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흠
삼국시대, 무장, 손오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13
손책의 강동 평정기부터 주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맹장. 적벽대전 합비 전투 등 손오의 핵심 전장에서 활약하며 손권의 든든한 방패가 됨. 부유해진 뒤에도 검소함을 잃지 않고 사적인 원한보다 공적인 인재 등용을 우선시한 대인배. 손권의 권유로 학문에 정진하여 문무를 겸비한 국사(國士)로 칭송받음. 형주 공략의 대업을 완수한 후 귀환 도중 병사 손권의 깊은 애도 속에 생을 마감함.
194
흥평 원년(194년), 장흠은 손책이 원술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그의 측근이 되어 손책을 보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장흠의 군인 경력의 시작점이었습니다.
195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흠이 주태와 함께 해적 무리의 일원으로 등장하며, 195년 손책이 강동으로 진출할 때 장영을 물리치는 데 기여하고 손책의 부하로 합류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실제 역사 기록과는 다른 극적인 설정을 통해 인물의 매력을 더합니다.
[관직 역임 및 반란 진압]
갈양위와 세 현의 장을 역임하며 도둑을 잡고, 서부도위로 승진했습니다. 또한 여합과 진랑 등의 반란을 토벌하여 다섯 현을 평정하고 토월중랑장직에 올랐으며, 하제와 함께 이(黟)의 반란도 진압했습니다.
갈양위와 여러 현의 장을 지내며 도적들을 소탕하여 치안 유지에 공헌했으며, 이후 서부도위로 승진했습니다. 동야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합과 진랑 등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여 다섯 현을 안정시켰고, 이에 토월중랑장(討越中郞長)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하제와 함께 단양군의 속현인 이(黟)에서 발생한 반란을 평정하는 데도 일조했습니다. 이 공로로 경구와 소양을 식읍으로 받았습니다.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으로 진출하는 대규모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때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병사를 지휘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손책의 측근인 주태와 함께 활약하며 단양, 오, 회계 세 군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어서 예장 지역에 대한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손씨 세력의 강동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08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208년 주유의 지휘를 받으며 적벽 대전과 남군 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것으로 그려지며, 그의 용맹함이 강조됩니다.
건안 13년(208년), 오나라의 운명을 건 적벽 대전과 뒤이은 남군 전투에서 주유의 지휘를 받으며 혁혁한 공을 세워 조조의 대군을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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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함과 손권의 찬사]
부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매우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여, 손권이 직접 그의 집을 방문하여 이를 칭찬하고 화려한 옷과 장식품을 하사했습니다.
장흠은 높은 관직에 올라 부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처첩들에게도 값싼 옷을 입힐 정도로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고수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손권이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가 이러한 절검함을 칭찬하고, 특별히 화려한 옷과 장식품들을 하사하며 그의 고결한 인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건안 20년(215년), 손권이 합비(合肥)를 공격하던 중 진북(津北)에서 위나라 장수 장료의 기습을 받아 큰 위험에 처했을 때, 장흠은 목숨을 걸고 분전하여 손권을 무사히 구해내며 충성심과 용맹함을 입증했습니다.
[고위직 임명과 수도 복귀]
합비에서의 공로로 탕구장군에 임명되고 유수독을 겸했으며, 이후 서울로 소환되어 우호군이자 송사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합비 전투에서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고, 유수독(濡須督)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도로 소환되어 우호군(右護軍)으로서 송사(訟事, 소송 사건) 업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아 문무를 겸비한 인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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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방어 및 서성과의 화해]
조조가 유수를 공격하자 여몽과 함께 오군 총지휘를 맡아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과거 자신을 모함하려 했던 서성을 오히려 칭찬하여 그의 신뢰를 얻었고, 손권에게 아량 넓은 태도를 보여 칭찬받았습니다.
건안 22년(217년),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유수(濡須)를 공격해 오자, 여몽과 함께 손권 군의 총지휘를 맡아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 과거 무호령 서성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고 생각되었으나, 오히려 서성을 칭찬하고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서성으로부터 진심으로 복종을 받았습니다. 손권이 그 이유를 묻자, 개인적인 원한으로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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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속 관우 공격]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 공격에서 승리하고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장면이 추가되어 그의 활약상이 더 부각됩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219년 관우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과정에서 관우에게 직접 항복을 권유하는 등의 장면이 추가되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의 존재감과 활약이 더욱 극적으로 묘사됩니다.
[관우 공격 후 귀환 중 사망]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를 공략한 후, 개선하여 돌아오던 중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손권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고 그의 처자에게 많은 하사품을 내렸습니다.
건안 24년(219년), 관우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형주를 공략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치고 개선하여 돌아오던 길에 불행히도 병을 얻어 사망했습니다. 손권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며, 그의 공로를 기려 무호 백성 2백 호와 논 2백 경을 장흠의 처자에게 하사하여 그의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학문 정진과 국사 칭송]
여몽과 함께 손권의 권유로 학문에 힘썼으며, 후에 손권은 그를 학문을 좋아하고 의를 숭상하여 '국사(國士)'가 되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손권의 권유를 받아 여몽과 함께 학문에 매진하며 스스로를 발전시켰습니다. 훗날 손권은 그와 여몽을 칭찬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읽기에 힘써,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숭상하여, 마땅히 행할 바를 하니, 국사(國士)가 되었다"고 말하며 그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