환사마로 추거하였습니다. 염유는 오환, 선비, 한족 수만 명을 불러 모았고 공손찬이 둔 어양태수 추단을 노현 북쪽에서 쳐부수어 추단 등 4,000여 명을 베었습니다. 오환의 초왕 소복연도 7,000여 기를 데리고 합류했으며 원소 진영에 있던 유화와 국의도 힘을 보태니 그 군세가 십만에 달했습니다. 195년(흥평 2년), 포구수에서 또 패배하여 2만 명을 잃고 역경으로 철수해 방어 태세를 다졌습니다.

196

[난세를 피할 역경 요새화]

패배 후 동요에 따라 하간국 역현으로 본거지를 옮겨 역경을 요새화했습니다. 십중 해자에 수많은 인공 언덕과 높은 누각을 건설하고, 둔전을 설치해 자급자족 체제를 갖췄습니다. 한때 국의군이 1년간 대치하다 양식 고갈로 철군할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앞서 항간에는 ‘연나라의 남쪽, 조나라의 북쪽 가장자리, 중앙은 맞지 않지만 가치는 숫돌과 같은 곳, 오직 그 가운데서만 난세를 피할 수 있으리’란 동요가 있었습니다. 공손찬은 하간국 역현이 그에 부합한다 여겨 본거지를 옮긴 터였습니다. 역경은 십중 해자(垓字)에, 오륙 장 높이의 인공 언덕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 위에는 누(樓)가 있었습니다. 특히 공손찬이 사는 곳의 높이는 십 장에 달했습니다. 둔전까지 설치해놔서 자급자족도 가능하였습니다. 국의군이 1년 남짓한 동안 대치해봤다가 양식이 고갈되어 철군하는 것을 공손찬이 뒤쫓아 그 치중을 획득하기도 하는 등 원소도 까다로워했습니다.

197

[역경에 틀어박혀 폭정 시작]

역경 요새에 틀어박힌 공손찬은 가뭄과 병충해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식인 현상까지 벌어지는데도 구휼하지 않았습니다. 명사들을 억압하고 장사치들을 중용하며 이들과 형제의 결의를 맺는 등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주변 군에서는 그에게 등을 돌려 선우보와 유화에게 협력했습니다.

가뭄과 병충해가 덮쳐 곡식이 귀해지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데도 공손찬은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자만하여 구휼은 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의 과실은 기억하고 선행은 잊었으며 사소한 원한도 반드시 대갚음하였습니다. 빼어난 명사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직위에 기대어 부귀해지는 것을 당연시하고 타인의 은혜는 고마워하지 않는다’며 억압하고 장사치 같은 부류를 중용하였습니다. 특히 점쟁이 유위대, 비단 장수 이이자, 상인 악하당과는 형제의 결의를 맺었습니다. 맏형은 공손찬이었습니다. 이들의 부는 막대했고 서로의 자식들을 혼인시키기도 했으며 스스로 전한의 개국 공신 곡주후 역상과 관영에 비유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고통스러워했고, ‘원군을 믿고 역투하지 않을 것’이라며 병력 지원에도 인색하니 대군, 광양군, 상곡군, 우북평군 등지에서는 선우보와 유화에게 협력하는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경계심도 유별나 고각 위의 집에는 철문을 세우고 7세 이상의 남자는 들이지 않았으며 곁에는 오로지 첩들만을 두었습니다. 이들에게 수백 보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게끔 큰 목소리를 내는 훈련을 시켜 명령을 전했으며 문서들은 우물을 긷듯이 끌어올려 받았습니다. 빈객들과는 소원해졌으며 신임하는 이도 적어 모신과 맹장들이 점점 떠나갔습니다. 이즈음 공격전도 드물어져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기에 답하기를, “과거에 이민족과 황건적을 때려잡을 때는 손바닥에 침을 뱉기만 해도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날 병란이 시작되고 보니 내가 해결 가능한 수준이 아니오. 장병은 쉬게 하고 농사엔 힘써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낫소. 병법에서도 백 개의 누는 치지 않는다 하였소. 현재 우리 진영엔 누로가 천 리이고 비축한 곡식도 삼백만 곡이니 때를 기다리기에 충분할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198

[원소의 마지막 침공과 공손찬의 출정 포기]

원소가 대대적으로 역경을 침공하자, 공손찬은 아들 공손속을 흑산적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고 자신도 직접 출격하여 흑산적과 연계해 원소의 후방을 유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사 관정의 만류로 출정 계획을 철회하고 성 안에서 수비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198년(건안 3년), 원소가 대대적으로 침공해왔습니다. 아들 공손속을 흑산적에게 보내 원병을 청하고 공손찬도 직접 돌기를 거느리고 출격하여 서산 옆에서 흑산적과 연계해 기동하며 원소의 후방을 유린하려 하였습니다. 장사 관정이 간하기를, “지금 불안해하지 않는 장졸이 없음에도 여전히 서로를 지키며 버티고 있는 것은 그 가족이 마음에 걸리고 장군을 주인이라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건하게 수비만 해도 원소는 필히 환군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버리신다면 중심이 없어진 역경이 위험해집니다. 장군께선 근거지를 잃고 초야에 외로이 계셔야 할텐데 어떻게 흥기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출정은 철회하였습니다.

199

[역경루 함락과 비극적인 최후]

흑산적 장연이 10만 원군을 이끌고 오자, 공손찬은 아들과 봉화로 협공을 약속했으나, 사자가 원소에게 붙잡혀 계획이 탄로 났습니다. 원소의 복병에 대패하고 성으로 쫓겨 들어갔고, 원소는 땅굴을 파 누각 기둥에 불을 질러 역경루를 붕괴시켰습니다. 결국 공손찬은 누이와 처자들을 죽이고 자신도 분신자살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199년 봄, 흑산적 두령 장연이 공손속의 요청에 응해 십만 명으로 공손찬을 구하려 하였습니다. 공손찬은 공손속에게 ‘봉화를 올린다면 이쪽에서도 출전해 협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는데 그 사자 문칙이 원소의 척후병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밀서를 입수한 원소는 복병을 숨겨두고 불을 피웠습니다. 공손찬이 신호대로 출전했다가 대패하고 다시 성으로 쫓겨 들어갔습니다. 원소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 누각 아래에 구멍을 뚫고 나무 기둥을 댔습니다. 반 이상에 달했을 때 그 기둥들에 불을 붙임으로써 누각들을 붕괴시켰습니다. 원소군은 점차 중앙으로 다가오는데 이를 반전할 마땅한 수는 전혀 없어 누이와 처자를 죽이고 자신은 분신자살하였습니다. 원소의 병사들이 누대로 올라가 공손찬의 목을 베었습니다.

[공손찬의 사망 (음력)]

199년 음력 3월, 원소군에 의해 역경루가 함락된 후, 공손찬은 스스로 분신자살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원소의 병사들이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199년 음력 3월, 원소군에 의해 역경루가 함락된 후, 공손찬은 스스로 분신자살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원소의 병사들이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로써 후한 말 군웅 공손찬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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