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즐

정치가, 삼국 시대,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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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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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삼국 시대,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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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혼란기에 오이 농사로 생계를 잇던 보잘것없던 인물에서 시작해 동오 손권의 인정을 받아 삼국시대 최고위 관료인 승상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정치가입니다. 특히 현재 베트남 북부인 교주를 오나라 세력권으로 편입하며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난세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성공한 그의 삶은 큰 흥미를 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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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난세 속 학문과 멸시의 경험]

난세를 피해 강동에서 위정과 함께 오이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밤에는 공부했다. 살던 곳의 호족 초정강에게 오이를 헌상하러 갔다가 멸시를 받았으나, 보즐은 의연하게 대처하며 빈천한 대로 대우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중국 후한 말의 혼란스러운 시기, 보즐은 강동에서 위정 등과 함께 낮에는 오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리고 밤에는 학문에 몰두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이들이 살던 곳은 군의 유력 호족인 초정강의 영토였고, 그를 두려워하여 위정과 함께 오이를 바치러 방문했다. 그러나 초정강은 보즐 일행을 몹시 멸시했고, 위정은 이에 크게 분노하고 치욕감을 느꼈다. 반면 보즐은 초정강의 멸시를 묵묵히 받아들였고, 위정이 왜 분노하냐고 묻자 "우리가 본래 빈천한데, 빈천한 자로서 대우받았을 뿐 무엇을 부끄러워하겠는가?"라고 답하며 현명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200

[손권의 부름, 관직에 오르다]

손권이 토로장군이 되었을 때 주기로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한 해 후 질병으로 관직을 잠시 떠났으나, 이후 해염현령장, 거기장군 동조연, 서주목 치중종사 등으로 연이어 임명되며 손권의 측근으로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손권이 토로장군에 임명되자 보즐을 불러 자신의 막료인 주기로 삼으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듬해 질병으로 인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제갈근, 엄준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명성을 쌓았다. 이후 손권은 다시 보즐을 해염현령장으로 임명했으며, 이어서 거기장군 동조연으로, 손권이 서주목이 되자 치중종사로 삼고 무재로 천거하는 등 요직에 등용하며 그의 재능을 적극 활용했다.

210

[파양 태수 및 교주 자사로 부임]

건안 15년 파양 태수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교주 자사 겸 입무중랑장으로 전임되어 무야리 천여 명을 이끌고 교주 지역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는 손권이 남방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건안 15년인 210년에 보즐은 파양 태수직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교주 자사 및 입무중랑장으로 전임되어 무야리라 불리는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교주 지역으로 향했다. 이 부임은 손권이 당시 지방 호족들이 할거하던 교주 지역을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한 중요한 군사적, 행정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211

[교주 평정 및 동오 세력권 편입]

이듬해 사지절 정남중랑장 직위가 더해진 보즐은, 당시 할거하던 창오 태수 오거를 계책으로 제거하고 교지 태수 사섭 형제의 귀순을 받아내며 교주를 동오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이 공로로 익주군의 호족 옹개 등의 귀부를 수용하고 평융장군 및 광신후에 봉해졌다.

교주에 부임한 이듬해인 211년, 보즐은 사지절 정남중랑장 직위를 추가로 받으며 교주 평정에 나섰다. 당시 교주에는 유표가 임명한 창오 태수 오거와 후한 교지 태수 사섭 등이 각자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즐은 겉으로는 자신을 따르는 척하며 속으로는 반항하던 오거를 우호를 가장하여 유인한 뒤, 만남의 자리에서 그를 베어버리며 강력한 위세를 보여주었다. 이에 사섭 또한 형제들을 이끌고 보즐에게 귀순함으로써 교주는 비로소 동오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익주군의 호족 옹개 등이 태수 정앙을 살해하고 손권에게 귀부하기를 청하자, 보즐은 이들을 받아들여 평융장군 직위를 더하고 광신후에 봉해지는 등 남방 지역 안정에 큰 공을 세웠다.

