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

군벌, 황제 참칭자, 후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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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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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혼란기에 명문 사세삼공 원가의 적자로 태어난 원술은 탁월한 가문의 배경과 권력욕으로 시대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에서 입지를 다졌으나 이복형제 원소와 앙숙이 되어 끊임없이 대립했습니다. 결국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고 극심한 사치와 실정을 거듭하며 백성의 신망을 잃고 모든 기반을 탕진했습니다. 평생의 원수인 조조에게 쫓겨 비참하게 객사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습니다. 그의 삶은 시대의 탐욕과 몰락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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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명문 원가의 적자, 탄생]

명문 원가의 적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조부 원안 이래 4대가 삼공에 오르며, 그 위세는 당대 최고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호방하게 사냥을 즐기다 마음을 고쳐먹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섰습니다.

점차 관위가 올라 후한 말 중요한 자리를 두루 거쳤습니다.

원술은 예주 여남군 여양현 출신으로, 자는 공로(公路)입니다. 그의 가문은 '사세삼공(四世三公)'으로 불릴 정도로 후한 시대 최고의 명문가였습니다. 형제로는 원기, 그리고 이복형제인 원소가 있었습니다. 원술은 어린 시절 사냥을 즐기다가 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으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절충교위, 하남윤, 호분중랑장을 거쳐 후장군에 이르렀습니다.

189

[십상시의 난 개입]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에게 살해당하자,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여 환관들을 몰살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후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그를 후장군에 임명하며 협력을 구했으나, 원술은 이를 거부하고 남양군으로 피했습니다.

이는 동탁에 대한 반감을 명확히 드러낸 행동이었습니다.

중평 6년,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원술은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여 환관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원술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며 협력을 요청했으나, 원술은 남양군으로 피신하여 동탁에게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190

[반동탁 연합군 참여]

동탁의 횡포에 맞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원술은 중요한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때 장사태수 손견이 남양태수를 죽이고 남양군을 원술에게 바쳤으며, 원술은 이에 손견을 예주자사로 임명하는 등 핵심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동탁 타도의 선봉에 서는 듯 보였습니다.

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가 심해지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원술 또한 그 일원이 되었습니다. 장사태수 손견은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고 남양군을 원술에게 바쳤으며,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로 임명했습니다. 형주자사 유표 역시 원술을 남양태수로 추천했습니다.

[동탁의 칙사 처단]

동탁으로부터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러 온 소부 음수를 잡아 죽이며, 동탁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습니다.

이는 연합군 내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음력 6월, 동탁이 파견한 소부 음수를 잡아 죽여 동탁에 대한 적대감을 분명히 했습니다.

191

[원소와 대립 격화]

반동탁 연합군이 원술-공손찬 연합과 원소-유표 연합으로 완전히 갈라서면서 피 튀기는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원술은 이복형제 원소를 '우리 집 종놈'이라 부르며 극도로 비난했고, 원소와 연계된 이들을 강하게 응징하려 했습니다.

평소 사치스럽고 가혹한 세금 징수로 백성과 심복들의 불만이 높았습니다.

이 무렵 연합군은 원술-공손찬 연합과 원소-유표 연합으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원술은 원소를 '쌍것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우리 집 종놈을 따른다'며 비난하고, 공손찬에게 편지를 써 원소는 원씨의 자식이 아니라고 퍼뜨렸습니다. 원소는 주씨 형제를 이용해 원술을 방해했습니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며 가혹하게 세금을 걷어 백성과 주씨 형제의 미움을 샀습니다. 원술은 손견과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을 출진시켜 주씨 형제를 양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맹장 손견의 전사]

손견을 앞세워 형주의 유표를 밀어붙였으나, 이 전투에서 맹장 손견이 전사하면서 원술의 큰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이는 원술 세력에게 치명적인 손실이었으며, 이후 그의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손견을 앞세워 형주자사 유표를 밀어붙였으나, 손견이 전사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양양 전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우 황제 옹립 반대]

연합군의 맹주 원소가 헌제 대신 유우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 하자, 원술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신하된 마음이 없으면서도 명분론을 내세워 동탁 타도에 집중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들고 싶지 않았던 속셈으로 비춰졌습니다.

