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달

장군,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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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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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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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와 조비를 오가며 시대를 풍미한 능력자. 뛰어난 언변과 재주로 한때 큰 신임을 얻었으나 거듭된 배신으로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삼국지의 반골 인물. 특히 사마의의 압도적인 속도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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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유장에게 의탁]

같은 군 사람 법정 등과 함께 기근을 피해 익주목 유장에게 의탁했습니다.

건안 초, 같은 군 사람 법정 등과 함께 기근을 피해 촉으로 들어가 익주목 유장에게 의탁했습니다.

211

[유비 입촉 지원 및 의도태수 임명]

유장의 명을 받아 법정과 함께 유비를 맞이하여 강릉에 주둔했습니다. 익주가 평정된 후 의도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211년, 장송의 권유로 유장이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토벌해 한중을 취하자고 권하였을 때, 유장은 장송의 모략인 줄도 모르고 법정과 맹달에게 각각 2천 명을 줘 유비를 맞이하게 했습니다. 맹달은 강릉에 머물렀으며 익주가 평정된 후 의도태수를 맡았습니다.

219

[상용 공략]

유비의 명을 받아 방릉 태수 괴기를 죽이고 상용까지 북진했습니다. 이후 유봉과 합류하여 상용 일대를 평정했습니다.

219년 유비의 명을 받아 의도군 자귀현에서 방릉으로 북진하여 그 태수 괴기를 죽이고 상용까지 나아갔습니다. 유비는 맹달 혼자로는 힘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유봉도 한중에서부터 면수를 타고 내려가게 했습니다. 상용태수 신탐은 항복하여 그 자리를 유지했고 동생 신의도 서성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관우 지원 거절 및 유봉과의 불화]

관우가 번성을 포위했을 때, 유봉과 함께 증원군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관우 패사 후 유비의 원망을 받았으며, 유봉과의 불화도 겹쳤습니다.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고 유봉과 맹달에게 여러 번 증원군을 청했지만 이제 막 복속한 군들을 동요시킬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관우가 패사하는 바람에 유비가 이 일을 원망했습니다. 더구나 유봉과 화합하지 못해 군악대를 뺏기기도 했습니다.

220

[위나라로 투항]

관우를 돕지 않은 죄와 유봉과의 불화로 유비에게 편지를 남긴 채 부곡 4천여 가를 이끌고 위나라로 귀순했습니다. 조비에게 환영받아 산기상시 겸 건무장군, 평양정후 및 신성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220년 7월, 관우를 돕지 않은 화가 미칠까 두렵기도 하고 유봉의 행위에 부아도 났기에 유비에게 편지를 남긴 채 부곡 4천여 가를 이끌고 위나라로 귀순했습니다. 조비는 맹달에 대한 높은 평가를 익히 들었던 터라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등을 어루만지며 유비의 자객은 아닐 것이라는 농담과 함께 자신의 수레에 태워 환영했습니다. 산기상시 겸 건무장군에 평양정후를 주었으며 방릉·상용·서성 3군을 합쳐 신성군을 만들고 그 태수까지 겸하게 했습니다.

[신성군 수복 작전 참여]

조비 황제 즉위 후, 정남장군 하후상, 우장군 서황과 함께 상용으로 진군했습니다. 유봉에게 투항을 권유하고 신의의 배반으로 신성군 일대의 3군 9현을 수복했습니다.

220년 10월 조비가 황제에 올랐습니다. 정남장군 하후상이 신성군 탈환을 건의하여 우장군 서황, 맹달과 같이 상용으로 진군했습니다. 맹달은 유봉에게 ‘태자가 유선인 마당에 유비의 친자도 아닌 이상 촉에 남으면 처지가 위태롭다’며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유봉은 듣지 않고 저항하다가 신의의 배반에 성도로 패주했습니다. 이로써 3군 9현을 수복했습니다.

226

[조비 사후 입지 불안정]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자, 친하게 지냈던 환계와 하후상도 세상을 떠나 위나라에서의 입지에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갈량과 오나라가 접근해왔습니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했습니다. 친하게 지냈었던 환계와 하후상도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맹달은 좁아지는 입지에 불안했습니다. 이를 들은 제갈량과 이엄이 슬며시 접근해왔고 오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27

[촉과의 거병 모의 발각]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여 거병을 모의했으나, 제갈량이 보낸 곽모가 신의에게 모의를 흘려 이 사실이 사마의에게 보고되었습니다. 누설을 알게 된 맹달은 서둘러 거병을 준비했습니다.

227년 한중에서 북벌을 시작하려던 제갈량은 거사를 벌이기로 한 맹달이 변심할까 우려해 곽모를 신의에게 위장 귀순시켜 그간의 모의를 흘렸습니다. 맹달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신의는 표를 올려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누설을 알게 된 맹달은 서둘러 거병하려 했습니다.

228

[상용 전투 패배 및 사형]

사마의가 신속히 진군하여 8일 만에 상용성에 당도했습니다. 공성 16일 만에 생질 등현과 장수 이보의 배반으로 성문이 열렸고, 맹달은 사로잡혀 사형당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태워졌습니다.

남양군 완현에서 정무를 보던 독형예이주제군사 사마의는 맹달이 빠르게 행동에 나설까 걱정해 서신을 써 안심시키고는 은밀히 토벌 준비를 했습니다. 얼마 후 사마의가 참군 양기를 파견해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맹달에게 입조를 권유했습니다. 거병을 망설이던 맹달이 비로소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반의 출동 태세를 갖춰놓았던 사마의는 바로 진군하여 8일 만에 상용성에 이르렀습니다. 228년 1월, 맹달의 생질 등현과 장수 이보가 성문을 열고 항전을 포기했습니다. 공성을 개시한 지 16일 만이었습니다. 워낙에 신속했으므로 촉과 오의 원군도 소용없었습니다. 맹달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번화가에서 태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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