220

[교주에서 장사로 이동 및 반란 진압]

연강 원년, 보즐은 여대에게 교주 자사직을 넘겨주고 교주 백성 1만 명을 이끌고 장사로 이동했다. 당시 유비의 침공과 무릉 만이족의 봉기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익양에 주둔하며 유비 패배 후 영릉과 계양 등지에서 일어난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다시 한번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다.

연강 원년인 220년, 손권의 명령에 따라 보즐은 여대에게 교주 자사 자리를 인계하고, 교주 지역의 백성 1만 명을 이끌고 장사로 이동했다. 당시 촉한의 유비가 동오를 침공하고 무릉 지역의 만이족이 봉기하여 정세가 매우 불안정했다. 보즐은 손권의 명령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익양에 주둔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후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하자, 영릉과 계양 등지에서 발생한 여러 반란과 소요 사태를 효과적으로 진압하며 남부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23

[우장군 승진 및 주둔지 이전]

황무 2년 우장군과 좌도호로 승진하고 임상후에 봉해지는 영예를 안았다. 동 5년에는 가절을 받고 구구로 주둔지를 옮기며 동오의 주요 군사 요직을 맡아 국방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황무 2년인 223년에 보즐은 우장군과 좌도호라는 고위직으로 승진했으며, 임상후에 봉해지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어서 황무 5년인 226년에는 가절(황제의 권한을 대리하여 군율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받고 주둔지를 구구(句容, 현 장쑤성 전장 부근)로 옮기며, 동오의 국경 방어와 군사 통솔에 핵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229

[표기장군 및 서릉 도독 임명, 기주목 해임]

황룡 원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표기장군으로 승진하고 기주목을 겸임했다. 같은 해 서릉을 도독하며 육손을 대신하여 국경을 진무하는 중책을 맡았으나, 촉한과의 동맹 조약에 따라 기주가 촉한 영토로 분류되어 기주목에서 해임되었다.

황룡 원년인 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보즐은 삼공에 버금가는 고위 무관직인 표기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명예직인 기주목을 겸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서릉 지역의 군사들을 총괄하는 서릉도독에 임명되어, 당대 명장인 육손을 대신하여 국경 지역의 방어와 안정화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동오와 촉한이 맺은 동맹 조약에 따라 기주(冀州)가 촉한의 영토로 약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즐은 형식적인 직책이었던 기주목에서는 해임되었다.

235

[여일의 횡포 상소 및 처단]

교사 여일이 횡포를 부려 많은 백성이 고통받자, 보즐은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여일을 주살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간언 덕분에 여일은 처단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기여했다.

당시 교사(交士) 여일이 교주 지역에서 막대한 횡포를 부려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가고 고통받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보즐은 손권에게 직접 상소문을 올려 여일의 죄상을 고발하고, 그를 주살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보즐의 이러한 용기 있는 간언이 받아들여져 여일은 처단되었고, 이는 그의 백성을 위한 마음과 정의로운 성품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246

[육손을 이어 승상에 오르다]

적오 9년, 보즐은 대장군 육손을 대신하여 동오의 최고 관직인 승상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공적과 손권의 깊은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적오 9년인 246년, 동오의 대장군이었던 육손이 세상을 떠나자 보즐은 그의 후임으로 동오의 최고 관직인 승상(丞相)에 임명되었다. 이는 보즐이 손권 시대에 이룩한 수많은 공적, 특히 교주 평정과 남방 안정에 대한 기여, 그리고 손권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재상으로서 동오의 국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247

[승상 재임 중 서거]

승상에 오른 이듬해인 247년 가을, 보즐은 재임 중에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그는 동오의 개국 공신이자 핵심 인물로서 평생을 손권에게 헌신하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승상으로 임명된 지 불과 1년만인 이듬해인 247년 가을, 보즐은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후한 말의 혼란기부터 동오 건국과정, 그리고 손권 시대의 안정과 확장을 이끈 핵심 인물로서, 재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던 중 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은 동오에게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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