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황제, 군주, 문인, 정치가

num_of_likes 61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54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황제, 군주, 문인, 정치가
report
Edit

조위의 첫 황제 조비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빛났지만 통치자로서의 도량은 아쉬웠던 인물입니다. 아버지 조조의 기반을 이어받아 위를 건국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형제를 몰아내고 충신을 잔혹하게 다루는 등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백성을 힘들게 한 법률과 무모한 대외 정책으로 국력을 낭비하며 그의 치세는 위나라의 단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87

[천재성 드러낸 어린 시절]

187년, 조조와 변씨 사이에서 태어난 조비는 출생 당시 푸른 구름이 하늘을 감싸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였습니다.

6살에 궁술을, 8살에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정도로 뛰어났으며, 문학적 소양도 매우 높아 고금의 경서와 제자백가에 통달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다방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의 저서 《전론》에 따르면, 조비는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6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8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을 사사하고 모든 검법에 숙달했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이미 8살에 붓을 들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고, 고금의 경서와 그 주석, 제자백가 등에 완전히 통달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객관적인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일 뿐임을 고려해야 한다.

217

[위왕세자 책봉]

총명했던 조충의 요절과 조식의 실책 덕에, 조비는 조조의 25명의 아들 중 치열한 후계 경쟁을 뚫고 217년 31세의 나이에 위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세자 낙점 소식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옆에 있던 신비의 목을 끌어안고 기뻐했지만, 이를 본 신비의 딸 신헌영은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지는 고된 일에 그리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조조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측실 유씨 부인이 낳았으나 본래 정실인 정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嫡子)로 입적된 장남 조앙은 197년(건안 2년)에 장수(張繡)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역시 적자로 입적된 차남 조삭은 조앙이 죽기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변씨 부인이 정실이 되었으므로 조비의 후계 지위는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환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조충(曹沖)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조조는 그를 매우 예뻐하였다. 그러나 조충은 208년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조충이 죽자 조조는 다른 아들들에게 "조충이 죽은 것은 나에게는 불행이지만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조조가 조충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동진의 역사가 손성은 이에 대해 조충은 어차피 서자라 살아있었더라도 후계자가 되기 힘들었기에 조조가 말을 가볍게 한 것이라고 평했다. 211년 조비는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으로 오르지만, 조조는 다섯째 아들 조식(曹植)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아직도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조식이 술로 말미암아 조조의 노여움을 사고 총애를 잃자, 마침내 217년 그의 나이 31살 때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220

[황제의 패륜과 광기]

황제 즉위 첫 해,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삼년상 기간임에도 고향인 초에서 백성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는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조조가 죽을 때 돌려보냈던 측실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변태후마저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광적으로 사냥에 집착하여 조조의 상중에도 사냥을 고집했고, 수많은 백성과 논밭을 희생시켜 막대한 폐해를 입혔습니다.

220년, 고향인 초에 가서 관현은 물론 백성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축제를 벌였는데 이때는 조조가 죽은 바로 그 해로 조조의 삼년상 기간이었다. 당시에도 삼년상을 온전히 지내는 것은 힘들었지만 이러면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자신에게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원소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육년상을 묵묵히 치러내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도 조비는 고향에서 축제를 벌이며 패륜적 행위를 벌였다. 동진의 역사가인 손성은 이 일에 대해 "임금이 이러니 이로부터 위나라가 오래 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라고 평했다. 다음 해인 221년에는 당시 위나라의 종묘가 있던 업으로 가지 않고 자신이 있던 낙양에서 조조의 제사를 지냈는데 민간의 제사와 같게 치렀다. 조조는 죽을 당시 위왕이었고 조비는 황제로 오른 뒤 조조를 태조 무황제로 추증까지 했으니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평민과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 버린 것이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는 죽을 때 자신의 측실들로 하여금 바느질하며 스스로 먹고살라며 약간의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이후 조비가 병에 걸려 어머니인 무선황후 변씨가 조비의 침실로 문병을 하러 갔더니 그 때 조조가 돌려보냈던 조조의 측실들이 돌아와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러 살게 했다는 것이다. 경악한 변씨는 자기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조비가 죽고 난 후에도 무덤에 가서 애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조비는 사냥에 광적으로 집착하였는데, 조조의 상중에도 계속해서 사냥을 나가려 했다. 그러자 부마도위였던 포훈이 조조의 상중에는 사냥을 자제해달라고 수레를 멈추고 표를 올렸는데 조비는 표를 직접 찢어버리고 사냥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조비가 수레를 멈추고 수렵과 음악 중에 무엇이 좋냐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유엽이 수렵이 좋다고 하자 포훈이 그것을 반박하니 조비는 노여워하면서 사냥을 멈추고 궁으로 돌아와서 포훈을 우중랑장으로 이동시켜 버린다. 220년, 장수교위 대릉이 조비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조비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가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로 경감시켰다. 또 조비가 사냥을 나갔을 때 울타리가 허술해 사슴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자 분노한 조비가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소칙이 조비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조비는 앞에서는 소칙을 칭찬했지만 얼마 후 소칙을 타지로 좌천시켜 버리고 소칙은 임지로 가던 길에 사망한다.

[잔인하고 치졸한 황제]

황제 즉위 후 조비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동생 조식의 측근들을 몰살하고 조식마저 철저히 감시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게 했습니다.

