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

장군, 관료, 전략가

num_of_likes 79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10:0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장군, 관료, 전략가
report
Edit

등애는 위나라의 명장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어린 시절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하여 사마의의 인정을 받았다. 운하 건설 등 국정 운영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촉나라 정벌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음평 지름길을 개척하여 촉한을 멸망시키는 결정적 공을 세웠다. 강유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등 수많은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최후에는 동료의 모함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함께 치수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7

[등애의 탄생]

위나라의 명장 등애가 태어났다. 그의 자는 사재로, 의양군 극양현 사람이다.

등애는 197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사재(士載)이다. 그는 의양군 극양현 출신으로, 훗날 위나라의 뛰어난 장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249

[강유의 국산 공격 방어 및 조성 전투 승리]

등애는 강유가 국산에 쌓은 성을 곽회의 지시대로 물줄기를 끊어 함락시켰다. 이후 강유가 조성을 공격하려 하자, 등애는 선수를 쳐 강유 군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249년 촉한의 강유가 국산에 성을 쌓고 구안과 이흠에게 수비를 맡겼다. 등애는 곽회의 전략에 따라 국산 성 주변의 물줄기를 차단하여 성 안의 촉한 군이 물 부족으로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강유는 요화를 보내 등애를 저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등애는 이를 간파하고 먼저 조성에 도착하여 강유가 이끄는 촉한 군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 등애는 토구장군으로 임명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250

[수춘 운하 구상 및 제하론 제출]

등애는 수춘 시찰 중 운하 건설을 구상하고 '제하론'을 지어 사마의에게 바쳤다. 이 구상이 받아들여져 운하가 완성되면서 수해 감소 및 군수 물자 수송에 크게 기여했다.

등애는 수춘 지역을 시찰하던 중, 운하를 통해 물을 끌어들이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구상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제하론'을 저술하여 사마의에게 제출했고, 사마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운하 건설을 지시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해당 지역의 수해 문제가 크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 이동과 식량 보급이 훨씬 원활해지는 등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이점을 가져왔다.

251

[남흉노 세력 분할 건의]

등애는 위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분할하여 약화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는 북방 민족에 대한 전략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조모가 등극한 후 등애는 방성정후에 봉해졌다. 251년 등애는 조정에 중요한 상소를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약화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는 흉노족의 분열을 유도하여 그들의 단합된 힘을 약화시키고, 위나라 북방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심모원려의 전략이었다.

255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 기여]

등애는 관구검과 문흠의 반 사마씨 봉기 진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연주자사로서 낙가성을 점거해 문흠을 유인한 후, 사마사의 대군과 합세하여 문흠을 대패시키고 오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255년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자, 당시 연주자사였던 등애는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낙가성을 점거했다. 문흠은 자신의 병력이 우세하다고 판단하여 낙가성을 공격했으나, 이미 사마사의 대군이 도착해 있었고 문흠은 결국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등애는 문흠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오나라로 망명하도록 만들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등애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안서장군을 대행하고 방성향후로 봉해졌다.

[강유의 적도 포위 격퇴 및 단곡 대승]

등애는 255년 강유가 왕경을 격파하고 적도를 포위하자 신속히 이동하여 포위를 풀었다. 이후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고 강유의 재침에 대비, 단곡에서 강유 군을 크게 격파하며 등후로 봉해지고 진서장군으로 승진했다.

255년 촉한의 강유가 위나라의 왕경을 대패시키고 적도성을 포위했다. 등애는 이에 재빨리 적도로 이동하여 포위를 해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많은 이들이 강유가 더 이상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등애는 방비를 늦추지 않았고, 얼마 후 다시 쳐들어온 강유를 단곡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 큰 공로로 위나라 조정은 등애를 등후로 봉하고, 진서장군으로 승진시키며 도독농우제군군사의 직책을 겸하게 했다.

257

[강유의 257년 침공 방어]

257년, 촉한의 강유가 위나라 국경을 다시 침공했으나, 등애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물러났다.

257년, 촉한의 강유는 다시 위나라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등애는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강유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그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262

[강유의 262년 침공 방어]

262년, 강유가 또다시 위나라를 침공했으나, 등애의 빈틈없는 방어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

262년, 강유는 다시 한번 위나라를 침공했으나, 이번에도 등애의 완강한 방어를 넘어서지 못했다. 등애는 강유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국경을 수호했다.

