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랑
정치가, 학자, 외척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30
후한 말부터 조위 시대에 걸쳐 활약한 중요 정치가이자 학자. - 초년 하진과 도겸을 섬기며 능력을 인정받아 회계태수에 임명. - 손책의 공격에 대항했으나 패배 그의 아량으로 용서받음. - 조조에게 초빙되어 위나라의 사공 사도 등 최고위직 역임. - 백성 부담 경감 예산 절감 등을 간언하며 청렴한 정무 수행. - 서진 황제 사마염의 외증조할아버지로 명문가와의 깊은 인연.
167
왕랑은 167년에 중국 후한 말기 서주 동해국 담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왕엄이었으며, 자는 경흥이었다.
192
[하진과 도겸을 거쳐 회계태수 임명]
대장군 하진의 속연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서주 자사 도겸을 섬겼다.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회계태수에 임명되었다. 재임한 시기는 192년부터 196년까지다.
왕랑은 처음에 대장군 하진의 속연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서주로 이동하여 자사 도겸을 섬겼다. 그의 상주문이 황제에게 높게 평가받아 회계태수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 지역은 손책(孫策)에 의해 196년에 함락되었다.
196
[손책과의 대결에서 패배]
강동으로 진출한 손책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우번의 도주 권유를 거부하고 고릉에서 손책에게 저항했으나, 손책의 전략에 밀려 패배하고 붙잡혔다. 손책은 왕랑의 인품을 높이 사 목숨을 살려주었다.
손책이 강동으로 진출하자 왕랑은 주변 호족들을 모아 대항했다. 군 공조 우번이 도주를 권했지만, 왕랑은 한나라의 신하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거부했다. 고릉에서 손책 군을 여러 차례 막아냈으나, 손책이 사독 길을 통해 고천둔을 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결국 왕랑은 패배하여 동야로 달아났다가 붙잡혔다. 손책은 왕랑의 겸허하고 교양 있는 태도를 인정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용서해주었다. 이후 왕랑은 곤궁하지만 도의에 맞는 생활을 했다.
200
[조조에게 발탁되어 중용됨]
손책에게 패한 후 곤궁하게 지내던 왕랑은 훗날 조조에게 초빙되어 중요한 관직을 맡으며 정치적 재능을 다시 발휘하게 된다.
손책과의 대결 이후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왕랑은 이후 조조에게 초빙되어 그의 휘하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220
[조비의 황제 등극을 간하고 사공에 임명]
조조 사후, 화흠과 함께 조비에게 황제 즉위를 건의했다. 위나라 건국 후, 사공에 임명되어 중요한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조조가 사망한 뒤, 왕랑은 화흠 등과 함께 조비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자, 왕랑은 최고위직 중 하나인 사공에 임명되어 나라의 중요한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226
[조위의 사도 직책 역임]
조예 황제 시대에 최고위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도에 임명되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왕실 예산을 절감할 것을 간하는 등 관대한 정치를 펼쳤다.
조비의 뒤를 이은 조예 황제 시대에 왕랑은 사도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관대한 정치를 펼치며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인구를 늘릴 것을 건의했으며, 왕궁의 예산 삭감을 주장하는 상주문을 올리는 등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지를 위해 힘썼다. 육형(肉刑) 제도의 부활에도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227
[제갈량에게 항복 종용 편지]
유비 사망 후, 촉한의 재상 제갈량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오랜 지인인 허정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나, 허정이 사망하여 답장을 받지 못했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 왕랑은 촉한의 재상 제갈량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와 함께 그는 과거에 알고 지내던 허정에게도 같은 취지의 편지를 보냈지만, 허정이 그 시점에 사망하는 바람에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이는 위나라의 입장에서 촉한을 설득하려는 정치적 시도였다.
228
왕랑은 228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의 외증조할아버지이며, 그의 손녀 왕원희는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의 부인이 되어 사마염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은 서진 황실과 깊은 연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