조창은 독살설에 휘말렸고, 조강지처인 견황후까지 질투심을 핑계로 사사했습니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 하후상의 애첩을 질투심에 죽게 만들었으며, 개국 공신인 왕충을 놀리고 우금을 비참하게 만들어 죽게 하는 등 그의 잔인하고 치졸한 인성이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조비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공행상을 폈지만, 과거에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자는 육친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의 쟁탈자였던 조식의 측근들은 조비의 즉위 직후 삼족이 몰살되었으며, 조식은 모친 변 태후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그 후 지방으로 쫓겨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다시는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영지를 옮기면서 쓸쓸히 죽었다. 또 다른 동생인 조창도 비슷하게 취급되었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조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나온다. 조강지처인 견 황후도 질투가 심하다는 핑계를 대고 사사하였다. 조비의 절친한 친구였던 하후상은 조씨 일족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조씨인 정부인을 놔두고 다른 애첩을 총애하자 조비는 그 애첩의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 하후상은 슬픔을 못 이겨 애첩의 무덤을 파 시체를 껴안는 등 우울 증세를 보이다 죽었다. 조비 본인은 조강지처인 견황후에 대한 사랑이 식자 그녀를 내팽개쳐 죽였다는 점에서 그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조조의 공신인 왕충이 기아를 못 이겨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조비는 광대를 시켜 무덤에서 해골 하나를 도굴한다. 그리고 그걸 왕충의 안장에 매달게 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개국 공신인 명장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다가 돌아온 후, 조비에게 용서를 구하자 조비는 고사를 인용하며 우금을 거짓으로 용서한다. 그리고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가는 중에 조조의 묘에 들러서 참배토록 했는데 그곳에다 미리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는 내용의 벽화를 그려 두었다. 여기서 우금은 비굴하게 항복하는 모습이었고, 이를 본 우금은 울화통이 터져 병을 앓고 죽게 된다. 또 다른 개국공신인 당숙뻘 조홍(曹洪)에게 조비는 무리하게 재물을 빌리려고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비는 그 때문에 조홍에게 원한을 품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조홍의 식객이 범한 죄를 이유로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자 조비의 어머니 무선황후는 조비가 견황후를 사사하고 새로 들인 곽황후에게 조홍이 죽으면 너를 폐위시키겠다고 협박했고 곽황후가 조비에게 애걸복걸하여 조홍은 겨우 죽음은 면했지만 면직당하고 관작과 봉토를 깎이었다. 또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조조의 공신이었는데, 포신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포훈을 후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포훈은 원래 조비의 첩이었던 곽황후의 동생이 관아의 물건을 도둑질하자 이를 봐달라고 하는 조비의 부탁을 거절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서 사형시켰다. 포훈이 계속해서 간언하자 이후 조비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포훈을 잡아들여 죽이려 했다. 법에 따르면 포훈의 죄는 징역이면 충분했고 신하들도 포훈을 살려달라고 공동으로 표를 올렸지만 조비는 자의적으로 법을 위반해서 사형시킨다.

[인재 안목 부족]

조비는 촉나라에서 귀순한 맹달을 유엽과 사마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상용태수에 임명하는 등 인재를 보는 안목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또한, 정의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동생과의 결혼을 막아 결국 그의 한을 사게 만들었고, 이후 정의는 조식의 편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정의는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동생 청하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막고 자신의 친구인 하후무와 결혼시켰다. 이후 정의를 직접 본 조조는 정의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것을 보고 정의가 사팔뜨기가 아니라 장님이라도 그와 결혼시켰어야 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누구의 편도 아니었던 정의는 이 일로 한을 품고 조식의 편을 들게 되었지만 조비는 왕에 오른 이후 정의 집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조위 건국, 황제 즉위]

220년 정월, 아버지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조비는 그 해 12월 10일,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후한 헌제의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며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이로써 조비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선양을 통해 제위를 계승하여 황제가 된 인물이 되었으며,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기는 대대적인 변화를 단행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실제로 헌제는 주살되지 않았고 이후 조예 대에 죽고 시호도 추증받는다.

222

[손권 오왕 책봉 실책]

이릉대전을 앞두고 위와 촉의 협공을 우려한 손권이 거짓 항복을 해오자, 조비는 유엽의 간언을 무시하고 이를 받아들여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했습니다.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패배하자 손권은 즉시 태도를 바꾸었고, 조비는 분노하여 매년 대군을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하여 난세를 연장하고 촉나라가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이릉대전을 앞두고 위와 촉의 협공을 우려한 손권(孫權)이 거짓으로 순종의 뜻을 밝히며 항복해오자 그 항복을 받아들인다. 유엽은 손권의 속마음을 알고 항복을 받아주는 대신 촉과 함께 오를 먼저 정벌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손권을 오히려 오왕으로 책봉한다.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하면 오의 단결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유엽이 이도 반대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았다. 이릉대전에 승리하자 유엽의 예상대로 손권은 즉시 태도를 바꾸어 태자를 인질로 바치기를 거절하였다. 분노한 조비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동원해 매년 손권을 공격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국력만 낭비하였고 이는 난세를 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이로 인해 오나라를 적으로 돌렸으며 이릉대전에서 대패한 촉나라는 편하게 국력을 회복하여 조비의 뒤를 잇는 조예 대에는 촉의 제갈량이 북벌을 하게 된다. 조예는 재위기간 내내 양 국가의 협공을 막아내야 했다. 조비의 군재는 아버지인 조조나 동생인 조창과는 달리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릉대전 당시에 조비는 스스로 유비가 병법을 모른다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이 오나라를 침공했을 때 서성이 급하게 만든 가짜성에 속아 후퇴했을 정도였다.

226

[황제 조비의 사망]

226년 6월 29일, 평소 주색에 빠져있던 조비는 결국 병을 얻어 40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 뒤,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어린 태자의 후사를 부탁했습니다.

조비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조예는 조비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 사면하고 복권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