263

[촉 정벌 작전 개시 및 강유 격파]

263년, 등애는 사마소의 촉 정벌 계획에 회의적이었으나 참전하여 강유를 공격, 격파했다. 하지만 제갈서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63년 사마소가 촉나라 정벌을 계획하자, 당시 정서장군이었던 등애는 이 계획에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정벌이 확정되자 그는 결국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등애는 왕기, 견홍, 양흔 등의 장수들을 이끌고 강유를 정면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제갈서는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강유의 계책에 속아 그가 검각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면죽관 전투 승리 및 제갈첨 부자 전사]

등애는 면죽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제갈첨의 군대를 격파하고 면죽관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제갈첨 부자와 장준 등 촉한의 핵심 인물들이 전사했다.

강유 함락 후 등애는 면죽관으로 진격했다. 이곳에서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이 아들 제갈상 및 장준 등과 함께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등애는 휘하 장수들을 독려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면죽관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제갈첨 부자와 장준 등이 전사하며 촉한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졌다.

[촉한 멸망 및 유선의 항복]

등애가 성도로 진군하자 촉한의 황제 유선은 초주의 건의를 받아들여 등애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촉한은 멸망했고, 등애는 태위로 임명되고 식읍 2만 호를 받았다. 그는 백성을 잘 다스리고 오나라 정벌을 건의했으나, 자신의 공을 자랑하다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등애가 마침내 촉한의 수도 성도로 진군해오자, 촉한의 황제 유선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결국 초주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묶고 등애의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했다. 이로써 263년 촉한은 멸망하게 되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의 막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태위로 삼고 식읍 2만 호를 하사했다. 등애는 촉한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약탈을 금하며 항복한 자들을 잘 받아들여 칭찬을 받았다. 또한 사마소에게 유선을 우대하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건의하는 등 국정 운영에도 관여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고 촉한 사대부들에게 관대함을 자랑하며 자신을 강유 위에 두는 언행으로 식견 있는 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음평 통한 성도 진군 및 강유 함락]

종회가 검각에서 고전하자 등애는 제갈서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홀로 음평의 험준한 길 700여 리를 돌파하여 강유에 도달, 촉한 장수 마막의 항복을 받아냈다.

주력군을 이끌던 종회가 검각에서 강유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진군하지 못하자, 등애는 촉나라의 후방을 교란하고 강유의 군대를 물러나게 하여 종회의 진군을 돕고자 했다. 그는 제갈서와 함께 음평 길을 통해 촉한의 수도 성도를 직접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갈서가 협력하지 않고 종회에게 합류하자, 등애는 홀로 음평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산길 700여 리를 돌파하여 강유 지역에 도착했다. 강유를 지키던 촉한의 장수 마막은 험준한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즉시 항복했다.

[위나라 태위 임명]

촉한 정벌의 공로로 등애는 위나라의 최고위직 중 하나인 태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약 4개월간 태위직을 수행했다.

263년 9월, 촉한 정벌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등애는 위나라의 삼공 중 하나인 태위(太尉)로 임명되었다. 태위는 군사의 최고 책임자를 뜻하는 직위였으며, 그는 264년 1월까지 약 4개월간 이 직책을 수행했다.

264

[종회의 모략으로 체포]

등애는 종회와 위관 등의 모함으로 사마소의 의심을 받아 아들 등충과 함께 체포되어 함거에 갇혔다.

264년 1월, 종회는 자신의 부하 장수 위관, 호열 등과 공모하여 등애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등애가 사마소에게 보낸 상소문을 가로채 불손한 내용으로 바꿔 전달했고, 이를 통해 사마소는 등애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사마소의 명령으로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를 체포하게 했다. 등애는 새벽녘에 아들 등충과 함께 위관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함거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위관의 지시로 사망]

종회의 반란이 실패한 후 등애는 부하들에게 구출되었으나, 위관이 자신의 모함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전속을 시켜 등애와 아들 등충을 살해했다.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하자, 이 틈을 타 등애의 부하들은 함거를 부수고 그를 구출했다. 그러나 위관은 촉 정벌의 공을 독차지하고, 자신이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위관은 과거 등애에게 미움을 샀던 호군 전속을 부추겨 등애 부자를 추격하게 했다. 결국 전속의 손에 등애와 그의 아들 등충은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273

[명예 회복]

단작과 번건의 상소로 등애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그의 맏손자 등랑이 낭중에 임명되며 명예가 일부 회복되었다.

273년, 의랑 단작과 옛 촉나라의 신하 번건이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등애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호소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등애의 억울함이 인정되었고, 그의 맏손자인 등랑이 낭중에 임명되면서 등애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