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준

정치인, 학자, 외교관,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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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5- 18: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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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준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중신이자 당대 최고의 학식과 고결한 성품을 지녔던 선비였습니다. 팽성 출신으로 난세를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그는 제갈근, 보즐과 함께 '강좌의 세 선비'로 불리며 학문적 명성을 떨쳤습니다. 손권의 신임을 받아 상서와 위위 등 요직을 거치면서도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특히 노숙의 후임으로 군 지휘관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사양한 일화는 그의 신중하고 겸손한 인품을 상징합니다. 유교 경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여러 저작을 남겨 후학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외교적으로도 오나라와 촉나라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다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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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학문적 가문의 탄생]

중국 팽성에서 훗날 오나라의 대들보가 될 엄준이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 경전과 다양한 학문에 몰두하며 지적인 기초를 다졌습니다.
성품이 정직하고 온화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인정받았습니다.

엄준의 자는 만재(曼才)이며 팽성군 출신으로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았습니다.
난세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에 태어나 학문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습니다.
그의 초기 교육은 훗날 그가 오나라 최고의 유학자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4

[강동으로의 피난과 이주]

후한 말의 극심한 전란을 피해 가족과 함께 강동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아픔 속에서도 학문 도구와 책을 챙기며 배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이주는 그가 훗날 오나라 조정의 핵심 인재로 거듭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중원은 군웅할거로 인해 평온한 날이 없었기에 엄준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남쪽을 선택했습니다.
강동의 낯선 환경에서도 그는 정착과 동시에 현지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난민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고결한 선비 정신은 강동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정착을 도왔습니다.

200

[운명적인 동지들과의 조우]

강동에서 제갈근, 보즐과 만나 깊은 우정과 학문적 교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아끼며 매일 같이 국가의 미래와 학문을 논했습니다.
이들과의 관계는 엄준이 정치적 식견을 넓히고 중앙 정계로 나아가는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엄준, 제갈근, 보즐 세 사람은 당시 강동 지역에서 '강좌의 세 선비'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친목을 넘어 유학적 가치관을 공유하며 오나라의 통치 철학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들의 신의는 오나라 조정 내에서도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205

[학문적 명성의 확립]

강동 전역에 엄준의 높은 학식과 고결한 인품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많은 청년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그는 학자로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정립된 그의 학문적 명성은 손권이 그를 주목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유교 경전 중 효경과 논어에 대한 독자적이고 깊이 있는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말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학문 태도는 지행합일의 표본으로 여겨졌습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이미 그는 오나라 지식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208

[손권의 초빙과 관직 입문]

강동의 군주 손권이 엄준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빙하여 관직을 제의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국가를 위해 봉사해달라는 손권의 진심에 감복하여 출사를 결심했습니다.
이로써 엄준은 재야의 학자에서 국가의 명운을 짊어진 정치가로 변모했습니다.

손권은 엄준과 대화를 나눈 뒤 그의 박학다식함과 청렴함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엄준은 자신이 가진 학문적 지식이 실제 통치에 쓰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조정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관직 입문은 오나라 조정에 유교적 도덕성을 불어넣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10

[기도위 관직 하사]

손권으로부터 기도위(騎都尉)라는 직함을 받고 본격적인 공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왕실의 호위와 보좌를 담당하며 군주의 곁에서 실질적인 조언을 건넸습니다.
직위의 높낮이를 떠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임무를 수행하여 신뢰를 쌓았습니다.

기도위로서 엄준은 손권의 행차를 수행하며 국가의 대소사에 대해 가감 없이 조언했습니다.
그는 늘 예법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실무적 능력을 배양했습니다.

212

[참군사 임무 수행]

군사적 전략을 자문하는 참군사(參軍事)의 역할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전쟁보다는 병사들의 복지와 군기 확립에 집중하며 내실 있는 군대를 지향했습니다.
그의 신중한 조언은 오나라가 무리한 확장을 피하고 안정을 찾는 데 기여했습니다.

학자 출신인 그는 군사 작전에서도 인의를 바탕으로 한 전술을 건의하곤 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지휘관들에게 도덕적 책무를 일깨웠습니다.
비록 무장 출신은 아니었으나 그의 체계적인 분석력은 군 수뇌부에서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217

[노숙의 후임 지휘관 제안]

오나라의 명장 노숙이 서거하자 손권은 그 후임으로 엄준을 낙점했습니다.
만 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요충지를 지키는 막중한 군사적 지휘권이었습니다.
이는 손권이 엄준의 능력을 단순히 학자로만 보지 않고 국가의 기둥으로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노숙의 자리는 오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핵심적인 요직이었습니다.
손권은 엄준의 신중함과 선비다움이 군대를 통솔하는 데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조정 내에서도 엄준의 갑작스러운 중용에 놀라며 그의 결정을 주목했습니다.