정월, 원소는 헌제 대신 명망 있는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원술은 신하로서의 대의를 들먹이며 반대했습니다. 유우 본인이 거절하여 옹립은 무산되었습니다.

[손견 보급 중단 소동]

휘하의 맹장 손견이 양인에서 여포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원술은 손견이 낙양을 점령하면 다른 뜻을 품을까 봐 보급을 중단했습니다.

손견의 강력한 항의와 충성 맹세 후에야 의심을 풀고 보급을 재개했습니다.

이는 원술의 의심 많고 소심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음력 2월, 휘하 손견이 양인에서 호진과 여포를 격파했습니다. 원술은 손견이 낙양을 점령하면 다른 뜻을 품을까봐 보급을 중단했습니다. 손견이 노양현까지 100여 리를 밤새 달려와 사심이 없음을 설명하자 의심을 풀고 보급을 재개했습니다. 손견은 낙양까지 진출했다가 노양으로 돌아왔습니다.

192

[양주자사 교체 성공]

양주자사 진온이 병사하자, 원소는 후임으로 원유를 내려보냈습니다.

원술은 이를 격퇴하고 자신의 사람인 진우를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는 원소와의 세력 다툼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양주자사 진온이 병사하자 원소는 후임으로 원유를 내려보냈지만, 원술은 그를 격퇴하고 대신 진우를 양주자사로 임명했습니다.

193

[조조에게 대패, 남하]

유표가 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흑산적과 어부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소 진영의 조조에게 광정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양읍, 영릉현을 거쳐 양주 구강군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유표가 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진류군 봉구현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조가 광정(匡亭)에 주둔하던 원술 부하 유상을 격파하고 봉구로 진격해왔습니다. 양읍현으로 철수하니 조조가 태수수 물을 성으로 흘려보냈습니다. 결국 양군 영릉현을 거쳐 양주 구강군으로 도주했습니다.

[수춘 확보, 서주백 자칭]

수춘현에서 정무를 보던 진우가 원술을 거부하자, 원술은 회북의 병력을 규합하여 수춘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진우는 하비국으로 달아났고, 원술은 구강군 일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발판 삼아 스스로 서주백이라 자칭하며 세력 확장에 나섰습니다.

수춘현의 진우가 원술을 거부하자, 음릉현으로 물러났던 원술은 회북의 병력을 규합하여 수춘으로 향했습니다. 진우는 화의를 청했으나 원술은 그 아우를 붙잡고 계속 진군하여 진우를 하비국으로 달아나게 했습니다. 손분과 오경이 주씨 형제를 축출함으로써 원술은 구강군 일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스스로 서주백이라 자칭했습니다.

[황실 칙사 무시]

조정을 농단하던 이각 연립 정권은 원술과 손을 잡으려 태부 마일제를 칙사로 보내 좌장군과 가절을 수여하고 양책후에 봉했습니다.

그러나 원술은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하며 조정에 대한 경시 태도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조정을 농단하던 이각 연립 정권은 원술과 손을 잡으려 태부 마일제를 칙사로 보내 좌장군과 가절을 수여하고 양책후에 봉했습니다. 정작 원술은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했습니다.

194

[강동 진출 개시]

손견의 장남 손책을 시켜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게 하고, 오경과 손분에게는 유요에게 빼앗긴 단양군을 수복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는 강동 지역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중요한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흥평 원년, 손견의 장남 손책을 시켜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게 하고, 양주자사 유요에게 빼앗긴 단양군은 오경과 손분더러 수복하라 했습니다.

195

[손책 강동 평정 주도]

손책이 육강을 격파하고 유요와의 전선에서 장강을 건너 강동 평정을 가속화했습니다.

원술은 이에 혜구를 양주자사로, 유훈을 여강태수로 삼아 자신의 세력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려 했습니다.

손책이 육강을 쳐부수고 유요 전선으로도 장강을 건너 전진했습니다. 원술은 혜구를 양주자사로, 유훈을 여강태수로 삼았습니다.

[황제 참칭의 야망 확신]

참위서의 '한나라를 대신할 자는 당도고(當塗高)이다'라는 구절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맹신했습니다.

심지어 원씨가 순임금의 후예이며 오행상생으로 자신이 황제가 될 차례라고 주장하며, 과거 손견이 습득했던 전설의 전국옥새를 그의 처로부터 빼앗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벌였습니다.

