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예

인물, 삼국 시대, 서진, 장군, 학자, 부마,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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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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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나라 출신 서진의 핵심 인물 사마소의 매제. • 뛰어난 학식과 군사적 재능으로 두무고 별명. • 오나라 정벌에 핵심적 기여 파죽지세 고사성어 탄생. • 《춘추좌전집해》 저술 등 학문적 업적 탁월. • 진나라 천하 통일의 주역이자 당대 최고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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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두예 탄생]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서진의 장군으로 이름을 날린 두예가 태어났다.

두예는 자를 원개라 했으며, 경조윤 두릉현 출신이었다. 전한의 사공 어사대부 두연년의 11세손이자 어사중승 두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257

[사마소 여동생과 결혼]

위나라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사마의의 딸이자 사마소의 여동생인 고륙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두예의 아버지 두서가 사마의와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어 두예는 관직을 얻기 어려웠으나, 이 결혼을 통해 비로소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풍락정후에 봉해짐]

하동 사람 악상이 두기의 공적을 기리는 글을 위나라 조정에 올린 것을 계기로 풍락정후에 봉해지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 기록은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 위서(魏書) 두서전(杜恕傳)에 남아있다.

264

[등애 모함 비판]

진서장군부의 장사로 재직 중, 동료 위관이 등애 부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위관은 그의 비판에 직접 찾아와 사과했다.

당시 위나라의 진서장군은 종회였으며, 위관은 종회와 함께 등애 부자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여 죽음을 초래했다.

268

[출척고과법 반대]

하남윤 자리에 있던 두예는 사마염이 관리들에게 적용할 출척고과법을 만들라고 지시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글을 올려 법안이 시행되지 않도록 했다.

270

[선비족 토벌 주장]

진주자사로 선비족 독발수기능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안서장군 석감의 즉각적인 공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의 궁핍을 이유로 봄까지 기다릴 것을 주장했다.

석감은 두예의 능력을 의심하여 그를 함거에 가두고 재물을 빼앗는 벌을 내렸으나, 석감이 선비족 토벌에 실패하면서 두예의 선견지명이 입증되었다. 이후 두예는 탁지상서에 임명되었다.

274

[상복 문제 논쟁]

진나라 황후 양씨의 장례 후 상복 착용 문제에 대해, 마음속으로 예를 갖추는 것으로 충분하며 굳이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당시 진규는 태자 사마충이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광은 그의 저서 《자치통감》에서 두예의 의견이 고전을 교묘하게 인용했을 뿐 진규의 의견보다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76

[오나라 정벌 상소]

정남장군 양호가 오나라 정벌을 상소했으나, 두예와 장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두예는 적극적으로 정벌을 지지했다.

278

[두무고 별명 얻음]

중국 북부 지역을 강타한 홍수와 메뚜기 피해에 대한 그의 해결책이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탁지상서로서 7년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처리하며 박학다식함이 빛나, 갖가지 무기가 갖추어진 무기창고에 비유되는 '''두무고'''(杜武庫)라는 별명을 얻었다.

[진남장군 임명]

군사 통솔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사망한 양호의 천거로 진남장군 겸 도독형주제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지인 양양으로 부임하자마자 오나라 서릉독 장정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두예는 용맹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탁월한 군사 지휘 능력으로 새로운 직책에 적응했다.

279

[오나라 정벌 촉구]

익주자사 왕준과 함께 오나라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사마염에게 전쟁 개시를 강력히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280

[강릉 함락 및 오연 죽음]

사마염이 마침내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할 때, 두예는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오나라 강릉독 오연을 처단했다.

강릉 함락 후 형주 남부 지역으로 진격하며 오군을 격파, 승승장구하였고, 아직 함락되지 않았던 오나라의 많은 군현들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

[파죽지세 고사성어 탄생]

오나라 정벌 중, 강물이 불어난다는 이유로 공격을 미루자는 의견에 대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아 몇 마디만 쪼개면 전부 쪼개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일갈하며 즉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 유명한 발언에서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했다.

두예는 건업(建業)을 향해 진격하게 했고, 익주에서 오군을 격파하고 서릉에 도착한 왕준에게도 건업 점령을 지시하는 편지를 보내며 통일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오나라 멸망과 천하 통일]

오나라 정벌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는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예는 정벌을 계속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왕준이 오나라 수도 건업을 점령하고 손호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내면서 오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사마염은 오나라 정벌의 논공행상에서 두예를 당양현후로 책봉하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천하 통일 후 업적]

천하 통일 후에도 휘하 군사들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형주에 운하를 파고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등 백성들의 삶에 이로운 여러 사업을 추진했다.

285

[두예 사망]

진나라의 중국 재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학자로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두예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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