[군사 지휘권 사양과 눈물]

손권의 파격적인 지휘관 임명 제안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학문에는 능하나 만 명의 생명을 책임질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권력을 탐하기보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엄준은 손권 앞에서 "저는 평생 책을 읽은 선비일 뿐, 전쟁터의 긴박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억지로 직책을 맡아 실패하는 것이 국가에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여몽이 노숙의 후임이 되었으나 엄준의 이 정직한 태도는 손권의 존경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221

[상서 관직 임명]

국가 행정의 핵심인 상서(尙書) 자리에 올라 내치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직은 거절했으나 행정과 문치에는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공정한 인사와 투명한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상서로서 엄준은 법령의 제정과 관료들의 기강 해이를 막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늘 백성의 삶을 우선순위에 두고 가혹한 세금이나 노역을 줄이는 정책을 건의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오나라의 행정은 유교적 원칙 아래 매우 안정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223

[촉한 파견 외교 사절 선발]

오나라와 촉나라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특사로 선발되어 촉한으로 향했습니다.
양국의 동맹을 회복하고 위나라에 맞서기 위한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임무였습니다.
그의 학식과 온화한 매너는 외교적 협상을 이끌어가는 최고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릉 대전 이후 서먹해진 양국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손권은 가장 신뢰하는 엄준을 보냈습니다.
엄준은 국가의 존망이 외교적 결속에 달려 있음을 알고 무거운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그는 출발 전 손권에게 촉나라를 설득할 구체적인 전략과 학문적 명분을 보고했습니다.

[제갈량과의 역사적 면담]

촉한의 승상 제갈량을 만나 국가 간의 신의와 동맹의 필요성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두 지성인은 학문과 정치를 아우르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이 면담을 통해 오나라와 촉나라는 다시 한번 강력한 결속을 맹세하게 되었습니다.

제갈량은 엄준의 높은 학식과 정직한 성품에 탄복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엄준은 개인적인 우정을 넘어 국가 간의 공동 이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확답을 얻어냈습니다.
이 만남은 삼국시대 외교사에서 가장 품격 있고 성공적인 회담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224

[외교적 성과 보고 및 귀국]

성공적인 외교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손권에게 촉한과의 동맹 복원을 보고했습니다.
손권은 엄준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의 외교적 수완이 나라를 구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오나라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내실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엄준은 귀국 후 촉나라의 내부 정세와 제갈량의 의중을 상세히 분석하여 보고서로 남겼습니다.
그의 보고서는 향후 오나라의 대촉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가이드라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엄준은 외교 전문가로서의 명성까지 더하며 조정 내 입지를 더욱 굳혔습니다.

229

[위위 관직 승진]

왕궁의 수비와 의례를 총괄하는 고위직인 위위(衛尉)에 임명되었습니다.
손권의 최측근에서 왕실의 안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그의 고결한 성품이 왕궁의 질서를 세우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위위로서 엄준은 궁중 내의 법도를 엄격히 세우면서도 관리들에게 자비로운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왕궁이 단순히 권력의 중심이 아닌, 도덕적 모범이 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손권의 개인적인 상담가 역할까지 수행하며 국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232

[장소와의 효경 논쟁]

오나라의 원로 장소와 효경(孝經)의 해석을 두고 수준 높은 토론을 벌였습니다.
엄준은 효의 근본 원리에 대해 깊이 있는 논리를 펼쳐 장소로부터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이 논쟁은 오나라 조정 내에서 유교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소는 엄준의 해석을 듣고 "자네의 통찰력은 내가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있네"라며 극찬했습니다.
두 학자의 토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제가 되어 필사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엄준은 이 일을 통해 학문적으로 당대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235

[효경전 저술 완성]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유교 경전인 효경의 해설서인 '효경전'을 저술했습니다.
난해한 구절들을 명쾌하게 풀이하여 누구나 효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책은 오나라 관리들과 선비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아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엄준은 '효경전'에서 효가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넘어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진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의 저작은 문장이 수려하고 논리가 정연하여 후대 유학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저술 활동은 그가 단순한 관료를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탐구하는 학자였음을 보여줍니다.

240

[논어해 집필]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논어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논어해'를 집필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맞는 공자의 지혜를 추출하여 통치와 삶의 지침으로 제시했습니다.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에 나온 그의 역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엄준은 '논어해'를 통해 난세 속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품격과 정의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조정의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참고 서적으로 활용될 만큼 실용적인 가치를 지녔습니다.
저술 활동 중에도 그는 늘 겸손함을 유지하며 동료 학자들의 비판을 수용하고 보완했습니다.

245

[청렴과 정직의 상징으로 존경]

조정의 원로로서 부패한 관리들을 꾸짖고 청렴한 정치를 독려하며 신망을 얻었습니다.
말년에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여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의 직언은 손권조차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도덕적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는 집안에 재산을 쌓지 않았으며 가난한 선비들을 돕는 데 자신의 봉급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정 내의 갈등 상황에서 그는 늘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는 오나라 조정이 무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화적 품격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250

[후학 양성과 학문 정리]

관직의 전면에서 물러나 후배 학자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저술들을 최종 정리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역사적 사건들과 배운 지혜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 그가 정리한 자료들은 오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 일기 형식으로 남긴 기록들을 모아 당시의 정치와 풍속을 정리했습니다.
또한 '조설(潮說)'이라는 독특한 저작을 통해 자연 현상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서재는 늘 배움을 갈구하는 젊은이들로 북적였으며 그는 아낌없이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254

[위대한 선비의 서거]

평생을 학문과 국가에 헌신한 엄준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오나라 조정과 학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많은 이들이 애도했습니다.
그가 남긴 고결한 삶의 궤적은 오나라의 정신적 유산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나라의 앞날과 학문의 발전을 걱정하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손권의 후계자들도 그의 서거를 애도하며 국가적 예우를 다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후대에 칭송받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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