원술은 참위서의 ‘한나라를 대신할 자는 당도고(當塗高)이다’라는 구절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인 술(術)이나 자인 공로(公路)의 로(路)에 ‘길’이란 뜻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원씨가 진나라의 후손이고 순임금의 후예이므로, 오행상생에 따라 자신이 황제가 될 차례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황제 참칭의 마음을 품고 이전에 손견이 얻었던 전국옥새를 그의 처로부터 빼앗았습니다.

[황제 참칭 논의 강행]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소집하여 황제 참칭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주부 염상과 장범의 동생 장승이 맹렬히 반대했지만, 원술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며 자신의 야심을 꺾지 않았습니다.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고초를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원술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황제 참칭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주부 염상과 장범의 동생 장승이 역사적 사례를 들어 반대했으나, 원술은 불쾌해했습니다.

196

[유비-여포 관계 이간]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려 하자 장노를 보내 방해했고, 서주목 유비와는 회수에서 대립했습니다.

당시 여포가 유비의 신세를 지고 있음을 이용하여, 여포에게 유비를 배신하고 하비를 탈취하면 군량을 조달해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이 약속은 여포가 유비를 공격하게 만들었지만, 원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건안 원년,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려 하자 장노를 보내 방해하는 한편, 서주목 유비와 회수를 사이에 두고 우이현과 회음현 일대에서 다투었습니다. 여포에게 동탁 주살과 조조와의 전투를 치켜세우며 유비를 무찌르겠다고 회유하고 군량 조달을 약속했습니다. 여포가 이에 응해 유비의 뒤를 쳐 하비를 탈취했으나, 원술이 군량 약속을 지키지 않자 여포는 유비에게 소패에 발붙이게 허락했습니다. 원술은 유비를 완전히 정리하려 기령에게 3만 명을 줘 출전시켰으나 여포가 제지했습니다.

[손책, 강동 평정 완료]

그의 명령을 받은 손책은 강동 지역을 맹렬히 평정하여 회계군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이는 원술 세력의 외형적인 확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손책의 독립적인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동에서는 손책이 회계군까지 평정하며 원술의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197

[최초 황제 참칭, 중建國]

마침내 부명(符命)을 받았다며 스스로 제위에 올라 '중(仲)'이라는 국호를 세웠습니다.

구강태수를 회남윤으로 승격시키고 공경백관을 두는 등 정식 황제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는 한나라 황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대담한 찬탈 시도로, 당대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어이 부명(符命)을 받았다며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중(仲)'이라 했습니다. 구강태수를 회남윤으로 승격하고 공경백관(公卿百官)을 두었으며 천지에 제사지냈습니다.

[조조군에 또 대패]

조조가 친정을 개시하자, 원술은 장훈 등 주력 장수들을 남겨두고 자신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장수들은 조조에게 호현 부근에서 참패하여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원술의 군사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세력 이탈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조조가 친정을 개시하자 장훈, 교유, 이풍, 양강, 악취를 남겨두고 돌아왔습니다. 호현 부근에서 참패하여 장훈만 간신히 퇴각하고 다른 네 장수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극심한 사치와 기근]

군대가 쇠약해지고 이반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까지 겹쳐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리는데도 원술은 첩을 수백 명 거느리고 비단옷을 입으며 육식을 질리도록 하는 등 사치를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민심 이반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군대가 쇠약해지고 이반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원술 밑에서 패국상으로 있던 서소가 군량미 10만 곡을 풀자 원술이 화가 나 참하려 했으나, 서소의 태도에 감동하여 그를 살렸습니다. 원술은 명성은 소중히 여겼을지라도 천성은 오만방자했습니다. 사치는 더욱 심해져 첩이 수백 명에, 비단을 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양곡과 고기를 질릴 정도로 먹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는데도 이를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손책 독립, 여포 배신]

황제 참칭을 간하던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또한 여포에게 딸을 보내 사돈을 맺으려 했으나, 여포가 진규의 만류와 원술에 대한 반감으로 이를 거절하고 사자 한윤을 붙잡아 조조에게 압송하면서 원술은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참칭을 간하던 손책은 독립했습니다. 원술은 여포에게 한윤을 사자로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그 딸을 데려가 사돈을 맺으려 했습니다. 이전에 원술과 여포는 서로 사돈을 맺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패국상 진규의 만류와 여포의 원술에 대한 싫은 마음으로 딸 일행을 돌려세우고 한윤은 붙잡아 허도로 압송했습니다.

