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융

정치인, 학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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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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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학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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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20대손으로 후한 말의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지가 넘쳤으며 소시료료라는 고사성어를 남길 정도로 비범함을 보였습니다. 강직한 성품으로 동탁과 조조 등 권력자에게 굴하지 않고 비판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둥지가 무너지면 알도 깨진다는 명언을 남긴 그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건안칠자의 한 사람으로 당대의 문장가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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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공융 탄생]

후한 말의 명망 높은 정치인, 학자, 문인인 공융이 태어났다. 그는 공자의 20대손으로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공융(孔融)은 후한 말의 정치인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며 예주 노국 사람이다. 그의 7대조 공패는 원제의 스승이었고, 고조부 공상은 거록태수, 아버지 공주는 태산도위를 역임했다. 공융은 아버지 공주의 7형제 중 6째 아들이었다. 그는 153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163

[이응과의 만남, 소시료료 고사]

열 살 때 당대 최고의 명사인 이응 앞에서 태중대부 진위를 재치 있는 말솜씨로 농락하여 인정받는 일화로 그의 비범한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10살의 공융은 아버지를 따라 낙양에 올라갔다. 당시 하남윤 이응은 명성이 높아 많은 빈객들이 드나들었으나, 10여세의 공융은 이응의 문도가 되고 싶어 문지기에게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라고 말했다. 이응이 '고명하신 조상님께서 일찍이 나와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묻자, 공융은 '저의 선군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고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니 저 공융과 군은 대대로 통하는 집안이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태중대부 진위가 '어렸을 때 영리하다고 커서까지 반드시 그렇겠는가?'라고 묵살하자, 공융은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했겠습니다.'라고 응수하여 진위를 크게 당황하게 했다. 이응은 크게 웃으며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칭찬했다. 여기서 '소시료료(小時了了)'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166

[부친상과 효성]

13세에 부친 공주가 돌아가시자, 슬픔에 지나치게 몸을 상할 정도로 효성을 보여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13세에 부친 공주가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지나치게 몸을 상하게 되어 간신히 부축을 받은 후에야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성품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184

[십상시 비판 및 황건적의 난 참전]

십상시의 전횡을 강력히 비판하는 청의파 선비로 활약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노식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공융은 십상시의 전횡을 비판한 청의파 선비로 유명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노식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189

[동탁 비판과 북해상 부임]

동탁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자, 그의 포악함을 거침없이 비판하다가 북해의 상으로 전출되었다.

동탁이 권력을 잡자 그의 포악함을 비판하다가 북해의 상(相)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북해는 20만을 넘는 기주 황건적의 침입으로 크게 피폐해졌었으나 공융은 황건적을 몰아냄과 동시에 영내에 학교를 세우고 도덕성의 회복을 장려하는 등 통치에 힘썼다.

193

[관해의 습격과 유비의 도움]

도창에 주둔 중 황건적 잔당 관해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으나, 유비와 태사자 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초평 4년(193년) 공융은 도창(都昌)에 주둔하다가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管亥)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으나 유비(劉備)와 태사자(太史慈) 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194

[유비의 서주자사 천거]

도겸이 사망한 후, 유비를 서주자사로 천거하여 혼란스러운 서주 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후 도겸이 죽자 표를 올려 유비를 서주자사로 천거했다.

196

[원담에게 패배 후 허도 부임]

원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영지를 잃고 처자식까지 붙잡혔으나, 황제의 부름을 받아 허도로 가 장작대장, 소부 등의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원담(袁譚)과 거듭 싸움을 벌인 끝에 패하여 영지를 빼앗겼고 처자식까지 모조리 붙잡힌 채로 도망쳤으나, 마침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허(許)로 가서 장작대장(作大匠), 소부(少府)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조조와의 대립 시작]

황제를 옹립하며 야심을 드러내던 조조의 정치에 거듭 반대하며 글을 올려 비판했고, 이로 인해 조조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공융은 당시 황제를 옹립하며 점차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조조(曹操)와 자주 대립했는데, 거듭 글을 올려 조조의 정치를 비판하며 망신을 주었다. 조조 역시 공융을 증오하며 꺼렸으나 워낙 공융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용인하는 척 했다.

200

[예형 천거와 비극적 죽음]

강직하고 문재가 뛰어난 예형을 조조에게 천거했으나, 예형은 조조를 모욕하고 결국 황조에게 죽임을 당하며 이 일로 조조와 공융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공융이 조조에게 예형을 천거하니 예형의 자는 정평이며 문재가 있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조조가 예형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예형은 병을 핑계하고 가지 않았으며, 다시 방자한 말을 하여 조조를 욕하니, 조조가 분노하여 그를 불러서 고사(鼓史)를 삼았다. 조조 앞에서 예형은 북을 치며 나체로 옷을 갈아입는 기행을 벌였다. 공융의 꾸짖음에도 조조 문전에서 크게 꾸짖어대자, 조조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어진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받을까 두려워 유표에게로 보냈다. 유표 또한 그를 용납하지 못하고 황조에게로 보내버렸는데, 황조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불손한 말을 한다고 죽여버렸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예형의 죽음으로 공융에 대한 조조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208

[조조에 의한 처형과 가족 몰살]

조조의 형주 정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다 결국 조조의 명령으로 처형당하고 가족들까지 몰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어린 두 자녀의 마지막 대화는 후대에 큰 울림을 주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의 형주 정벌에 분개하여 조조를 비판했으나 마침내 조조의 명령으로 처형당했고 가족은 몰살당하였다. 공융에게는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잡혀가던 날, 그들 둘은 바둑을 두었고, '새집이 부서졌는데 어찌 알이 깨지지 않겠습니까?'라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어린 딸은 '죽은 뒤에도 혼령이 있어서 우리들이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 어찌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닌가?'라는 말을 남긴 채 참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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