[여포 공격전 대참패]

여포의 배신에 크게 분노하여 장훈, 교유 등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여포를 공격했지만, 휘하의 한섬과 양봉이 여포에게 붙으면서 대참패를 겪었습니다.

이 패배는 원술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의 위세가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노한 원술은 장훈, 교유, 한섬, 양봉 등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일곱 길에서 여포를 밀고 올라갔지만, 한섬과 양봉이 여포한테 붙으면서 참패했습니다.

[진국 침입, 잔혹행위]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이 양식 원조 요청을 일축하자, 원술은 휘하의 장개양을 시켜 그들을 살해하고 진국을 침입하는 잔혹한 행동을 벌였습니다.

이는 민심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으며, 그의 탐욕과 폭정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음력 9월,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이 원술의 양식 원조 요청을 일축하자, 휘하의 장개양을 유총과 낙준에게 접근시켜 그들을 살해하고 진국을 침입했습니다.

198

[여포 구원 실패]

뒤늦게 여포가 조조에 저항하며 원술과 협동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여포가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당했을 때, 원술의 구원 시도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원술은 마지막 동맹마저 허물어뜨리며 더욱 고립되었습니다.

여포가 뒤늦게야 원술과 협동하여 조조에 저항했습니다. 여포는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당했고 원술의 구원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산월 봉기 시도 좌절]

단양군 방면으로 조랑 등에게 인수를 주며 산월을 봉기시켜 손책에 대적하게 했으나, 이들은 모두 손책에게 진압당했습니다.

이는 그의 영향력이 거의 바닥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단양군 방면으로는 조랑 등에게 인수(印綬)를 주며 산월을 봉기시켜 손책에 대적하게 했으나, 이들은 손책에게 모조리 진압당했습니다.

[여포의 비참한 최후]

그나마 협력 관계를 모색했던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습니다.

이는 원술에게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몰락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섣달, 여포가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199

[궁궐 방화, 절망적 도피]

물자가 바닥나 자립조차 어려워지자, 궁궐을 불사르고 첨산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수하 진란과 뇌박에게마저 거부당했고, 사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완전히 고립된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 평생의 원수인 원소에게 의지하려는 최후의 선택을 했습니다.

여름, 물자가 바닥나 자립조차 어려워진 원술은 궁궐을 불사른 뒤 첨산(灊山)으로 갔습니다. 첨산에는 원술의 수하인 진란과 뇌박이 있었으나, 그들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바람에 더더욱 곤궁에 빠지고 사졸들은 흩어졌습니다. 근심과 번민에 휩싸인 원술은 어쩔 수 없이 원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원소 의탁 시도 좌절]

원소의 조카 원담이 원술을 맞이하려 했으나, 조조가 유비와 주령을 파견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청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수춘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때 그의 상황은 한 마디로 '천하의 왕자'에서 '갈 곳 없는 망자'로 전락한 것이었습니다.

원소는 내심 원술의 말이 옳다 여겼고, 청주자사로 있던 원술의 조카 원담이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 했습니다. 원술은 하비를 통해 청주로 가려 했으나 조조가 유비와 주령을 파견해 가로막는 바람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춘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비참한 최후, 객사]

수춘을 향하던 중 강정에서 식량이 고작 맥곡 가루 30곡밖에 남지 않았고, 더위에 꿀물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

평상에 걸터앉아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탄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분사했습니다.

그의 최후는 황제를 참칭하고 사치와 폭정을 일삼았던 말로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음력 6월, 수춘이 80리 남은 강정(江亭)에 이르렀는데 식량은 맥곡 가루 30곡만이 남았습니다. 더위가 한창이어서 꿀물을 찾았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평상에 걸터앉아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라고 한참이나 탄식하다가 피를 한 말가량 토하고 분사했습니다. 그의 남은 일족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했다가 손책이 여강군을 정복하면서 손책을 의지하게 되었고, 이후 딸은 손권의 측실(원부인)이 되고 아들 원요는 낭중에 임명되었으며, 원요의 딸은 손권의 오남인 손분에게 시집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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